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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된 것(롬11:1~12)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은혜로 된 것 (6절)"이라고 하는 은혜, 특별히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5절)"-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로 택하시고 또 은혜로 역사 하신 주님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단히 깊고, 오묘하고, 신학적인 말씀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늘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방인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대체로 유대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괴롭힌 사람 대부분이 유대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다 잠깐 핍박하고 끝났지마는 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바울을 괴롭혔고, 따라다니면서 괴롭혔고, 그리고 멀리 쫓아와서까지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철저하게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렇게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바울은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동족을 사랑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여망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사람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왜 버리시겠느냐는 것이지요.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절)."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철저한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높은 경륜에 대하여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또 어떻게 생각하든지 '보편화'라고 하는 것처럼 잘못되기 쉬운 그런 사고논리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를 보고 전체를 다 보았다고 하고, 한 사람을 보고 전부가 다 그렇다고 하고… 그실 참 무서운 것이에요. 예를 들면, 한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여자가 '남자는 다 늑대다'라고 한다든가, 한 여자로 말미암아 한평생 괴로워한 남자가 '여자는 다 여우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그게 아니거든요. 내가 만난 사람이 나쁜 것이지, 전체가 다 나쁜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몇 가지 잘못된 것을 보고는 전체가 다 나쁘다고,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그렇게 아예 영원히 정죄해 버리려고 합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으로, 혹은 철저한 주관적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사를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1801년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던 천주교를 박해한 그런 사건이지요.
그 때에 황사영(黃嗣永)이라고 하는 사람이 천주교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박해를 북경에 있는 천주교 대주교에게 알리고자 편지를 썼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황사영 백서(白書)'라고 하지요. 그 편지 냉용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조선은 쇠망하는 단계에 처해 있으므로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의 군사가 쳐들어오면 조선은 쉽게 망할 것이라고 그 자세한 방법까지 일러줍니다. '비록 우리 나라가 망해서 없어진다 해도 선교, 즉 천주교의 표는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치 않는 이 나라는 망해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결국 이 편지는 국경을 빠져나가다가 발각되었고,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서 박해는 더욱 심해져서 무려 삼백 명이 넘는 사람이 순교하게 됩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기독교는 대역모반의 매국종교다'-이렇게 단정하게 됩니다. 바로 이 편지 때문에. 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당시에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잘 몰랐기에 박해하고 있었고, 중국은 천주교를 허락하고 있었어요. 그것에는 천주교의 대주교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는 빨리 망해서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천주교가 자유를 얻겠습니다'-이런 논리가 통하는 것입니까? 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 나라에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혹은 피해자라고 해서 전체를 나쁘게 보는 것은 옳지 않아요. 제가 참 섭섭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좀 놀라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무슨 모임에서나 어떤 때에 제가 "우리 북한을 도와줘야겠습니다. 지금 북한의 사정이 어렵습니다"하는 이야기를 몇 번 해봤어요. 그런데 모임을 다 마치고 나갈 때, 악수하는 사람 가운데 저보고 직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공산당은 도와주면 안돼요. 절대로 도와주면 안돼요.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 참 마음이 아파요. 그 분이 얼마나 공산당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하고 북한의 우리 동포를 같이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실 같지 않아요. 제가 북녘 땅에 두 번 가보았는데, 처음 갔을 때에 그쪽의 고관으로부터 이런 인사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선친께서 공산당한테 피살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도우려고 오셨군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실입니다. 제 아버지는 바로 제 목전에서 총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북한을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몽땅 다 나쁘다'-그래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은 유대사람들로 인해서 큰 핍박을 받았어요.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는 그 민족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고 믿고 있어요. 여러분, 나를 중심으로, 혹은 내 경험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insight, 하나님의 통찰력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은 신앙에서, 근본에서부터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아브라함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믿음의 조상과, 그들에게 주신 약속과, 그리고 오늘의 이 현실을 보세요. 그런고로 절대로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알 수 없는 깊은 세계에 아주 신비로운 일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오늘도 예외 없이 이루어가고 계시고,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깊은 세계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먼 미래적인 약속, 좀더 나아가서는 종말론적인 약속을 바라보고, 그 약속에 의해서 오늘을 볼 줄 아는 영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참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서적인 맥락에서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합니다. 그 옛날에 선지자 엘리야가 당했던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엘리야는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는 아합 왕과 이세벨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한 번 이기기도 했습니다마는 그것도 소용없어요. 결국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닙니다.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고 맹세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도망가고 도망가다가 마침내 기진맥진해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굶어죽어요. 그래,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보내셔서 떡과 물을 가져다가 그를 먹이십니다. 그러면서 그와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에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송사를 합니다.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리고 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데려가 주세요 함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이는 자기자신에 대해서만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 망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해주세요. 그만 살고 싶습니다'-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송사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절망과 고독, 이것은 불 신앙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불 신앙적인 생각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신앙 안에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옛날 모세도 바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고자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를 짓고, 반항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지막에는 모세를 죽이겠다고 까지 합니다. 결국 모세는 지쳤어요. 지칠 만도 해요. 그래서 저들이 물이 없다고 할 때에 반석을 두 번 꽝꽝 치지 않습니까? 그 때에 그가 한 말이 중요합니다. "패역한 너희여(민 20:10)"-이는 모세가 절망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는 패역한 이스라엘만 보았지, 이스라엘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백성과 함께 계세요. 하나님께서는 계속 이 백성을 사랑하고 계세요. 이런 하나님의 뜻을 그는 헤아리지 못하고 원망하다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크게 책망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나를 거역했다'-이 세 가지 죄목을 들어 말씀하시면서 너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하십니다. 불 신앙 때문이에요.
