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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누가복음 20장 17, 18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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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누가복음 2017, 18)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 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 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공부할 말씀은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잠언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하시는 18절 말씀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님 앞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 말씀인 동시에 모든 심판의 기준이 되는 역사의 원리를 말씀하심이요, 구원과 심판의 진리를 가장 간결하게 또 원리적으로 설명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에는 늘 땅의 것을 들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땅 위의 언어들을 동원하시고, 땅 위에서 쓰이는 표현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땅의 의식, 땅의 논리적 구조, 땅의 사건들을 전부 사용하셔서 하늘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역사 끝에 있을 일, 현재에 있는 일, 또 누구나 경험하는 일, 앞으로 경험해야 할 일들을 아주 알기 쉬운 비유 속에 담아서 말씀하십니다. 무릇 주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평이(平易)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믿고 순종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사실은 아주 어려운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을 공부하기에 앞서 먼저 그 앞의 문맥을 살펴보십시다. 209절로부터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 사람을 이민을 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소출의 한 몫을 세로 거두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연히 주어야 할 세를 줄 생각은 않고 오히려 보낸 사람을 심히 때려서 되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의 땅에 농사를 지어 소출이 있으면 당연히 그 중의 얼마만큼을 땅 임자에게 세로 보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11절을 보니 땅 임자가 사람됨이 착한 것 같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시 간 그 종도 역시 얻어맞고 쫓겨왔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또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그 종 역시 얻어맞기만 하고 돌아옵니다.

주인이 그렇게 세 번을 시도했으나 세 번 다 똑같은 변을 당하고 보니 이제는 퍽 난처해졌습니다. "어찌할꼬?" - 고민하던 끝에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생각하고 마침내 그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보십시오. 저들은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이 온 것을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합니다. 그 아들을 죽여버리면 포도원은 저희 것이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여 그 아들을 죽이고 맙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15)"---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나 스스로를 비추어보십시다. 우리가 가진 물질, 건강, 시간이, 그리고 지혜가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임시로 위탁받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답니다. 이 본분을 다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보내시고 보내시다가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은 죽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는가, 심판이 얼마나 무섭겠는가 --- 이 말씀입니다.

문제는 아들입니다. 아들이 종말론적 구원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농부들이 마지막으로 보내진 아들의 말만 들었더라면 무사했습니다. 그 동안에 보냈던 세 종에 대해서 그렇듯 불량하게 대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보낸 아들의 말만 들었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농부들의 잘못을 용서하겠다는 것이 주인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고 말았으니, 그러고도 저들이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통첩, 종말론적인 경고를 저들은 묵살해버렸습니다. 마지막 계시자인 이 아들에게만 순종하면 구원을 받고, 거역하면 심판을 받는다 ---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또 다른 비유로써 말씀하시는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돌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라 하셨습니다. 이 돌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은 튼튼할 것이며 행복할 것이나,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질 것이요, 사람 위에 이 돌이 떨어지면 그 사람은 가루가 된다고, 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시편 11822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페트라 --- 반석입니다. 큰돌입니다. 매우 귀한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석입니다. 이 반석 위에 인격을 세웁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장마가 와도 문제가 없고 비바람이 쳐도 문제가 없겠다 하십니다. 튼튼하겠다고 하심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모래 같은 자기 지식이나 바람 같은 세상 명예, 그런 것을 기초로 하는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세상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를 세운 사람,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그를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인격을 세우고 사는 사람은 복되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잘 아시는 대로 세상 것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 위에 인격을 세우고 사는 사람은 동요가 없을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렸다---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뜻입니다. 모퉁이는 두 벽이 만나는 곳입니다. 집은 다 사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벽과 벽이 만나는 곳에 있는 돌이 모퉁이 돌 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을 말하는 것이고 연합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벽을 만나게 하시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두 세상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세대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 같은 모퉁이 돌이 되어 계십니다. 매우 귀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전부가 예수님께 의존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하고 예수님 위에 세워지고 예수님께 의지해서 벽이 세워지고 만나고 --- 이렇게 되는 사람들은 복이 있겠다고 하심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다 하십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 돌이 그 위에 떨어지는 자---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 자신이 주도자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814, 15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예수님의 복음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골칫거리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도둑에게 밝은 것이 싫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밝은 게 좋습니다. 그러나 밤에 도둑질하려고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밝은 짓이 영 좋지 않단 말입니다. 비 진리로 사는 사람에게는 진리라는 것이 아주 귀찮은 것입니다. 거짓된 사람은 참된 사람을 싫어합니다. 시기합니다. 참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사람은 거짓된 사람들끼리, 죄인은 죄인들끼리 살아야 편하지, 죄인이 의인과 함께 하는 것, 참 좋지 않거든요.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합니다. 내가 부족한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고, 나는 더러운데 저 사람은 깨끗하고, 나는 거짓됐는데 저 사람은 진실하다면 그 진실한 사람 때문에 나의 거짓된 것이 다 노출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회개할 마음도 없고 뉘우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렇고 보니 예수님이 걸림돌입니다. 그냥 둘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다 몰아내십니다. "어찌하여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느냐"하고 호통치시면서 막 몰아내는 판입니다. 이제는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있으니 전혀 예수님이 반가운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돌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할 결정적인 시간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항거를 합니다. 진리에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항하다가 다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급기야 파산하고 인격이 무너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런가하면 실질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복음을 수용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참 어렵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 때문에 걸려 넘어져요.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에는 어디를 읽든지 읽으면서 그대로 믿으십시오.

