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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요한복음 3 : 16 ~ 21)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 : 5 ~ 11)
D똃똕TXTs=*아들하나님(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지난 3회에 걸쳐 우리는 먼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세 갈래의 고백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렇게 세 방향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어서 이제는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아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들어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아들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주'와 '예수'와 '그리스도'의 네 단계입니다. 이 네 단계의 고백에 아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의 내용이 총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혹 교회에 처음 나오든가 하시는 분들 가운데에는 예수면 예수고 그리스도면 그리스도지 번잡하게 '예수'에 '그리스도'를 붙이고 거기에다 엎친데덮치기로 '주'자는 왜 붙이는 것이냐고 의문을 품는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같은 의문은 이 시간을 기하여 깨끗이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저렇듯 네 단계로 일컬어 받드는 데는 반드시 그래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쿠오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 영화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받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D?D똕TXT¡]그리스도인들이 감시의 눈을 피하여 서로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암호로 물고기를 그려보이고는 다른 사람이 볼새라 얼른 지워버리곤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예수 믿는다는 암호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거나 몇몇 제자가 어부였다 해서가 아닙니다. 우연하게도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낱말 '익서스'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알파벳이 다섯 개의 중요한 낱말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의 머릿글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야말로 우리 신앙고백의 전부라 할 수 있는데, 이같은 내용이 '물고기'라고 하는 헬라어 낱말 하나에 함축적으로 상징되어 있다는 우연도 재미있거니와, 그러한 연유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암호로 물고기 그 자체를 그렸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2세기경의 교회저술가이자 사제인 터툴리안(Tertullian)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작은 물고기다. 그리고 우리는 '익서스'처럼 물 속에서 태어난다. 작은 물고기를 죽이는 방법은 물에서 건져내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세례를 망각하는 날에는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면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제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 대한 네 단계의 신앙고백을 단계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D똕TXT參먼저 '우리'라는 말입니다. 그냥 지나쳐 생각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이 '우리'라는 낱말이 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한사람한사람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기에 다른 종교, 이를테면 불교같은 종교와의 차이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한 사람에게 치중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라는 개념이 '나'를 앞섭니다. 공동체 의식입니다. '나'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 '우리'의 일원이 됩니다. 하나님 가정의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신앙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고백해놓은 것입니다. 그 고백에서 '내'가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기독교는 한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그로써 웅변한 것입니다. 이방 종교(異邦宗敎), 이방 사상은 어느 한 사람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가 산에서 여차여차한 계시를 받았다는 둥, 밭에서 일하다가 여차여차한 계시를 받았다는 둥, 산에 갔는데 바위가 깨지면서 그 속에서 이 책이 나왔으니 믿어야 한다는 따위의 잡소리로 사람을 현혹하는 어느 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 교파를 이루고 단체를 이룬 것이 이른바 사교(邪敎) 내지 이단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공동 체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들이 전체로 우리에게 증거해준 것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열한 제자가 순교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모두 순교를 기꺼이 맞이할 만큼 공통적으로D똕TXT찃확실한 체험을 했었습니다.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대개 보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까운 사람과는 멀게, 먼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는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도 같이 이단이나 사교는 대체로 다른 곳에서는 크게 흥청거리고, 본향에서는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는 가까운뎃사람들에서 부터 힘있게 증거되어왔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친형제까지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도 그 증거입니다. 얼마나 확실한 증거입니까? 그림과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러므로 참입니다. 멀리해서 확실한 것은 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은 사도들의 공동체적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 모두가 다같이 증거해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노라고 증거한 사람만 해도 열한 제자와 오백 문도(五百門徒)가 엄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순교합니까? 결코 어느 한 사람의 계시 운운으로 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공동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우리의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공동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했고 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그 자체가 사도적이요 교회적입니다. '우리'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라는 개념으로 고백합니다. 나 하나의 고백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 속에서 내가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더 잘D똕TXT];믿는다고, 나는 특별히 다르게 고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천여 년의 '우리'라는 공동체적 신앙의 전승을 따라 나도 그 '우리' 속에서 함께 고백하는 것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교회 안에서 함께, 다같이, 보편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뜻하는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다음은 '주(主)'를 이야기할 차례입니다마는 순서를 바꾸어서 '예수'를 먼저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예수)'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말 '요수아'의 헬라말 표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의 하나입니다.
