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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우리를 위하는 자(마가복음 9장 33절 ~ 4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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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하는 자(마가복음 93341)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 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 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 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 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 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 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하시는 40절말씀이 오늘 상고할 잠언말씀입니다.공동번역성서에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특별히 가까이 따르는 제자들, 열심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그 문제는 제자도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문제입니다. 열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을 문제가 아닙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주님을 좇는 사람들에게 으레 있을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그 선한 행위 속에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시험이란 게으른 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 없는 사람에게만 시험이 있는 게 아닙니다. 특별한 열심이 있을 때, 그 특별한 열심이 더 큰 문제가 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주의하여야 할 점을 몇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개관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문제되는 것이 '지배욕'입니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3, 34)"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우리가 이 일 저 일에 임할 때에 보면 처음에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봉사해나가다 보면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다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권위를 행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느라면 불식간(不識間)에 지배를 하게 되고, 따라서 지배욕에 빠지기 일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결엔지 모르게 스스로 지배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이제는 내가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부리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은 남에게만 떠넘깁니다. 봉사자 된 정신과 마음은 흐지부지되고 지배자로 군림하는 자세만 남습니다. 지배욕-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문제되는 것은 '경쟁심'입니다. 아주 무서운 시험입니다.

이 시험에 빠짐으로 열심 있는 사람들끼리 부딪칩니다. 누가 더 열심이냐, 누가 앞서 가느냐, 누가 으뜸이냐, 누가 더 크냐,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더 사랑하시느냐, 누구를 더 인정해주시느냐 --복잡하게 부닥칩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십시다. 경쟁심이 곧대로 드러나는 결정적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노상에서 그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로, 누가 예수님께로부터 더 크게 인정을 받고 있느냐로 암암리에 냉전(冷戰)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로 형제간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이 둘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던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 가까이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 형제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에 누가 예수님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앉을 것인지, 예수님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을 일인자는 누구일지, 늘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남달리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머니까지 동원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 : 20, 21)"하고 소위 섭외(涉外)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씀 끝에 괄호를 치고 한마디 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빼놓고'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 말이 결국 이 말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가 엄연히 수제자인데 그는 빼놓고 두 아들만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시험치고는 참으로 치열한 시험입니다. 자리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어도 누가 크냐고 경쟁합니다. 열 사람이 있으면 누가 더 열심이냐로 저울질을 합니다.

경쟁심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로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누가 목사님하고 더 친하냐. 목사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느냐 --복잡해집니다. 서로가 암암리에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큰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심리들이 있습니다. 누가 먼저냐, 누가 으뜸가느냐, 하고 교회 직분을 두고도 '으뜸'을 가리고 따집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마는 소위 '수석장로(수석장로)'라는 명칭이 있는가본데 참 맹랑한 명칭입니다. '수석'이라니, 무엇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수석' 놓고 경쟁합니다. 누가 먼저냐, 누가 제일이냐 --이런 일이 무서운 시험의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되어 이런 경쟁심리를 극복하지 못하였다면 참제자일 수 없습니다. 이모저모로 시험을 받을 뿐입니다.

그리고 '독점욕'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마다 독점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 또한 여간 큰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이 예수님께 아뢰어 하는 말입니다마는 어디 요한만이 그러하였습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교회를 들여다보면 봉사를 놓고도 독점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가령 강단에 놓이는 꽃도 다행히 솜씨있는 분들이 많아서 고루 두루 돌아가면서 꽃꽂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어떤 교회들 보면 좀 할 줄 안다고 하는 사람이 꽃꽂이 봉사를 독점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봉사를 하고 싶어도 기회를 얻지 못해요. 제가 어느 교회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 크게 시험 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성도가 서툰 솜씨로 꽃꽂이해서 강단에 갖다놓았는가 본데 '단골'이 나타나더니 옆구리에 양손을 턱 짚고 서서 일별하고는 대뜸 쨍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게 뭐야? 이걸 꽃꽂이라고 해왔남? 당장 치워 버렷!"해서 초라할망정 일껏 정성 들여 해다 놓은 그 꽃을 다 치워버리고는 새로 돈을 많이 들여서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꽃을 가져다 놓았겠다, 아니나다를까 그 다음날에는 난리가 났지요. 교회가 온통 큰 시험에 말려들었습니다. 더구나 처음 초라하게 꽃꽂이해놓았던 사람은 가난한 사람인지라 더욱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또 한번은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그 교회의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참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 교회의 회계일을 13년이나 맡아보았는데, 예배당을 새로 짓게 되어 건축회계를 보느라고 일반 회계직은 내놓았다고 하면서 "내놓으니까 섭섭하더군"합니다. "그러실 테지요. 그 섭섭한 마음, 극복하셨습니까?"하고 제가 반문해보았습니다. "쉽지 않아요 이거 극복하느라고 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하면서 그는 자기 뒤를 이어 그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영 못마땅하다고 심경을 토로해요. 자꾸만 간섭을 하고 싶대요. "간섭하고 싶은 마음 참아 내느라고도 기도를 많이 합니다" --물론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이 집사님의 경우 만이겠습니까? 우리들의 일상에 이런 케이스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 부득이 내놓을 수밖에 없어서 내놓고는 남이 하는 것을 헐뜯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거 아무나 하는 일인 줄 아나?"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합니다. 독점욕의 소치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업도 독점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무조건 배제하는 것, 나 혼자만 하겠다는 것, 나 아니면 안 된다고 교만 하는 것 아무쪼록 삼갈 것입니다.