여러분, 언제 어떤 형편에서라도 꼭 신앙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고로 신앙 안에는 절대로 낙심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는 못보고 있다. 여기에 내가 남겨둔 사람 7천 명이 있다.' 엘리야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하나뿐입니다. 나도 죽게 됐습니다' 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모르고 있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바알신상 앞에 무릎을 끓지 아니한 경건한 내 백성이 7천 명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엘리야는 깜짝 놀랐을 거예요. '나는 못 만나봤는데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모르는데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7천 명이 있다. 네가 모르는 사람이 있다'-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사회에든지, 어떤 형편에든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요소 요소에, 깊은 곳에 숨어있어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
또 그뿐입니까? 열왕기상 19장 10절 이하를 죽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왕에게 절망했느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 저 소를 모는 농사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자, 예후같은 사람, 엘리사같은 사람이 있어요. 농사하고 있어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렇듯 경건한 사람이 있어요. 지금 엘리야가 만나보지 못한 것뿐이지, 숨겨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고로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입니까? 내가 모른다고 없는 것입니까?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은혜로 선택했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전권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은혜로 선택해서 남겨둔 사람이 있다 함입니다.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남은 것이 아니라 남겨둔 것입니다. 그만 다 망하고 이만큼 남았다는 얘기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입니다. '남겨두었다'는 말을 신학적 용어로 REMNANT라고 합니다. 특별한 용어입니다. 이 말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마저도 없이 다 망하고 만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 무력해집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실패합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시지 않아요. 하나님께는 절대로 뒤로 물러섬이 없어요. 그런고로 그 분은 은혜로 택한 자를 남겨두십니다. 어디나 이렇게 특별히 남겨두신 사람이 있어요. 이제 이것을 통해서 앞으로 크게 역사 하실 거예요. 남겨두었다고 하는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 그리고 은혜로 택하여 남겨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면 "이와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일이 있다, 그 말입니다. 이제도 나와 여러분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겨둔 바에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께서 남겨둔 바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실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인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참 놀라운 얘기입니다.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그 옛날에도 7천 명이 있었듯이 오늘도 있습니다. 여기에도 있습니다.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캄캄한 것 같아도 그곳에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 있습니다. 어디에든지, 다 망한 줄 알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예요. 그것에 오히려 비밀하게 숨겨둔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은혜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입니다.