'여호수아'라든가 '호세아'와 같은 이름도 모두 '예수'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歷史家) 요세푸스(Josephus, Flavius) 의 기록을 보면 대제사장 가운데도 '예수'라는 사람이 다섯이나 있었으며, 그밖에도 20명이나 되는 다른 '예수'가 또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연관이 있는 사람 가운데도 예수님과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이 1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인명(人名)인 '예수'는 유일하고 독특한 이름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사람의 이름으로 흔하게 쓰였던 보통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예수'를 'Jesus'라 표기하고 '지서스'라고 읽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원래 '예수'의 헬라식 발음은 '예수스'이고 히브리어로는 '예수'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그대로 옳은 것입니다.
D똕TXT纓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고 하는 뜻의 '예수' 그 이름 자체가 예수님의 생애를 함축하고 있다는 데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수'는 분명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예수의 실재성(實在性)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둥,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라는 둥, 별소리를 다합니다. 그리고 신앙적 사건이냐 역사적 사건이냐 하고 시비를 벌이는 한편 신앙적 사건이라는 데에 치우친 나머지 예수님의 실재성과 역사성마저 부정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조도 한때는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논쟁이야 어찌됐건 이제는 다 결론이 난 일이므로 문젯거리가 못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보면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문제입니다. 이 양자 사이에는 늘 복잡한 문제가 대두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신성이 믿기 어려운가 하면, 어떤 때에는 인성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다니실 때에야 그 누가 당신의 인성을 의심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신 후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자 세월이 가면서 슬슬 의심이 싹터나기 시
D똕TXT 작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차치하고 생전에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그 3년 세월을 돌이켜보니 꼭 꿈인 것만 같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누구한테 흘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노스틱주의(Gnosticism) 곧 영지주의(靈知主義)가 나왔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1-3세기에 널리 퍼졌던 종교․철학 운동의 하나로, 사람이란 무지와 망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영지(Gnosis)를 통하여 영적 해방에 도달한다는 것, 신성과 자신의 일체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 사상입니다. '노스틱'은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의 영어화 발음입니다.
노스틱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높인 나머지 예수님께서 볼 수 있는 몸(seeing body)으로 오셨던 것일 뿐 실제로 몸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완전히 환상으로 돌려버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당신의 제자에게 팔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예수님을 지극히 신성시하고 신비스럽게 본 나머지 그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때문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사람마다 이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신비로웠다는 사실입니다. 뿐만아니라 사도 요한은 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라고 강조합니다. 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는 사실을 구태여 강조한 것은 그럴만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D똕TXT퐲내가 분명하게 경험을 했는데도 인성을 부정한단말이냐, 내가 이 눈으로 보고 이 손으로 만져봤는데 너희는 웬 딴소리를 하고 다니느냐----하고 노스틱주의자들을 향한 꾸짖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육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토록 신성하고 높아보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19 : 28)"------"내가 목마르다"하신 말씀을 요한은 굳이 써놓은 것입니다. 이는 인성을 강조하려 함이었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니 목마른 것입니다. 당연히 목마른 것입니다. 환상이었다면 목마르다는 말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를 가지셨기에 피가 빠져나가고 물이 빠져나갈 때에 목이 마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 : 34)"------눈앞에 선연히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예수님의 인간됨(인성)을 말씀해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가 참육체로 오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허깨비와도 같이 환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신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육체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incarnation 곧 성육신(成肉身)의 교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다는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바 그 육체는 온전한 육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실 때에 분명하지 않은 모습으D똕TXT퍢로, 사람인지 신인지 모를 어중간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온전한 육체를 입으신 '사람'으로 역사성을 가지고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실제적 신앙입니다. 허깨비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 '예수'는 구체적인 인성을 지닌 온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보통이름인 '예수'를 들어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드리는 우리의 세 번째 고백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말하자면 직명(職名)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는 한 개인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 이름 뒤에 붙는 신분인 셈입니다. 이를테면 '곽선희 목사'라고 할 때, '곽선희'는 이름이고 '목사'는 직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를 놓고 볼 때에 '곽선희'라고 하는 일개 자연인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목사'라고 하는 직명입니다. 이 '목사'라는 직명이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를 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이치는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리스도'로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 '메시야'의 헬라어역(語譯)인 '크리스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붓는다'라는 뜻의 '크리오'가 명사화하여 크리스토스----그리스도가 되었으며, 역시 '붓는다'라는 의미의 히브리말 '마사'에서 나온 말 '메시야'와 똑같이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D똕TXT냗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나 몸에 기름을 바르거나 부음으로 예배의식의 대상으로 신성화하였던 이 '기름부음'의 행위는 성서시대 전기간에 걸쳐 이스라엘 안팎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진 관습이었습니다.