귀한 일입니다. 일단 믿고 보아야 그 다음의 것을 알게 됩니다. 의심하게 되면 거기서 걸려 가지고 그 다음은 아무 것도 모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갔다 하면 아! 건너갔구나, 꽉 막혔다는데 모세가 지팡이로 딱 내려쳤더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짝 갈라지면서 건너갔구나 하고 믿을 것입니다. 믿고 나면 이제 내 앞에 있는 이 무서운 홍해도 능히 열릴 것이다 하고 은혜 받을 수가 있는데, 홍해가 갈라졌다니, 에잇 그럴 수가 있나, 비과학적이다, 말이 안 된다, 한낱 전설인가 보다 하고 믿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오늘 내 앞에 가로막힌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앞에 가로막힌 홍해도 갈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에 있는 말씀, 천지창조로 시작해서 홍해건 부활이건 전부를 그대로 믿는 사람이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보는데, 이것 걸리고 저것 걸리고 하면서 넘어가다 보니까 딱 하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는 말씀만이 마음에 들어온다고 해요.

여러분, 성경은 전적으로 믿으십시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적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해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가 나와는 너무 먼 이야기라고,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사도 바울의 자기희생을 두고 사도 바울이니까 그렇지 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두고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지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봉사하신 이야기를 읽으면 나도 봉사해야겠다, 나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나도 예수님같이 능력만 있다면 하겠다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전부가 이렇게 걸려 넘어집니다. 어느 구절을 보아도 늘 의심만 하다가, 이렇게 걸려 넘어지다가, 어느 한때 은혜를 받으면서 보니까 그게 아니구나 싶고, 성경이 전부 내게 주시는 말씀인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나 출애굽기를 보나, 어디를 보나 오늘에 와서는 성령 안에서 이해하게 되니 전부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읽어 나가느라면 성경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구구절절이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특별히 십자가사건, 예수님의 부활---이 엄청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걸려 넘어집니다."성경에 이적만 없다면 성경도 참 좋은 책인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멍청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귀신들린 자가 나았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두고도, 그렇듯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속절없이 죽는단 말인가 합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믿겠노라'--오늘도 이런 소리하는 사람 참 많아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하십니다. 쓸데없이 성경에 가서 부딪히고 머리 깨지고 다리 부러지는 사람 많습니다.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언제나 조용한 명상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 구절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성경을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십니다. 여기서는 주도권을 돌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다음에는, 오늘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때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안받아 들이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나 종말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 끝에는 주님 자신이 주도하십니다. 주도적으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배반한 자에게는 그대로 이 돌이 떨어집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가루가 되리라 하십니다. 다니엘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잊어버렸습니다. 다니엘보고 그 꿈을 해몽해달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엉터리 요청이 어디 있습니까? 꿈이나 내놓고 해몽을 해 달래야지 꾼 꿈을 잊어먹고는 해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황당무계한 수수께끼 앞에서 다니엘은 그 잊어버린 꿈을 기억나게 해줍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31)." 그러자 왕은 "맞다 맞다, 내가 신상을 봤다"하고 비로소 기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 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돌이 혼자서 떴어요)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31-35)." 이런 꿈을 꾸었다는 것이지요. 이제 왕이 본 신상이 있습니다. 굉장하다 했는데, 공중에 돌 하나가 생기더니 이 신상을 때려부수는 것입니다. 