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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되신 예수(요 12:9-1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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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되신 예수(12:9-1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하니라."

 

요한복음 12장은 11장에 이어 나사로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확실히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이적입니다. 물론, 장님이 눈을 떴다든지, 문둥병이 나았다든지, 파도를 잔잔케 했다든지 하는 많은 이적이 있었지만, 이 사건들과 나사로의 사건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전에도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이 있었지만,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장례까지 하였고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는 상태에서 살려냈음을 감안할 때,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 클라이막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이 사건은 갈릴리 같은 시골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먼 시골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본 사람은 믿을 것이고 보지 못한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므로 확인이 용이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부인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째로, 나사로는 생존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살아 있으므로 의심이 나면 현지에 가서 만나 보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 눈앞에 증거가 있단 말입니다. 너무나 큰 사건이면서 증거가 분명했습니다.

네째로, 바로 눈앞에 유월절이 임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큰 절기인 유월절이 있는 바로 이 때에 일어났으므로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클로즈업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조용한 시점에서 일어나면 그대로 말살되고 묵과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 사건은 너무나도 중요한 장소에서, 중요한 시기에 일어나 크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 보면 "이 표적으로 인하여 온 세상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이유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사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살린 그 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신기하지만 남의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문제의 요점은 메시야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 대망 사상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이 표적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게 되고, 또 하나는 바리새 교인들은 매우 유리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 여기서 '너희'는 사두개파를 일컫는 말로써, 제사장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았으므로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자기들의 교리가 확증되어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하며, 너희들이 믿는 교리가 쓸데없다고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사로의 사건 때문에 바리새 교인들이 득세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사두개인들은 이 사건 때문에 불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리새인들과는 사이가 나쁜데, 더욱더 난처하게 된 것입니다.

난처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적 권한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부터 상당한 권력 자치권을 물려 받고 있었는데, 그 조건은 혁명이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한다는 약속 하에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반란이나 종교적 반란을 없이 해달라는 조건으로 그만한 권력을 로마로부터 받았는데,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나는 날이면 그 책임은 당연히 제사장들이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게 되자, 바로 앞장에서 이야기한 대로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의인이든 죄인이든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이 죽어서 온 국민이 편하다면 죽이자는 어리석은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정치적 상황이므로, 만일에 예수를 빙자해서 정치적 반란이 생기는 날이면 정말 곤란한 입장이었습니다.

둘째는,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자기들의 신앙 노선과 다른 현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육체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즉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다고 가르쳐 왔는데, 이제 나사로 사건으로 인해 그 교리가 잘못되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도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고 위신이 추락하게 되니, 그들의 입장은 말할 수 없이 난처한 것입니다.