또한, 열심인 사람, 남보다 먼저 믿었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42절에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고 말씀하시어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이 무서운 죄가 된다고 경계하십니다. 나중 믿는 사람은 먼저 믿는 사람보고 따라옵니다. 그런데 먼저 믿는 사람이 신통치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 저 꼴이라니!' 실망을 안겨줍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무릇 직분을 맡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서 열심 없이 빈둥빈둥하고 언동(言動)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성도들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을 낼 때에 더욱 그리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낫다고 주님께서 엄히 경계하십니다. '나도 저분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저렇게 한번 믿어보자' -뒤에 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따라올 수 있도록 정직하게 믿고 정직하게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 사람 보니 예수 믿을 것 못 되누만' '믿는다는 사람이 저 꼴이란 말인가? 교회에 나가려 했는데 저런 사람 보니 정나미 뚝 떨어져 못나가겠어' --이렇게 남을 넘어뜨리는 사람, 남의 믿음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남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불화'입니다. 협력하고 단결하고 화목해야 하는데 열심인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분열하기가 쉬워요. 열심끼리 부딪쳐서 독점하려고 하니까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 협력해야 할 사람들인데 협력이 깨어져버립니다. 대개 열심 있는 교회를 보니 분열이 있습디다. 열심 내는 몇 사람 때문에 분열이 생깁니다. 열심 없는 사람은 숫제 말이 없어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에 분열은 예사로 큰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본문은 독점욕과 자기우월감 및 편견에 대한 말씀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을 주의경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가까이 모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듣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서 전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제 입을 열면 설교가 됩니다. 지금처럼 따로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설교하는 것은 늘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바닷가에 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이러이러한 일이 생겼는데 예수님께서 이러 이렇게 하셨습니다" -듣고 본대로 좍 이야기하면 그게 곧 권위 있는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권위 있는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느라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데도 어느 사이에 자신들이 우러름을 받게 됩니다. 듣는 사람들이 넋을 잃고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뒷날 제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사도 요한 만이 생존해 있을 때에 이 사도 요한이 그런 우러름을 특별히 많이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직접 모시던 사람들 중에서는 요한 한 사람만 남은 것을 알고 원근의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말씀 한마디만 들려주십시오." 지금처럼 인쇄기가 있어서 책으로 찍어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녹음기가 있어 예수님의 육성을 녹음해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사도 요한의 입이 바쁠 수 밖에요. 주님의 말씀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말씀하고 또 말씀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한 말씀이라도 더 많이 말씀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구름떼 같이 모여든 양()들을 상대로, 때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고자, 그는 영일(寧日) 없이 도도하게 설교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이윽고 마지막에는 노구(老軀)에 힘은 부치고 해서 의자에 앉은 채로 간곡하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아가파테 알렐루스!"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보십시다. 제자들이 저렇듯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예수님 말씀을 많이 듣고 예수님 하신 일을 많이 보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하고 하다보니 그들 스스로가 존경을 받습니다. 그들의 말씀에 권위가 따랐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과 가까이했다는 것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란 바로 이러한 때에 조심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십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美門)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 사람은 그 시로 성한 사람이 됩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덕에 두 사도가 뭇 사람들로부터 추앙 받는 순간입니다. 바로 조심해야 할 순간입니다. 위험한 순간입니다. 자칫하면 그들 자신의 어깨가 우쭐해지기 쉬운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내가 가로채기 쉬운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이한 느낌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무슨 말씀을 합니까? "이스라엘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하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낫게 한 것이라고,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나를 쳐다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간곡하게 저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장면입니다.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주의에 빠지게 되고, 봉사하기보다는 봉사 받는 사람이 되고 말기 쉽습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되고 지배자가 됩니다. 특권의식에 빠집니다. 내가 선택받았다고 하는 개념이 자기본위로 해석될 때에 무서운 함정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너는 선택 못 받았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버렸나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수십 년을 두고 열심히 예수 믿고 있어요. 그런데 제 남편은 아무리 전도를 해도 믿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것은 분명한데, 제 남편은 아무래도 선택받지 못했나봐요"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편견(偏見)에 빠진 분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받았다는 믿음으로 해서 오히려 자기만족에, 자기교만에 빠진 케이스입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으로 해서 타인들을 배제합니다. 