그옛날 히브리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다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때문에 예수님을 일컬어 왕이라거니 제사장이라거니 선지자라거니 하는 것을 성서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메시야'는 그런 뜻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왕을 가리켜서 '메시야'라 일컬은 일이 없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가리켜 '메시아'라 일컫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는 '메시야'일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위의 세 직분을 다 통합한 의미의 이상적인 직분이 '메시야'입니다. 이같은 이상적 메시야를 히브리사람들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친히 속량(贖良)하시고, 친히 말씀하시는 바 그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자 '그분'을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그분'이 메시야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메시야인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신학적 이야기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메시야'와 '메시야의 나라'라고 하는 것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메시야'라고 하는 인격체(Messiah the Person)와 'Messianic Age'와의 관계입니다. 종래에는 이 둘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새 신학자들 가운데는 하나로 보지 않고 따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뿐만아니라 현대 이스라엘의 랍비들도 상당수가 따로 보는 경향D똕TXT쮩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스라엘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아니한 소치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랍비들 가운데도 보수주의자가 있고 자유주의자가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지금도 한 인격체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라는, 한 인격체를 믿지 않습니다. Messianic Age 곧 '메시야의 세대'만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야의 세계, 메시야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지, 메시야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의 세대는 어떤 특정한 사람(the Christ)이 아니라 다수의 메시야, 다수의 그리스도(a Christ)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하여 공헌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메시야(the Christ)'가 아니라 '한 메시야(a Christ)'가 되는 셈입니다. 이같은 자유주의신학적 해석이 있는 것입니다. 요새 히브리사람들 가운데도 꽤 많은 부류가 이같은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야'는 결코 그런 메시야가 아닙니다.
성경은 'the Messiah'의 오심과 함께 메시야의 나라가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한 인격체로서의 메시야(Messiah the Person)와 'Messianic Age'는 함께 오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요, 함께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께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the Messiah'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나라가 임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D똕TXT纓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신 그것으로 인하여 메시야의 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과 함께 그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마침내 메시야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메시야의 나라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곧 '지금 여기에 와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귀신을 내쫓은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메시야와 메시야의 나라는 함께 왔고 함께 이루어졌다----우리의 신앙고백에는 이같은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제성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그 고난 속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끈기있게 기다렸습니다. 그 대망의 메시야, 종말론적 메시야가 마침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메시야(the Messiah)입니다. 종말론적 메시야인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또다른 메시야를 주장하고 억지를 부리는 이단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문선명(文鮮明)의 '통일교'라는 것이 그렇고, '몰몬교'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야'되심을 부정하고 다른 메시야(a Messiah) 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문선명 그 자신입니다. 그밖에도 예수님 이후의 이른바 다른 메시야라고 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생D똕TXT?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인정해줄 수 없는 이단(異端)의 행태들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메시야요 예수님만이 끝입니다. 예수님이 종말론적 메시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아닌 어떤 메시야도 인정할 수 없고, 어느 다른 그리스도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오셨던 그 메시야(the Messiah) 가 우리 앞에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것(재림)을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제사장이십니다. 선지자이십니다.
