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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아버지하나님1(신명기 6 : 1 ~ 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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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하나님1(신명기 6 : 1 6)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심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에는 본문 자체를 차례차례 읽어나가면서 거기에 담긴 뜻을 문맥대로 살피는 것이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제목을 놓고 그 제목에 관계되는 말씀을 찾아나가면서 공부하는 방법, 다시말하면 한 주제를 중심으로 삼고 그에 따라 성경말씀을 상고하면서 공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은 삼일예배 때에 로마서를 강해(講解)해드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 예배 때에는 제자 훈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떤 내용으로 가르치셨는지-이를 주제로 제자 훈련에 관한 것을 지금까지 일 년 넘게 계통적으로 공부해왔습니다. 이제 그 공부를 일단 마무리하고, 오늘부터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사도신경(使徒信經)을 강해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특히 사도신경을 강해해드리고자 하는 데는 몇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자칫하면 망각하기 쉬운, 그러나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전승적(傳承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화 안에서 진실하게 해석할 것입니다 마는 빼지 말고 생각해야 할 것이 교회적 전승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성경을 종합해서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사도적(使徒的) 전승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나가는 신앙은 본래 전승을 따랐던 것입니다. 전승이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 전승의 내용이 조금씩 와전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기록된 성경은 그 내용이 변하지 않습니다. 내용이 변하지 않는 대신에 언어에 대한 해석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제도도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제도들을 모아서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내용을 찾아나가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전승적 교리에 따라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2천 년 전에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들어 말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사야 714절에 보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 알마'입니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이 말이 '여성'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영어로는 '레이디(lady)' '숙녀'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뜻대로 해석한다면 숙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되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새 히브리어 몇마디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 알마''여자'라는 뜻인데 성경에는 '처녀'라고 잘못 번역해놓았다는 둥,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는 귀기울일 가치도 없습니다. 2천 년 전의칠십인역(七十人譯)----히브리말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이 성경에 분명히 '하 알마''처녀'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도칠십인역의 말씀을 인용해서 처녀(동정녀)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천 년 전의 '하 알마'의 뜻은 '숙녀'가 아니고 '처녀'였다고 보아야 됩니다.

언제나 성경의 뜻을 지금의 우리가 아는 지식 가지고 마음대로 유추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옛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을 고백했는가, 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알아서, 다시 말하면 전승적 신앙으로 돌아가서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실은 이 자세가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 해석을 두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궤변하는 일이 생깁니다. 성경말씀이 어떻게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겠습니까? 말씀은 그렇게 멋대로 뜯어맞추어 풀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단(異端)이 나오는 연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전승의 빛으로 성경을 이해할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을 어떻게 고백하였는가? 이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신경 또는 가톨릭의 니케아 신조(Nicaea 信條)-초대교회에서 전해주고, 그리고 2천 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이 신앙고백은 사도적 전승이요, 사도적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당연히 오늘의 우리도 사도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사도신경은 물론 성경이 아닙니다마는 사도적 권위로써 2천 년 동안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밖에도 니케아 신조며 에베소 신조며, 여러 가지 형태의 신조가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의 신조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신조가 하나같이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표현 방법만 조금씩 다를 뿐, 어느 신조에서나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전부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가?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믿었습니다. 여러분이 유념하고 들으셔서 아시다시피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때에 성부, 성자, 성령께 찬양을 드리고, 마칠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를 드립니다. 세례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이와같이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들 신앙의 진수(眞髓)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전해내려 온 신앙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한번 상고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데에는 그밖에도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특별히 처음으로 나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략 60퍼센트 정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들 중에는 성급한 분들이 계셔서 간혹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저도 기독교를 빨리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절실한 질문입니다. 그실 성경 66권을 다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 배우고 기독교 교리를 터득하려면 마음이 더 급해집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도 사도신경을 한번 공부해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공부하느라면 기독교 교리를 일단은 일관해서 터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을 종합해서 요약해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데 역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길게 잡지 않으려고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요점만 추려서 '이것이 기독교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골자다'하는 것을 앞으로 몇 주에 걸쳐 공부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처음 믿는 분들에게는 신앙 위에 확고히 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오래 믿어온 분들에게는 사도적 전승의 신앙을 재확인하게 하는 동시에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더 알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사도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구절을 둘로 나누어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먼저 기독교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종교학적인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계시자(啓示者)로 믿는 유일신(唯一神) 종교다'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신이 유일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첫째입니다. 한 분이신 우리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밖에 딴 계시자가 또 있다고 믿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이를 믿는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의도를 별로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존재에 대한 증명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강하냐 약하냐-그의 대답은 쉽습니다.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이의 대답도 쉽습니다. 그러나, 있느냐 없느냐-이의 대답은 어려운 것입니다. 히브리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갑니다. 가다가 아들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내가 네 아버지다."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요?" "네 어미와 내가 너를 먹여주지 않느냐." "먹여준다고 다 아버진가요?" "내가 널 업어주지 않느냐." "업어주면 아버진가요?" "……" 아버지는 말문이 막힙니다. 무엇으로 자신의 아버지 됨을 증명한단 말입니까? 존재의 증명이 이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는 터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새삼 증명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있느냐 없느냐를 증명한 다음에 이야기를 전개한다-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 5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신론자가 바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다'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적음을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무도(無道)하다는 뜻입니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시편 531절은 이어집니다. 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이 '하나님은 안 계시다'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을 죄인이요, 다른 하나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내가 죽는 줄 알고 늘 죄를 뉘우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내가 왜 죄인인가?'하고 목이 뻣뻣해 있는 죄인이 있습니다. 목이 곧은 이런 죄인이 쉽게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사람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해야 기를 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는 용서 못 받을 죄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그실 이 세상에 무신론자(無神論者)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신론자(不神論者)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부인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Feuerbach)는 외람 되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교황청에서 교황을 몰아내기 전에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어라. 그래야만 내가 초인(超人)이 될 것이다'-구원받지 못 할 죄인입니다.

