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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소망(사도행전 28:16~2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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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소망(사도행전 28:1622)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일도 없는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그렇게 가고자 소원했던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본래 소원했던 시간이나 소원했던 환경, 소원했던 여건에서 로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계시로 약속해 주신대로 분명히 로마에 도착했습니다마는 그 과정은 자신이 바랐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는 가운데, 그가 본래 생각했던 시간보다 3년 후에, 자유의 몸이 아닌 죄수의 몸으로, 평탄한 길이 아닌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내가 바라는 방법대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리라고 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기는 하나, 그 시간과 장소와 방법이 내가 생각한 것과 같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지 않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연될 따름이요 방법이 다를 따름입니다. 그 방법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일이 잘못됐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묘하고 신비로운 역사 가운데서, 더 크게, 더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여러분이 기도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혹은 자녀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뭐가 좀 잘못된 것 같고, 뭐가 좀 멀어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절대로 의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한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그 자녀에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세요. 잠시 내 뜻과 다른 길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결과는 더 크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야 하나, 3년이나 지연되어야 하나, 왜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닌 죄수의 몸으로 또다시 감옥에 쳐 박혀야하나'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제 빌립보서 112절에서 풀립니다. "나의 당한 일이"----대체 일이 왜 이렇게 돼야 하나 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그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것이 놀라운 역사입니다. 바울이 이를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마는 그는 미처 다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바울이 이렇게 수고하고 역사함으로써 불과 한 200년 후에 대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됩니다. 기독교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훗날로마 한복판에 베드로성당과 바울성당이 세워집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면 그 성당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바울이 진작 알았더라면 아마도 로마감옥에서 좀더 큰소리로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 이렇듯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16)"하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276명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도착했다고 해서'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는 바로 이 사도행전의 기자(記者)인 누가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누가야말로 참으로 충직한 바울의 assistant, 그를 돕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을 따릅니다. 저는 죄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수가 가는 길을 곁에서 따라갑니다. 로마까지 따라갑니다. 감옥에는 못 들어갑니다만 감옥 가까이 있으면서 계속 바울을 돌봅니다. 참 대단한 분이지요.

여러분은 혹 이런 것을 생각해보았습니까? '반드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그리 잘하는 생각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겠다, 어떤 사람은 의술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으로, 내가 도울 수 있는 무엇으로든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이렇게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그런 지혜와 능력, 그런 각오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가 자신이 얼마나 복음을 전했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누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신 이 분을 어떤 면으로든 돕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 전부이다.' 생각해보세요. 누가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를 면회하면서 돕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후송될 때에는 고생을 감수하면서 따라갑니다. 로마에 가서도 계속해서 그를 돕습니다. 이렇게 뒤에서, behind man으로 평생토록 주의 일을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저마다 목사 되겠다고, 전부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남이 일하는 그 뒤에서 협력할 줄 몰라요. 뿐만 아니라 '내가 저 분을 돕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다'하는 확신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누가는 확실한 봉사를 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바울은……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 합니다. 바울을 따로 있게 허락했다. 그 말은 바울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비록 제한된 자유지만 그실 상당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때로 있어서,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을 볼 수도 있고, 기도도 할 수 있고, 찬송도 할 수 있고, 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는 못해도 사람을 불러서 만날 수가 있었어요. , 이만큼의 자유를 얻은 바울입니다. 그는 아직 재판 전이라서 확실하게 석방될 수도 없고, 또 무슨 형()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미결수로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후한 대접을, 더욱이 로마사람으로 볼 때에 이방인인 유대사람 바울이 받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껏 바울과 동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풍랑 속에서 되어진 일들을 다 얘기하고, 또 백부장은 아주 자세한 보고와 함께 특별히 바울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관대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이 분은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우리는 확실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는 보고를 분명히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죄수이지만 영적 권세가 당당합니다. 로마의 정치가들도 마음속 깊이 바울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만큼의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분문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한 군사와 함께"----여기가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보면 사도 바울의 팔을 묶였던 쇠사슬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말 바울을 묶었던 것인지 그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혼자서는 꼼짝못하도록 각기 두 사람의 한쪽 팔들을 각각 바울의 양팔에 딱 묶어놓았습니다. 그야말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먹어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화장실에도 같이 가고…… 사도 바울과 같이 묶여 있는 군사는 하루에 한 사람씩 교대합니다. 싫으니 좋으니 해도 하루종일 두 사람이 같이 있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이 때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개인전도 넘버원입니다. 하루24시간을 그대로 함께 있으니까 이게 보통 관계입니까? 바울은 이제같이 묶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이런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군사들은 친위대입니다. 당시 친위대라고 하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지금도 청와대나 어디나, 많은 사람들이 경비를 섭니다. 우리는 문민정부이고 민주국가니까 그렇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독재자들이나 왕 같은 사람들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언제 누가 자기를 죽일는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자기 주변에 친위대를 둡니다. 우리 북녘 땅의 김일성만 해도 주위에 그를 지키는 사람이 3만 명이었답니다. 남북 회담하면서 정상회담도 하겠다 했지만 '김일성 수령'은 서울에 못 온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가 여기에 오려면 5만 명이 동원돼야 한답니다. 그러니 움직일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따져봐도 우리 쪽이 갔으면 갔지 저는 못 올 것이라고, 이렇게들 생각했었습니다. 아무튼 옛날 왕들은 신변 안전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높이 쌓은 거예요. 중국의 서안 같은 곳을 가보면, 청나라 때에 세워놓은 엄청난 성이 있습니다. 가보면 굉장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성 안에는 왕과 친위대와 왕의 친척들만 살았습니다. 백성이 사는 게 아니예요. 무서우니까,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친위대가 그곳을 지킵니다.