그 모두입니다. 하나님나라를 그가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되, 히브리서 문맥으로 보면 지성소(至聖所)로 양을 잡아 가지고 들어가는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이며, 그는 죄 있는 인간 제사장이 아니라 결(缺)없는 완전한 제사장입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제사장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이십니다. 그는 말씀을 가르치셨고 율법을 해석하셨습니다. 그는 영원한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그리스도'께 드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제 끝으로 '주'에 대하여 상고해보겠습니다. '주(主)'의 헬라말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노예가 주인을 향해서, 백성이 왕을 향해서 부를 때에 쓰던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는 '주'의 의미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성서적 의미의 '주'는 첫째, 절대충성을 고백한다는 의미에서 쓰입니다. 주인이 있습니D똕TXTpN다. 우리는 그 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충성을 고백하여 '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소유주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는 완전한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다 그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째, 구주되심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과 함께 '구속'이라는 말도 씁니다. 구속(救贖)이란 돈 주고 산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팔고 사고 했습니다. 여기 죄를 지어 죽게 된 노예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돈을 주고 그를 사주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돈을 주고 샀을 때, 그 준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 돈을 주고 샀으면 그 노예는 이제 돈을 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당신의 피를 치르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구주라 고백하는 것은, 이렇듯 그가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네째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주(主)'란 언제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우리로 승리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믿어,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함으로 죄와 사망과 율법을 이기게 합니다.
다섯째, 신성(神性)을 의미합니다. '주'라는 말에는 신성의D똕TXT?뜻이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려드는 사단을 향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시고 물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인용하신바, 같은 말이 신약에서는 '주'로,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부르는 것을 삼갔습니다. 대단히 조심스러워했습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쓰기는 '여호와'라고 쓰고도 읽기는 '주'라는 의미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경건한 이스라엘사람들이므로 이방사람들이 읽도록 성경을 번역할 때에도 '여호와'라고 읽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여호와'를 전부 아도나이, 퀴리오스라고 고쳐 번역해놓았습니다. 그 여파로 영어성경을 보면 '주'라는 말을 전부 대문자로 하여 'LORD'로 번역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전부 여호와를 가리킨 말이지 그 뜻대로 '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하나님되심을 고백함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과 함께 절대적 충성을 다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살아계셔서 오늘도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기도드립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기억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우리D똕TXT規의 왕으로, 우리의 제사장으로, 우리의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하나님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고백입니다.*
D똕TXT? 아들하나님 (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고백 속에 다 요약되어 있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 앞에는 또한, '그 외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외아들' 곧 독생자(獨生子)라고 하는 이 고백을 저는 지난 시간에 일부러 빼놓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그 외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네 단계 고백의 의미를 다 종합한 고백인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을 따로 떼어 한 시간을 잡아 말씀드리고자 해서였습니다.