세째는, 자기들의 허세가 폭로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권세를 가지고 도도하게 지내왔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하시면서 놀라운 권위로 그들을 제압하셨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므로 그들의 체면과 권위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초라해진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구의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때, 예수님은 대답 대신에 오히려 "세례 요한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들은 모여서 쑥덕거리기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는냐는 비판을 받을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 요한은 존경하는 백성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을 것이니, 아예 모른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논되어 모른다고 회피하는 답안을 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대답을 들으시고 "나도 너희들에게 무슨 권세로 왔는지 말하지 않겠다", 믿지 않는 너희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대화들이 사두개인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들의 권력, 위신, 명예, 권세 등이 무너질 때 실패를 시인하고 회개하면 문제는 간단한데, 억지로 위신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자니 곤란한 것입니다. 불의를 의로 말하려고 하면 의를 불의라고 해야하고, 죄인을 의인이라고 말하려고 하면 의인을 죄인으로 말해야 하니, 여기에 부득이함과 무리함이 있게 됩니다. 잘못을 완전히 시인하고 회개하여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는데, 자기 부정을 하지 못하니 그리스도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예수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면 예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는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2:9-11)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까지 죽인다는 것은 증거를 말살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새말로, 완전 범죄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니 골치 아픈 두 존재를 아예 없애려는 무서운 생각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심령은 여기까지 사악해집니다. 회개해야 할 그 시간에 회개하지 못하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저들의 생각 속에 신앙이라는 것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이라면, 설사 그 분을 죽였다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임은 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 썩어서 냄새나는 사람을 다시 살리신 예수, 즉 그런 능력을 가진 분을 어찌 죽이겠다는 발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죽음을 이기신 분을 다시 죽음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성서적으로 생각하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일입니다. 절대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는데, 이 일에 손을 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해서 이길 자가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을 전혀 엿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비인도적이요, 비상식적이요, 불신앙적으로 악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엄청난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실을 아시면서 당당하게 나귀새끼를 타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오십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12:12-14) 이것은 왕의 입성으로 대단한 용기입니다. 제사장들이 나사로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이 마당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행렬을 지어서 올라왔으니 말입니다. 죽음과 핍박을 각오하고 올라오게 됩니다. 때는 유월절로서 열 두 살 이상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드는 큰 명절입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문서를 연구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유월절 한 번에 죽인 양의 숫자가 186천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그 당시) 무려 2565백 마리의 양을 죽였다고 하는데, 정말 놀라운 숫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가족당 양 한 마리씩 바쳤으니, 유월절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대략 270만 이상으로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국민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조그마한 예루살렘에 270만이나 모였다니, 정말 놀라운 집회입니다. 이렇게 많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이 모였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정치 하에서 착취당하고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집회는 어려운 여건을 가진 사람들이 잘 모입니다. 많이 가졌고 건강한 사람들은 바빠서 모일 시간이 없지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예배가 유일한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회에서도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를 비교하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백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대개 시작 시간 5분 전에 와하고 모였다가 서로 인사하고, 예배가 끝나면 5분 후에 다 가버립니다. 그러나, 흑인 교회는 시작 시간 한 시간 전부터 모여서 여기저기서 인사하고 차를 마시며 교제하다가 예배드리고, 끝나고 나서도 다시 한 시간 이상 지체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 교회가 가장 좋으니까요. 이처럼 유대인들도 로마 사람들에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계속 시달리다 보니 유일한 낙은, 유월절날 예루살렘에 가서 일주일 동안 지내고 오는 것입니다. 일종의 부흥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메시야 대망 사상이 극치에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마다 "말세다, 말세"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메시야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서 메시야 대망 사상이 꽉 차 있었고 동시에 예수님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 중에 뺄 수 없는 소문은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벳새다 광야에서 이 사건을 만났고 직접 떡을 먹었으므로 그들 모두가 선전원이 되어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번 유월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기대하여 가는 사람, 예배하러 가는 사람, 또는 구경하러 가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예루살렘이 가득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라고 기록되지 않고,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다고 했습니다.(12:12) 사실, 이 큰 무리는 서로 엇갈려서 도중에 만난 무리입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이었고, 또 한 무리는 예수님도 만나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고 싶어서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행렬이 부딪치고 보니 잠깐 동안에 굉장한 무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새끼를 만나서 타시니 사람들은 길에다 옷을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면서 무리들이 합쳐져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 행사는 왕의 대관식의 행사로써 이스라엘의 전통이었습니다. 한 번도 타지 아니한 깨끗하고 순수한 나귀새끼에 왕을 태우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것은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며,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save us now)라는 의미로써, 다시 말하면 당신은 왕이니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 왕으로 높이는 함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정결과 순결을 의미하는 나귀새끼는 권력을 가진 자의 기본 자세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기름부은 왕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해지자 하나님은 그의 왕권을 도로 빼앗았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사울에게 전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왕이 되지 아니하셨습니까?" (삼상15:17) 그러나, 오늘 교만해졌으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언제나 겸손해야 하고 정결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만 잘 시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십니다. 왕의 기본 조건으로 정결과 겸손을 말하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행렬을 하는 것입니다. 왕으로 오신다 함은 높임을 받으시는 영광과 그의 다스림의 주권을 의미하며 사람들로서는 절대 충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은, 왕은 왕인데 어떤 종류의 왕이며, 어떤 왕으로 믿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묘한 뜻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를 살린 사건과 연결하여 생명의 주인 되는 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왕이며, 죽이겠다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왕으로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왕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나고 경제 곤란이 와도 고민할 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이 왕권은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12 : 16) 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반복하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 영광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부활 사건을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사실, 이런 능력을 가진 자라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겠습니까만은, 그러나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영광스럽게 부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영광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사도 요한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부활 안에서 이해해야지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왕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십자가의 신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 : 33-37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하시면서 그 나라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즉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깊은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먹을 것을 주고, 병을 고쳐 주는 왕이거나 한 유대 나라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십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함께 손에 쥐신 분이요, 금생과 내세의 권력을 동시에 쥐신 왕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왕권을 십자가를 통하여 이해하고, 이 세상을 초월한 의미에서의 왕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왕되심을 알고 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를 말합니다. , 그의 백성으로 그를 섬기는 자입니다.

왜정 말년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찬송가 가운데 "예수의 이름 권세여" 하는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 가사에 "만왕의 왕"이라는 구절이 있어 천황 폐하 외에 다른 왕을 말하는 것이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 무식한 사람들로서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황이 어찌 하나님 앞에 왕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만인의 주로써 그의 왕 되심, 왕권을 바로 알아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떤 왕으로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제자들도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고,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지, 그 왕 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신앙 고백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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