이런 친위대가 로마에는 약 만 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친위대는 특별합니다. 저들은 왕에게 가장 충성하는 사람이요, 정예부대요, 요샛말로 하면 훈련이 잘된 군사들입니다. 몸도, 기술도, 머리도, 충성도, 마음도, 가슴도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이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친위대원으로 성실히 봉사하고 나면 노예의 신분이었던 사람이라도 자유인이, 로마시인이 됩니다. 그 다음은 귀족이 됩니다. 주로 로마를 다스리는 정치가도 친위대를 제대한 사람 중에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교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만 명의 이 친위대만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면 로마는 뒤집히는 것입니다. 로마는 복음화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저들이 실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로마감옥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매일 한 사람씩 만나게 됩니다. 매일 한 사람씩 전도합니다. 1년이면 365명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하 사람 전도하게 되어서 마침내 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됐습니다. 그 전파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라고 말씀하게 됩니다. 참으로 희한합니다. 일부러 만나려고 해도 몇 달을 두고도 못 만나는 친위대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전도할 기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한 사람씩 하루종일 붙들려 있으니까 자연히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매일매일 교대하니까 한 사람 전도하고 다음날은 다시 다른 사람을 전도하게 되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그런고로 충성된 전도자에게는 어디서나, 어느 때나 어떤 환경에서든 전도의 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기회는 따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에 나가면 그곳이 선교자가 되는 것이고,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병들면 병원에서, 사업을 하면 사업하면서, 무역을 하면 무역하면서, 여행을 하면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충성된 전도자에게는 언제나 전도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전도할 수가 있어요. 더구나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보다는 인간적으로는 좀 불행해졌을 때에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되어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런 순간이 오히려 전도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전도하기란 어렵습니다. 오히려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전도하면 아주 효과적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사람에게 그저 참고 견디라고 해봐야 그 말을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실패하여 아주 비참해져 있는 사람이 친구를 위로하려고 찾아갔을 때, 그 형편없이 어려워진 사람이 입을 열어 전도하게 되면 그야말로 전도는 효과적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 죄수가 여기에 있고 바울이 권세 있는 자유인으로서 감옥을 방문했다고 입장을 바꾸어봅시다. 전도가 되겠습니까? 어쩌면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죄수입니다. 죄수가 간수를 향해서, 자유를 잃은 자가 자유한 자를 위해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 전도는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은 불행하다느니 행복하다느니…… 그런 것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잘되고, 못되고, 어디를 가고 말고……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하는 확고한 뜻만 있다면 전도의 길은 어디에나 열려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 보면 바울은 아주 효과적인 환경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7절을 보세요.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사흘 후에 유대인들 중의 높은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워낙 큰 도시이므로 유대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중의 높은 사람, 즉 유대사람의 대표되는 장로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되어진 일과자기가 여기에 오게 된 목적 등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마다 가는 곳이 어디든 꼭 유대인 회당을 방문했습니다. 회당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며, 기성시설과 기성조직, 기성집회를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이미 성경을 아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선교적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볼 때에 그는 마음이 아팠어요. 왜 우리 동족은 안 믿을까, 이 귀한 예수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믿어주지 않을까, 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더욱 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핍박은 대부분 유대사람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집요하게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바울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유대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저들로 인해 많은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바울을 괴롭히고 전도사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를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바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유대사람들은 3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저들로부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렇듯 괴로움을 당하고도 아직도 유대사람들을 불러서 전도하고자 하니 말입니다. 바울의 민족애, 동족애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해드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떤 희생을 하든, 무슨 굴욕을 당하든 상관이 없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를 예수 믿게 하고 그래서 하늘나라 가게 해드리는 것이 최고입니다. 구원받게 해드리는 것, 그 이상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 잘먹게 하고, 많이 위해드리고, 평안히 계시게 하고, 효도관광 시켜드리고……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자녀를 제일 사랑한다면 자녀를 예수 믿게 하고, 남편을 제일 사랑한다면 남편을 예 수믿게 하고, 아내를 제일 사랑한다면 아내를 예수 믿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을 사랑합니다. 로마서 9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저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1, 2)"-----내가 지옥에 갈지라도 내 동족, 내 사랑하는 민족이 구원받는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간절합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의 박해로 인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쫓겨오고도 또다시 유대사람들을 불러서 전도합니다. 그 뜨거운 전도열, 그 동족애, 그 간절한 사랑----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저들에게 먼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 민족을 송사 하려는 것이 아니로라(19)"------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유대사람들의 문제는 유대사람들끼리 해결하지 왜 로마사람들에게 상소 하겠는냐, 그것은 유대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 또 이렇게 상소해 가지고 로마에 와서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유대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유도 없이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라고 송사할 것이냐---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정죄하려는 것도, 누구를 송사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 민족을 송사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사람들은 나를 놓아주려고 하는데 유대사람들이 죽이겠다고 하니 마지못해서 로마에 상소한 것이오.