먼저 신학적인 문제를 조금 살펴보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란 한 인간의 이름이며,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인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으로 믿고 완전한 사람으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기독교 2천 년 전통에 연면히 흐르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자(聖者)나 위인(偉人)으로 우러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생의 귀감으로 삼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은 철저한 유일신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이스라엘사람으로서 하나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을 단죄하는 데는 증인 두 사람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생활규범이자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믿습니다. 이렇듯 유일신 신앙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거나 충돌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직선적으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모형을 놓고 민족마다 그 문화적 상황과 개념에 따라 표현을 달리하여 고백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학적 다양성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내용은 똑같은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고, 그래서 유일신 사상과 마찰되는 일이 없었으며, 그 똑같은 내용을 두고 이를테면 헬라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 '로고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헬라의 철학에서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고전적인 헬라어에서는 무인격적인 원리를 나타내던 '로고스'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창 1:3, 6, 9 및 시 32:6, 33:6 등).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곧 '로고스'였습니다(렘 1:4). 그런가하면 신약에서도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요 1:1, 요일 1:1 등).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의 '말씀'이 곧 로고스인바, 예수님께서는 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 1:14)이시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요 1:1). 그런데 이 '로고스'가 무슨 의미로 쓰였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역사상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잘못 이해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피조물'이라고 묘하게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신학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사(敎理史)를 보면 이 말의 해석을 싸고 논쟁하다가 피를 흘리고 정배를 가고 했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고스'의 이해를 두고 복잡하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로고스'라는 말을 썼지만 이것은 헬라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데에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말을 모르는 이방사람들, 이를테면 로마사람들은 '주(퀴리오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로고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히브리 문화권도 헬라 문화권도 아니기 때문에 그 말들을 그대로 쓰면 이해를 못하거나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로고스'라는 말을 쓰고는 있지만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로고스'를 우리는 '말씀'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마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도(道)'라고 번역해서 이를테면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 '로고스'는 상당히 알기 어려운 말입니다. 헬라 문화권에서만, 헬라의 철학적인 배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특수한 용어로, 헬라 문화권에 복음을 전할 때에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헬라 문화권이 아닌 이방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면 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저들의 왕을 가리켜 '천자(天子)'라느니 '신의 아들'이라느니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권세를 가지게 되면 자신을 좀더 높이 과장하고 싶어지는가 봅니다. 일단 높은 자리에 앉았다 하면 족보까지 고쳐서라도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안간힘쓰는 모습을 역사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이나 통치자가 '천자'나 '신의 아들'로 불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로마사람들이나 그 밖의 이방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자기네 왕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보고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아, 왕을 말함이구나'하고 받아들일 뿐더러 오해가 이에서 그치지 않고 '너는 왜 다른 왕을 섬기느냐'하고 반역자로 몰기까지 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오해로 인하여 사람들이 순교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로마당국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들여가지고 "여기 엄연히 신의 아들인 우리의 황제가 계시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신의 아들이 달리 또 있다고 하느냐"고 으름짱을 놓으면서 가이사(황제)의 화상에 경배하라고 윽박지르고 듣지 않으면 죽였으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던 것입니다.
말이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것이어서 같은 말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어서 엉뚱한 결과를 낳는 일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대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대만의 길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기차 수리소'라는 게 있습니다. 곳곳에 수리소가 있을 만큼 웬 기차가 그리도 많은가 하고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자동차를 가리켜 기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일에 중국사람이 한국사람에게 통신으로 '기차를 한 대 보냈으니 받으시오'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쪽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동차를 보내는 줄 모를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똑같은 단어인데도 사람 나름으로 생각하는 개념은 조금씩 다른 것이 말입니다.
오해를 부르고 마찰을 일으키는 말로서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예로부터 신학이 많은 고민을 안아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로고스'라고, 또 어떤 사람들에는 '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적 다양성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데도 소망교회에서는 이렇게 설교하고 저 교회에서는 저렇게 설교합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신학입니다. 이천 년 전부터 오늘까지 신학은 내내 이런 고민을 안고 왔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원론적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랫동안 고집과도 같이 지켜온 유일신 사상에 금이 가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 불명예가 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입니다. 이는 역시 히브리사람들과 비슷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어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할 수 있습니다. '외아들'이라 했습니다. 이는 독생자라는 뜻입니다. 어느 가정이고 독생자는 귀한 존재입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 부인이 슬하에 딸만 내리 일곱을 낳았는데 여덟 번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새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 얻은 기쁨에 잔치를 하는데 한 달 동안이나 계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가서 축하를 해주면 융숭하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외아들의 의미를 그 부인만은 누구보다도 실감했을 것입니다. '외아들'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분이 한 분 더 있습니다. 저의 할머님입니다. 우리는 가정예배를 볼 때에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할머님의 기도는 항상 서두가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렇게도 시작하고 저렇게도 시작하는데 할머님의 기도는 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주시고……"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떼시고는 한참동안 훌쩍훌쩍 우신 다음에야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할머님 차례만 되면 '또 우시겠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이 예상이 한번도 빗나가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김없이 우시니까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이것이 우리 할머님의 신학이었습니다. 그 신학의 전부였습니다. 하기야 제 아버님이 4대 독자셨으니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시집가서 아들을 못 낳으면 소박을 맞을 정도로 무서운 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 하나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그분이 성경에서 '외아들'이라는 말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하니 이 어른한테 그 무슨 다른 신학이 필요했겠습니까?'외아들'-하나님께서는 이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시고자 아브라함의 가정에 외아들 이삭을 주십니다. 그도 25년 동안이나 애태워 기다리게 하신 다음에야 주셨는데, 그러시고도 또 그 외아들을 바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외아들'의 의미, 그 절대적인 은혜를 철저히, 절실하게 깨닫도록 그렇게 하시더니 보십시오.