은혜로 택하셨다는 말을 은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요, 인간의 의를 다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결코 양자택일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의냐, 하나님의 은혜냐-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살려두시지 않았더라면 남을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해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믿음을 지켜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은혜로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바른 은혜로운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생각이 한번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자꾸만 허무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이렇게 어두운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지켜주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는 행위란 어떤 것이냐-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행위라는 것은 은혜의 열매로써 되어지는 것임을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만큼 선한 일을 했습니까? 그것도 은혜로 된 것이에요. 내가 한 것이 아니예요. 내가 이만큼 건강을 지켰습니까? 그것도 은혜로 된 것이에요. 혹 내가 좋은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마음을 주셨고, 이런 기회를 주셨고, 이러한 좋은 일을 주셨어요. 이게 다 은혜예요. 이것을 내가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내 공로로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은혜로-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절대로 공로가 될 수 없어요. 또 자랑거리가 될 수도 없어요. 가끔 우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무슨 조그마한 일을 하고는 제 힘만으로 한 것처럼 자랑하려고 하고, 또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허망한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오직 은혜의 열매일 뿐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말씀은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7절)"-이스라엘이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의요, 자기 공로요, 자기 선행입니다. 그러나 그렇듯 애를 썼는데 결국에는 다 무효로 돌아갔어요. 헛된 노력이었어요. 그리고 오직 은혜로 사는 것, 즉 겸손한 사람이 오히려 선행을 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 되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나는 십일조를 바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를 합니다…'라고 자랑을 합니다. 특별히 바리새인은 세리를 가리키면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자기 의를 높이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의를 인정하시지 않았어요. 반면에, 세리는 사실상 죄인입니다. 바리새인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멀리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은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은혜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절)"-은혜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생깁니다. 하나는 완악함이요 하나는 교만입니다. 은혜가 떠나면 곧 교만해져요. 교만한 다음에는 완악해져요. 그리고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아요. 아주 굳어버리고 맙니다. 완악해진다는 말은 헬라어로 '포른'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의학적 용어라고 합니다.
어떤 상처가 아주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말해요. 그래서 그 위에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어요. 이것을 뜯어내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바로 그런 상태를 '포른'이라고 합니다. 감각이 무뎌진 상태예요. 아무 약도 효력을 낼 수 없는 그런상태를 말합니다. "완악하여졌느니라"-아주 굳어져버렸어요. 이렇게 되면 이제는 들려지는 것이 없어요.
보이는 것도 없어요. 그리고 계속적으로 악한 생각만 듭니다. 이제는 구제불능이지요. 바로 그렇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저들을 위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은 그 속에서 귀한 당신의 뜻을 계속해서 이루어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완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8절)"-이렇게 되면 전혀 들을 수가 없어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서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의 끝에 보면 신비롭고 오묘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요 영적인 통찰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역사 저편을 바라봅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이루어지는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절)"-먼저 이방사람들이 믿었어요.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구원을 받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다음에, 이스라엘사람들이 시기 나게 하겠다 함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사람으로서 예수 믿은 사람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즈음 예루살렘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자 돌아오는데 저더러 한 번 자기네 교역자들이 모이는 데에 와서 얘기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히브리말을 할 수 있어야지요. 통역을 세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참 어려워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정말 그들에게 좋은 말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마침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성경을 만들어주는 분이 한 분 계셔서, 성경을 인쇄하는 인쇄기 하나를 우리 교회에서 보내주었습니다. 어쨌든 근래에 들어서 특별히 예루살렘에, 혹은 이스라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부쩍 늘었어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예수 믿고 하나님 믿어서 그렇듯 복을 받는데, 이스라엘은 왜 오늘까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이렇게 계속 어려움을 겪는지 모르겠다. 빨리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할 텐데…' 하고 염려를 합니다.
오늘의 본문 12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에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아주 오묘한 말씀이에요. 저들이 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이 믿게 됐어요. 여러분, dispensation,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경륜 속에 이루어진 일들을 가만히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과는 멀고, 먼 사람과는 가까운 그런 심리적인 게 있어요. 가까운 사람하고는 이해관계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멀어져요. 또 먼 사람은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없어요. 그런고로 오히려 가까워져요. 그런 심리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세요. 우리한테도 이상하게 게 있지 않아요? 일본사람하고는 잘 못 지내고 미국사람하고는 잘 지내요. 이게 오묘한 거예요.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사람들이 믿어요. 아마 이스라엘사람들이 다 믿었으면 어쩌면 다른 나라사람들이 안 믿었을지도 몰라요. 참 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배척하므로 이방사람이 믿고, 이제 이방사람이 다 믿게 된 다음에 이스라엘이 시기해서 '우리종교인데 어디 갔나' 해서 마지막에 저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이 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역사를 멀리 내다보고 있어요. 지금 되어지는 일을 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스라엘이 안 믿음으로 이방이 믿는구나, 이스라엘이 배척하므로 이방인이 환영하는구나'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어요. 그 다음에 멀리 내다봅니다. 온 세상사람이 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고, 그로 인하여 큰 축복을 받을 때, 저 끝에 가서 이스라엘이 주님 앞으로 돌아올 것을 내다보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멀리 바라보고 있어요. 이것이 바울의 영적 지각입니다.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 유대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핍박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하나님의 오묘하고 높고 영원한 경륜을 바라보며 그는 새롭게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지각, 이런 세계관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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