역사상에는 하나님을 생각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한 철학적 논증도 많습니다. 일일이 살펴볼 것도 없이 그러한 철학적 노력의 요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가 인과율(因果律)의 전개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니 원인도 있는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모든 결과의 제일 원인(first cause)으로서 '하나님은 존재한다'라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설명해보는 것입니다. 생명 그 자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그 근원이 있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우주의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이 우주는 마구잡이로 지어져서 운행되는 것이 아니요, 지으신 분의 지혜와 아이디어(idea)가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목적론적(目的論的)으로 증명해보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각기 그 목적이 있다, 그러한 목적을 만물에 부여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추론하는 것입니다. 네째는, 도덕적으로 증명을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도덕의 근본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논증을 펴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보편론적 우주론적으로 증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을 믿습니다. 간혹 그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막연한 신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인간에게는 신적(神的) 존재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존재론적 증명이니 역사론적 증명이니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마는 대체로 그 안에 다 포함됩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님을 여러 방법으로 증명해보고자 하였습니다마는, 하나같이 철학적 노력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마디로 말씀해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개념입니다. 이방사람들, 특히 헬라사람들은 제우스를 신() 중의 아버지요 인간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이 신을 아버지라고 말하게 된 것은 대체로 두 가지의 생각에 기인(起因)합니다. 그 하나는 부성(父性)-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그 둘은 부권(父權)-아버지된 권한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한다, 곧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우리에게 전해준 유대사람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개념은 성경에도 누누이 나타납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326, 예레미야 319, 사무엘하 714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개념은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국가의 아버지이지 한 개인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 큰 뜻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320절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뵈올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뵈오면 죽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어도 이 아버지는 아주 높고 크신 하나님이라서 우리 인간이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별되신 하나님, 우리로서는 뵈올 수 없는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둘째, 절대적 권위자로서의 개념입니다. 절대적 무조건적 권위자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 181절 이하에 토기장이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2)."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 보니, 토기장이는 흙을 주물러 그릇을 만들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고 다시 만들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마음대로 주관하십니다. 당신께서 뜻하신 바대로, 당신의 의도대로 하십니다. 크게도 만드시고 작게도 만드시고, 높게도 만드시고 낮게도 만드십니다. 우리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병듭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그야말로 기구하게 삽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평생토록 그늘 없이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군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세째,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38, 39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며,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넷째로, 진노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인간이 죄지을 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홍수와 유황불로 심판하십니다. 지진이 나서 땅이 꺼지고 모든 생물이 죽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고 그 자리에 사해(死海)를 만드셨습니다.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말을 쓰곤 했습니다. '여호와'라는 글자는 있어도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발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쓰기는 '여호와'라 쓰고 읽기는 '아도나이' ''라고 읽었습니다. 혹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가 벌이나 받지 않을까 하여 아예 부르기를 피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개념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개념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역시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부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목표요 본질입니다. 가치판단에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성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마가복음 1436절과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20: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아버지는 곧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주기도문을 보아도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보면 기도를 하면서 그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이러한 생각도 합니다. 어려서는 "엄마" "아빠"라고 잘도 부릅니다. 하루종일 "엄마" "아빠"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닙니다. 그러다 좀 크면 '아빠'가 변해서 이제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좀더 지나면 '아버님'이 되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들면 또 달라집니다. '아버님' 할 때에는 이미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아빠' 할 때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가장 가깝습니다. '아버님' 할 때에 어른들은 섭섭합니다. 일 년에 한번 볼까말까합니다. 괴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세상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은 죄가 가장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지런히 불러야 하겠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부를 것입니다. 이제는 돌부리에 채여도 "엄마"라 말고 "아버지"라 하십시오.