그래서 내가 여기가지 온 것입니다. 유대사람을 고소한다던가 유대사람의 잘못된 점을 설명하고 상소하고자 함이 아닙니다'하는 자기 변명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20)." 이스라엘의 소망----이스라엘 민족이 강한 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저들의 소망은 아주 대단합니다. 달리 여러 가지로 소망이 있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라고 하는 인격,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앞으로 다윗의 왕국과도 같은 그런 왕국, 태평시대,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의 중심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여기에 온 소망과 믿음을 걸고 있습니다.

제임스 와트라고 하는 화가가 그린 '소망'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둥그런 지구 위에 한 예쁜 어린아이가 앉아서 바이올린을 켜는데, 아이가 입은 옷은 남루하고, 바이올린은 줄이 다 끊어지고 단 한 줄 남았어요. 그 한 줄에 활을 걸고 바이올린을 키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다 끊어지고 한 줄밖에 남지 않은 바이올린이지만 그 한 줄로 연주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정작 예수가 오셨을 때에는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어요. 유대사람들의 확실한 종말론적 신앙이 왜 그렇게 비참해졌습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메시야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관이 달라진 이유는 세속적 욕망에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했어요.

마음을 비우지 못했어요. 자기 지위와 세속적 욕망과 정치적 욕망, 여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메시야를 알아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누가복음 2421절에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 아닌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저들은 너무도 실망이 커서 엠마오로 돌아갑니다.

이것도 메시야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실망 했나요?-----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십자가 사건은 메시야관을 가름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승리입니까, 패배입니까? 세속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십자가는 완전히 실패입니다. 일껏 기대했는데 그 분이 죽어버렸어요. 이 나라를 독립시킬 줄 알았는데 실패했어요'하며 낙심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하셨고 성공하셨고 다 이루셨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의 메시야관은 정치적이요, 세속적이요, 협소한 민족주의였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영광의 메시야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적이요 종말론적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메시야를 통해서 영광의 메시야가 되십니다. 고난의 메시야를 통해서----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 부활을 통해서 영광의,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왕은 단순한 유대나라 왕이 아닙니다. 왕 중 왕이요, 우주적인 왕이십니다. 그런고로 메시야에 대한 이해, 이것이 달라서 저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에 대해 실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바울은 그 예수를 전파하고 있어요.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메시야관, 성서적 메시야관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하여 내가 여기 왔습니다'라는 말씀의 뜻이 이제 분명해집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개념을 성서적으로 바르게 설명하다보니, 메시야관에 오해가 많고, 이해가 없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함입니다.

, 바울이 이렇게 설명했더니 이 유대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도도하고 지혜롭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당장 받아들이지 않고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22)"라고 대답합니다. "이 파에 대하여"---대단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 당시 유대사람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샤프라고 하는 사람이 쓴 바울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랍비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 연구를 많이 해서 꽤 큰 책을 썼습니다. 제가 그 책을 정독했는데 샤프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와는 꼭 반대 방향이다. 메시야를 잘못 생각해서 분파가 하나 생긴 것이다. 그 대표자가 바울이다.' 꼭 반대편에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이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를 안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저들은 '우리의 메시야를 잘못 생각한 사람들이 분파를 만들어서 기독교가 생겼다'라고 설명하고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바른 메시야관을 가지게 될 때에 비로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온 생애를 다 바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그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합동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타났습니다. 바울로서는 오직 충성, 오직 믿음, 그리고 인내적인 헌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잘 참아야 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불평해서도, 당장 무슨 일이 되지 않는다고 조급해해서도 안됩니다. 믿고 꾸준히 기다리면서, 기회를 주시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보세요. 넓은 관장에서 수백 수천 명을 모아놓고 전도하는 길은 열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매일 만나면서 전도했어요.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답답하기 그지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회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을 그는 온유 겸손하게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선교열, 그와 같은 확실한 믿음, 그리고 그와 같은 겸손한 순종----이것이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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