신상은 간 곳이 없어지고, 돌은 점점 커져서 꽉 차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왕은 깜짝 놀랐지요. 깜짝 놀라서 꿈을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해몽까지 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돌이 나옵니다. 이 돌이 떨어질 때에 다 깨지겠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말씀함입니다. 황금 우상도 깨집니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왕국도 깨질 것이요, 파사 왕국도 깨질 것이요, 모든 역사를 심판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돌인 것 같았는데 이것이 떨어져서 전체를 부수고 마침내 이 돌이 세계에 충만하겠다 합니다. 이 돌은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을 말씀함입니다. 복음 자체가 심판적으로 역사할 것을 말씀함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복음을 반대하다가 망한 나라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다가 다 망했습니다. 복음이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바야흐로 세상은 동서의 화해 무드가 이루어졌다 합니다. 그러나 그실 화해된 것이 아닙니다. 동구가 망해 없어진 것입니다. 동독과 서독이 통합한 것이 아닙니다. 동독이 망한 것입니다. 완전히 손을 든 것입니다. 역사가는 앞으로 어떻게 기록할는지 모르나 동독에 가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면서 이야기할 때에 그들은 분명히 말합디다. 그것은 기독교의 승리라고,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기독교가 이긴 것이라고. 그 결과로 지금 헝가리 부다페스트 같은 데서는 공립학교에서까지 성경을 가르쳐요. 성경을 못 가르치게 하고 성경을 다 없애더니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성경밖에 길이 없음을 반증함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저는 일부러 공립학교에 가서 성경 가르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내가 내 눈으로 보아야 믿을 것 같아서 내 눈으로 성경 가르치는 것을 뒤에서 확인해보았던 것입니다. 선생님과 같이 이야기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동서 문제가 오늘처럼 된 것은 교회의 승리입니다. 과거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일 년에 평균 백만 명씩을 숙청해가면서 사회주의를 유지한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렇게 칠십 년 동안을 버티어 왔습니다. 그 공산주의가 결국은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요? 결국은 무너지고, 닫혔던 예배당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 성당에 가보니 수리하느라고 한창입디다. 제가 그림 보수하는 공장에 일부러 가보았습니다. 그 동안에 내버려두었던 그림들, 성화들을 뜯어다가놓고 색깔을 다시 살리는데, 정성이 대단해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조용히 앉아서 하나하나 벗기고 칠하고 하는데, 돈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해서, 너무도 감사해서 그렇듯 몰두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에 있는 분들 보니까 하루에 네 시간씩밖에 못 잔다고 합니다. 너무도 일이 바빠서, 너무나 할 일이 많아서입니다. 하도 감격해서 배가 고파도 즐겁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승리, 예수님의 승리를 구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치가들은 정치가들대로 보는 눈이 따로 있겠지만 분명히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무너뜨리고 하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다 무너진 것입니다. 완전히 무너지고 기독교 복음 앞에 무릎을 끓은 것입니다. "이 돌이 떨어질 때에" 그 사람은 가루가 되리라 ---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복음이란 부드럽고 은혜로운 것 같으나 이렇듯 심판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구원이요 축복이지만, 이를 거역하고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에게는 언젠가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역사의 저 끝을 내다보시고 계십니다. 내가 돌이다, 내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튼튼히 설 것이요, 나에게 부딪히는 자는 무너지리라, 내가 한 번 손을 들 때에는, 이것이 내려칠 때에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리라 -- 참 굉장한 역사관입니다. 저 앞을 내다보시고 계십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겠다 하십니다. 종말에는 주님께서 몸소 오셔서 역사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십니다. 우리는 이 돌에 부딪혀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돌이 떨어질 때에 가루가 되는 불행한 자가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돌 위에 올라서야 됩니다. 이 돌을 영접하고, 이 돌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 돌이, 이 반석이 그 인격을 보호할 것입니다. 창수가 날 때에 보호할 것입니다. 돌이 나를 세워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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