마침내 당신께서는 당신의 지중(至重)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습니까? 볼품없는 죄악의 우리들 가운데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여기에 신학이 자리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가없으신 사랑을 이보다 더 강하게, 이보다 더 온전하게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외아들' '독생자'-이것은 상징적 용어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해석하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됩니다. 즉 하나님 같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의미냐,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의미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에워싸고 기독교사(史)에는 2천 년 동안 줄기차게, 심지어는 피를 보면서까지 교리적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알아야 할 것은 '외아들'이 하나님 비슷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 그'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역사상에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누구를 추상적으로 특징지어 나타낼 때에도 '아들'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 나오는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요,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는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셨는데, 이는 그들의 성급한 행동과 열렬한 성격을 보심이었습니다.
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5장 9절에 나오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심은 '하나님을 닮았다' '마치 하나님같다'라는 의미의 표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토로한 백부장의 고백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무죄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다'라는 뜻일 뿐, 로마사람의 그러한 표현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백부장의 고백이 누가복음 23장 47절에서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외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하나'라거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거나 하는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 'the only begotten son'-'외아들'-'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같다'는 뜻으로 쓰일 수 없는 특수한 표현입니다.
구약의 외경(外經) 에스드라II서(II Esdras)의 7장 28절과 29절, 13장 37절과 5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들 곧 메시야가 나타나리라." '아들'이라는 말과 '메시야'라는 말이 동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문맥으로 보면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역시 메시야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아들' '아들'이란 쟁취해서 얻는 신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빼앗아서 얻는 지위가 아닙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외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외아들'이요, '아들'로 태어나서 '아들'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은 본래적인 것이지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은 일시적인 것이거나 우연한 것이거나 얻어진 신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한데도 신학상에는 이에 반하는 해괴한 학설이 있으니 소위 '양자설(養子設, adoptionism)'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디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보통의 인간이었는데, 나중에 세례 받으신 때부터, 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고 하는 따위의 이단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헛소리하는 학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결코 뒤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셨으며, 그 신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은 하나님과 같다는 동등성, 동일성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예속성을 말하고 있음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무릇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무엇이 닮아도 닮았습니다. 그러나 서로 엄연히 딴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이같이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장 17, 18절의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냥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는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 되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요 5:2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요 10:1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요 12:49)" 등의 말씀이 그러하며, 그리고 특별히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는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하셔서 특별한 위치에 있으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내 양(羊)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 10:14, 15)"하셔서 지식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하셔서 계시를 말씀하시며, 16장 15절에서는 "무릇 어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하셔서 특권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다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즉 '하나님되심'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문에 오시고, 그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귀한 결론을 분명하게 주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되심을 믿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나와의 생명적 관계가 바로 맺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러한 생명적 관계는 맺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이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하실 수 없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나님과 당신의 하나됨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무소부재(無所不在)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시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음이라는 것,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오늘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저러한 사랑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바로 이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시는 거룩한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내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내가 처한 이 형편 이 처지 그대로의 나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으로 한결같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현실성을, 그 사랑의 영원성을 우리는 항상 새롭게 고백하여 마지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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