관용과 온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특별히 요한이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 불린 요한이 주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독점의식, 특권의식, 자기본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시험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것을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말씀을 그 행간에 깔려 있는 것까지 자세히 꿰뚫어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요한을 비롯하여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 제자가 되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자상하게 일러주시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선택받았다는 데 대한 '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가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부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 귀한 일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 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 나를 고용하소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그런 나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시기도 하고, 그런 나를 통해서 세례도 베푸시고, 그런 나를 통해서 뭇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이렇듯 하나님의 손에 들리어 쓰임 받는 데 대하여 감사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입니다. 귀한 일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 선택받고 다른 사람은 선택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별로 좋지 못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저녁예배 설교를 부탁하기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님이 스스로 '주의 종'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교회 간판에도 'XX교회'에다 '주의 종 XXX'라고 새겨놓았더군요. 그날 저녁예배 주보에도 '사회 : 주의 종 XXX'라고 썼어요. '설교 : 곽선희 목사, 축도 : 주의 종 XXX' -순서에 이렇게 인쇄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레 언짢아졌지만 어떻게 합니까? 설교하러 갔으니 설교는 했고, 예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치고 그 목사님과 마주앉아 차를 나누게 되었을 때에 결국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 "." "목사님은 '주의 종'을 전매특허 받았소?" "……" 못 알아듣습디다. 하기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그런 짓 하지 않았겠지요. 나만 선택받았다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내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사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만 부르셨고 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부르신 것입니다. 이 생각이 확실하여야만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함께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은사는 다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사는 한결같은 것이 아닙니다. 받은 사람도 있고 못 받은 사람도 있지만, 받은 사람도 그 받은 바가 다 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누누이 말씀합니다. 주는 하나이지만 은사는 다르다, 은혜는 같지만 은사는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은 말씀 전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은 방언 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은 각양 봉사하는 은사를 저 나름으로 받았습니다. 은혜는 같지만 은사는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은사를 소중히 여김과 함께 저분이 받은 은사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와 꼭 같아야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같아서도 안되고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니까요. 모름지기 언제든지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저분은 말씀 전하는 은사를 받았다, 저분은 봉사하는 은사를, 저분은 심방 잘하는 은사를, 저분은 친교의 은사를 받아서 많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다, 저분은 사랑의 은사를, 저분은 인내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를 인정하여야 하는데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저 사람이 받은 은사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몹쓸 일입니다. 손은 손의 할 일을 가졌고, 발은 발의 할일을 가졌습니다. 각 지체가 저마다의 할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이 발을 무시할 수 없고, 발이 손을 하찮게 여길 수 없습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서로의 유기적 관계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 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았으면 '주의 이름으로' 역사가 나타났으니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나와 같지 않다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도 나의 일인 양 기뻐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의 공감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기쁨의 공감대는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남이 고통 당하는 것보고 동정하는 정도는 꽤 할 줄 아는데, 남이 기뻐할 때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대학 입시철입니다. 수험생이 있는 집들에는 누구할 것 없이 초비상이 걸려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들 한다고 해도 그 중의 일부는 시험에 붙고 일부는 떨어질 것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마는 내 아들은 합격을 했는데 저 집 아들은 떨어졌어요. 합격한 집에서 그 집보고 내 아들 합격했다는 말을 하지 못합디다. 제게 몰래 오셔서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제 아들이 합격했어요. 그런데 목사님,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말아주세요" 하기에 "왜요?" 물었더니 "제 옆집 아들은 떨어졌단 말예요"합니다. 이해가 갑디다. 내 아들 떨어졌더라도 남의 아들 붙은 것에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정(常情) 탓에 이같이 우스꽝스러운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가정입니다 마는, 내 아들 떨어졌으니 그 집 아들도 떨어져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시원해진다면 믿는 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내 아들은 떨어졌지만 너는 합격했구나, 장하다, 착하다 --이렇게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믿는 자의 마음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일삼아 명심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자라면 반드시 기쁨의 공감대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기뻐하는 자의 기쁨에 동참할 수가 있는 법입니다.