625때에 군목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나라 군인들은 전장에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는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부르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군인들은 죽어가면서 '나에게 신선한 우유 한잔을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유를 먹고 자랐기에 마지막에도 그 우유생각 뿐입니다.

어머니가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아침저녁, 때마다 일마다 늘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연결시켜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8절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God is Love.'-구속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말씀합니다.

헬라사람들의 개념으로는, 사랑은 네 가지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형제 자매간의 사랑인 '스톨게,'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그리고 성경에서 주로 말씀하는 '아가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43절로 48절에 자세하게 씌어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稅吏)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십니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입장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가 사람 중에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원수진 자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좋은 자식만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효도하는 자식만 사랑하고 불효한 자식은 미워합니까? 불효막심한 자식도 자식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시는 종적(縱的)인 사랑입니다. 횡적(橫的)인 사랑이 아닙니다. 위에서 밑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큰 자로서 작은 자를 사랑하심입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 이상으로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정의는 이렇듯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적인 것입니다. 오늘을 보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저 앞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아버지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섬세하신 아버지십니다. 개별적인 사랑을 빈틈없이 베푸시는 아버지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인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또 저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9절로 32절을 보십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하물며 너희 생명일까 보냐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개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개인적인 아버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소개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여럿이라고 해서 '도매금'으로 취급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열 손가락이로되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끊임없이 부르시고 무엇인가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받지 못해서 애타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주시려 하는데도 못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괴롭답니다. 주시고 싶은데 주실 수가 없습니다. 주어서는 안되겠으니 못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안 주실 이치가 없습니다. 항상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용서하는 것처럼,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그 아버지는 탕자의 지나간 과실(過失)을 묻지 않습니다. 저는 이 탕자 비유를 읽을 때면 이따금 본전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 녀석이 집을 나갈 때, 도대체 아버지는 왜 재산을 내주었는지 모르겠어요.

주지 않았다면 못나갔을 것 아닙니까? 그저 용돈 몇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받아야 할 유산을 앞당겨 가불하겠다는 몹쓸 아들에게 왜 서슴없이 내주었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잇대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분명히 참된 아버지로구나-이렇게 말입니다. 재산 따위야 다 없애도 좋으니 부디 사람다운 아들이 되어서 돌아와다오-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그렇다 하고,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그 아들이 거지꼴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로서는 한마디쯤 할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없어요. "그래, 가지고 나간 재물은 얼마나 남겨 왔느냐?" 한번쯤 물어볼 것인데 물어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가 부모 되어 본받아야 할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대개의 부모들이 이 대목에서 실패를 하고 맙니다. "그래 이놈아, 혼자 나가 흥청망청 살아보니 어떻더냐?" "그 많은 돈을 그새 다 날렸더란말이냐. 이 고이헌!" "큰소리치고 나가더니 꼴좋다! 거지꼴이 되어서 무슨 염치로 돌아 오누?" 이러쿵저러쿵 자식으로 하여금 낯을 못 들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에는 잔소리가 없고 귀아픈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Seeking God'입니다. 멀리서 팔짱끼고 대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찾으십니다. 당신 스스로 나서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라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스스로 희생을 치르십니다. 대가를 치르시는 하나님-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요, 희생하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지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다고 하는, 그런 단순한 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26:39)"-예수님께서는 똑같은 기도를 세 차례나 거듭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양보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몸소 지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희생적 사랑, 그 아픔을 지불하시면서 계시해주신 공의로운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전능--이것은 폭군적인 전능이 아닙니다. 구속적(救贖的) 전능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여 의인 만드는 전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는 사울을 위대한 사도로 만드는 전능이요, 순교하게 만드는 전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적(震怒的) 사랑이 십자가 안에서 계시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십자가 안에 나타납니다. 그 능력이 십자가에 계시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요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래서 전능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그 아버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우리들 신앙고백의 제 1이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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