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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본 사람(요 14:7-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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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본 사람(14:7-11)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였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 본문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대담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에서 넌센스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8-9)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미 보았는데 무엇을 보여달라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보고도 보지 못 하며, 듣고도 듣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미 다 보았습니다. 본 바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참으로 잘 믿는 사람의 신앙으로는 이제 더 소원이 없습니다. 이미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대로 여기서 생이 끝난다 해도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믿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미 받은 것으로 족하나이다. 과거에 너무 행복했기에 앞에 어떤 고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기도를 죽기 전에 한 번쯤 해볼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미 다 보았고 만졌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큰사랑을 다 체험했고 그 사랑 안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을 구하고 야단을 피우겠습니까? 원래 큰 소리로 야단스럽게 떠드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가깝게 마주 앉아서 야단스럽게 소리지르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하면서도 소리지르고 주먹질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가깝게 보지 못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이미 그 안에 살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무엇을 또 보여 달라느냐고 믿음이 부족함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빌립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에서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의 세계관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또한 질문자와 대답하는 자의 사이에 의사가 잘 소통되지 않는 답답함을 봅니다. 요한복음은 1장에서부터 계속 답답한 대화의 장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빌립과 5천 명을 먹이실 때의 대화, 마르다와의 대화, 그리고 바로 앞에서 읽었던 도마와의 대화등,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자기 세계관에 매여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믿음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믿음 없이는 아무 말도 들려지지 않습니다. 믿음 없이는 보여지지도 않습니다. 믿는 마음이 있고서야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한단 말입니다. 빌립이 보여달라고 구했을 때 이미 다 보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한번 분석했으면 합니다. 칼 바르트(K. Barth)"하나님은 알 수 있는 분이지 볼 수는 없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보고 싶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알자는 것이지 보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만 확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갓난 아기 때는 누가 안아줘도 방글방글 웃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조금만 자라나면 어머니와 눈을 맞추기를 좋아하고 어머니 외에는 얼굴을 가립니다. 안다는 것 때문에 어머니가 가까이만 와도 기쁘고 평온을 찾아 곧 잠이 드는 것입니다. 이 때 어머니들은 아기가 엄마를 알아본다고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러면, 아기들이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기가 엄마의 나이를 압니까? 혹은 엄마의 성품을 압니까? 그가 안다는 것은 오직 하나,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아기들이 얼굴을 가리기 시작할 때, 사실은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 냄새로써 구별한다고 합니다.

엄마의 특유한 냄새를 맡으면 우선 편안해진다는 것입니다. 대개 동물들도 눈으로 무엇을 식별하는 것보다는 코로 냄새를 맡아서 구별한다고 하니, 체취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어쨌든 안다는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우상 숭배로까지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결정적인 실수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하나님처럼 생각을 했고 모세가 없을 때는 다른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은 끝내 그들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알 수는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물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고 만져지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원래, 사람이 본다고 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며 불안정한 것입니다.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내 시야에 정복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보아야만 하겠다고 고집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것은 믿음의 결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 인간의 생각을 철학이라 하고, 하나님의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심으로 아는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서적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오신 하나님을 우리가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즉 인식의 방편이 구태여 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며 듣기도 합니다. 물론 가슴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보는 것만 중요시하여 그 외의 모든 것을 불안정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 것으로 인해서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전화 음성이 너무 좋아서 꼭 만나보고 싶다가 막상 그를 만나고 나면 실망합니다. 대체적으로 얼굴이 예쁘면 음성이 좋지 않고, 음성이 좋으면 얼굴이 그저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음성이 좋은 사람과 눈으로 보기에 좋은 사람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대화의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 중 어느 쪽에 가치를 두겠느냐는 말입니다. 보는 즐거움은 순간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치우치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관상용이 아니므로 대화의 아름다움에 훨씬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에 치중하면 대개 위험하고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젊은 남녀는 소개할 때 만나보는 것을 우선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서 직접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잘못입니다. 보았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어두워지고 인식이 둔해짐을 알아야 합니다. 만남으로 상대방에게 빠져버리면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중요한 진실마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봄으로써 판단의식이 흐려져 점점 모르게 됩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자신이 보아야 믿겠다고 잘못 생각했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예수님을 뵈었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있고 믿음이 있고서야 보는 것도 효력이 있습니다. 불신의 마음으로 본다면 보았어도 보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본 것 때문에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좀 보았으면 하고 원하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33 : 20-23)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면 사람의 육신은 살아남지 못하니 바위 위에 숨어서 하나님이 지나간 뒤 등을 볼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 때 주님은 이미 보았다고 마음의 눈,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서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본다는 문제와 안다는 문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본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며, 다 안다고 해서 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보지 않아도 들어서 아는 것도 있고, 믿음으로 아는 것도 있고, 사랑으로 아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과 보는 것을 동일시하면 안됩니다.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인가 알기 위해서는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면 구태여 본다는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 되풀이하지만 본다고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심지어는 보았기 때문에 더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에 관한한 더욱 그러합니다. 본다는 것은 언제나 형체뿐으로 껍데기만 보게 됩니다. 속을 보는 것은 마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다는 것은 물질, 즉 외형적인 것으로 내용은 아닌 것입니다. 마음과 믿음으로 볼 때만이 본체와 본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써 믿는 바를 보게 된다"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도 믿음으로 보게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보여 준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과 진실이 없는 자에게 어떻게 사랑과 진실을 보여줍니까? 옛말처럼 버선짝이라면 뒤집어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은 무엇으로 보이겠습니까? 가령 눈물이 무엇이냐고 할 때, 물에 염소를 더한 것이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나의 진실, 뜨거운 마음을 보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실제적으로 이것을 보일 수 있는 길을 한 가지만 말한다면, 수난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이요, 전쟁이요, 질병이요, 고통이며 재난인 것입니다. 어렵고 곤궁할 때는 사랑을 보이기가 쉽습니다. 빵 한 조각의 조그마한 배려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 있으므로 받아들이는 채널이 풍부합니다. 그러나, 잘 살고, 건강하고 평안하면 사랑을 표현할 길도 받아들일 길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한 집에 무슨 선물을 가지고 가야 나의 정성이 표현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소 어렵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에 왜 재난과 고통과 가난과 질병과 전쟁이 있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이미 보았음을 과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벌써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자연의 계시로 보이셨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양심 속에서 그는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타락해서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게 되자, 직접 오시어 그리스도로 보여주십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밖에 볼 수가 없으므로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하나님, 우리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희생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만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것은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요, 예수님과 만나는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계시자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행위, 즉 병을 고치시거나 말씀하시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는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역사와 하나님을 별개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실제적으로 우리들의 문제로 돌아와서, 오늘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역사로 볼 수 있겠습니까? 가령, 지금 당장 누군가 나의 소유를 빼앗아 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져 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욥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는 억울하게도 그의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듣고, 즉 하나님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 안에 살면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답답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고, 내 음성을 들은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야겠습니다. 신앙의 채널로 보면, 내게 있어지는 모든 것이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마지막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 : 11)는 권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고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심을 믿으라. 그러나 믿기지 않으면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즉 이적을 보고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하나님을 보이라는 엉뚱한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하는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여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며, 우리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길만 남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만족한다고 고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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