내게 기쁜 일이 있지만 남 괴로운 것 생각해서 내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참는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게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지만 남에게 있는 기쁜 일을 생각해서 내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그쪽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 내 언짢음을 나타내지 않고, 내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그 기쁨의 분위기를 나의 일인 양 누릴 수 있다면 과연 이것은 성인(聖人)만의 경지일까요? 참으로 귀한, 이런 마음이 우리 믿는 자의 보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기쁘고 즐거워야 할 결혼식 날에 와서 엉뚱하게도 우는 사람이 있습디다. 남의 결혼을 보면서 자신의 죽은 아들을 생각해서인지, 내 딸 시집 못가 노처녀로 지새는 것을 생각하니 울고 싶은 건지, 아무튼 무슨 서러움이 있는 것이겠지만 남의 잔칫날에 축하하러 와 가지고 우는 것은 어느 경우로 헤아려보아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남의 성공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성공이 아니라고 기뻐할 줄 몰라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선한 일, 다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 할 때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 칭찬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경쟁심'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쟁심부터 마음에서 몰아내어야 합니다. '건강백서'라는 것을 읽어보았더니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도 조심하고 마음도 기뻐야 하고…… 하면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 끝에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운동이 건강에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그러나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고 주의하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도 이기겠다는 욕심 없이 마음을 비우고 해야 건강에 보탬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운동뿐입니까? 바둑 같은 오락도 그렇습니다. 이기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덤비다가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어느 대학이라고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마는 그 대학의 친구 교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테니스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는 좀 들었지만 한 이십 년 해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후배 한 사람과 테니스 경기를 했는데 몇 번을 지더니 계속 지기만 하더랍니다. 지고 보니 약이 올랐는지 이젠 그만 하자고 하는 후배를 억지로 붙잡아 "한번만 더" "한번만 더"하고 몇 번을 더 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답니다. 그래 그 후배는 마치 자기가 선배를 죽인 것 같다면서 가책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으로 해서 운동이 오히려 백해무익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어느 모로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사에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선한 일을 할 때에도 그 같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에는 남이 올라가는 것도 참지를 못해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남 잘하는 것 보면 비난을 하기 일쑤입니다. 남을 눌러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경쟁의식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그 다음으로 주시는 교훈인즉 종 되어 출발했으니 끝까지 섬기는 자세로 임할 것이요, 형제관을 분명히 할 것이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높임으로 만족하는 성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참으로 위대한 말씀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실 시기와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선의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의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수호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지만, 이기적인 동기에서 전하는 자들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를 괴롭힐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가식으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니 나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공동번역성서, 1 : 15-18).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러니 열심히만 해다오 --참으로 철저하고도 깨끗한 마음입니다.

모름지기 다른 사람의 일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외모로 볼 것이 아니라 내면을 보아야 하는데 그 속은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선한 일을 하는데 가식인지 참인지,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그것은 내가 알 바 없습니다. 오직 저 사람도 하나님께서 쓰시고 계시다는 것만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우리를 따르지 않는 그 사람이지만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았으면 그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건 안 따르는 사람이건, 나와 의견을 같이하건 안 하건,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역사 하시는 것이니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내가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을 내가 비난하면 못씁니다.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면서 이를 비난한다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38)"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갑니다. 금족(禁足)의 이방인 집에 들어가는 것, 유대사람으로서는 파격(破格)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있어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모든 이방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이 말씀 듣는 그 모든 이방인들에게 내려오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시는 것을 보고 깜짝 들 놀랍니다. 그 이방인들도 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령 받았으니 이들이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공동번역성서, 10 : 47)" 성령세례 받은 사람들인데 물세례를 왜 못 주겠느냐 함입니다. 그래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방인들에게 세례 베풀었다는 이것이 유대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와 장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고자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오랜 토론이 있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실로 위대한 결단의 말씀을 펼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내 입을 빌어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뽑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그들에게도 내리셔서 우리와 똑같이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의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하지 못했던 멍에를 그 신도들의 목에 메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드는 것입니까? 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주 예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공동번역성서, 15 : 7 - 11)."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앙적 도량을 요구하심입니다. 내 생각에 조금 부족한 것도 같고 조금 다른 것도 같고 우리와 한패가 아닌 것 같겠지만 분명히 주 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것인데, 내 능력이 그를 고용해서 역사한 것인데 너희가 어찌 금하고 말고 한단 말이냐, 마음을 넓혀라 하심입니다. 신앙적 포용(包容)을 요구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덕성(德性)을 일깨우심입니다. 그런 덕성을 가지고 나를 따르라 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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