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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1(요한복음 3 : 16 ~ 21)(빌립보서 2 : 5 ~ 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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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1(요한복음 3 : 16 21)(빌립보서 2 : 5 11)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지난 3회에 걸쳐 우리는 먼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세 갈래의 고백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렇게 세 방향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어서 이제는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아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들어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아들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예수''그리스도'의 네 단계입니다. 이 네 단계의 고백에 아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의 내용이 총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혹 교회에 처음 나오든가 하시는 분들 가운데에는 예수면 예수고 그리스도면 그리스도지 번잡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붙이고 거기에다 엎친데 덮치기로 ''자는 왜 붙이는 것이냐고 의문을 품는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같은 의문은 이 시간을 기하여 깨끗이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저렇듯 네 단계로 일컬어 받드는 데는 반드시 그래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쿠오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 영화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받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감시의 눈을 피하여 서로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암호로 물고기를 그려 보이고는 다른 사람이 볼 새라 얼른 지워버리곤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예수 믿는다는 암호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거나 몇몇 제자가 어부였다 해서가 아닙니다. 우연하게도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낱말 '익서스'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알파벳이 다섯 개의 중요한 낱말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의 머릿글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야말로 우리 신앙고백의 전부라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내용이 '물고기'라고 하는 헬라어 낱말 하나에 함축적으로 상징되어 있다는 우연도 재미있거니와, 그러한 연유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암호로 물고기 그 자체를 그렸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2세기경의 교회저술가이자 사제인 터툴리안(Tertullian)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작은 물고기다. 그리고 우리는 '익서스'처럼 물 속에서 태어난다. 작은 물고기를 죽이는 방법은 물에서 건져내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세례를 망각하는 날에는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면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제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 대한 네 단계의 신앙고백을 단계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라는 말입니다. 그냥 지나쳐 생각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이 '우리'라는 낱말이 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한사람 한사람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기에 다른 종교, 이를테면 불교 같은 종교와의 차이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한 사람에게 치중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라는 개념이 ''를 앞섭니다. 공동체 의식입니다. ''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 '우리'의 일원이 됩니다. 하나님 가정의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신앙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고백해놓은 것입니다. 그 고백에서 ''가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기독교는 한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그로써 웅변한 것입니다. 이방 종교(異邦宗敎), 이방 사상은 어느 한 사람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가 산에서 여차여차한 계시를 받았다는 둥, 밭에서 일하다가 여차여차한 계시를 받았다는 둥, 산에 갔는데 바위가 깨지면서 그 속에서 이 책이 나왔으니 믿어야 한다는 따위의 잡소리로 사람을 현혹하는 어느 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 교파를 이루고 단체를 이룬 것이 이른바 사교(邪敎) 내지 이단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공동 체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들이 전체로 우리에게 증거해 준 것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열 한 제자가 순교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가 모두 순교를 기꺼이 맞이할 만큼 공통적으로 확실한 체험을 했었습니다.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대개 보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까운 사람과는 멀게, 먼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는 배척 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도 같이 이단이나 사교는 대체로 다른 곳에서는 크게 흥청거리고, 본향에서는 외면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는 가까운데 사람들에서부터 힘있게 증거 되어 왔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친형제까지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도 그 증거입니다. 얼마나 확실한 증거입니까? 그림과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러므로 참입니다. 멀리해서 확실한 것은 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은 사도들의 공동체적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 모두가 다같이 증거해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노라고 증거한 사람만 해도 열한 제자와 오백 문도(五百門徒)가 엄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순교합니까? 결코 어느 한 사람의 계시 운운으로 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공동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우리의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공동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했고 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그 자체가 사도적이요 교회적입니다. '우리'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라는 개념으로 고백합니다. 나 하나의 고백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 속에서 내가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더 잘 믿는다고, 나는 특별히 다르게 고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천여 년의 '우리'라는 공동체적 신앙의 전승을 따라 나도 그 '우리' 속에서 함께 고백하는 것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교회 안에서 함께, 다같이, 보편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뜻하는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다음은 '()'를 이야기할 차례입니다마는 순서를 바꾸어서 '예수'를 먼저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예수)''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말 '요수아'의 헬라말 표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의 하나입니다.

'여호수아'라든가 '호세아'와 같은 이름도 모두 '예수'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歷史家) 요세푸스(Josephus, Flavius) 의 기록을 보면 대제사장 가운데도 '예수'라는 사람이 다섯이나 있었으며, 그밖에도 20명이나 되는 다른 '예수'가 또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연관이 있는 사람 가운데도 예수님과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이 1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인명(人名)'예수'는 유일하고 독특한 이름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사람의 이름으로 흔하게 쓰였던 보통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예수''Jesus'라 표기하고 '지서스'라고 읽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원래 '예수'의 헬라식 발음은 '예수스'이고 히브리어로는 '예수'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그대로 옳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고 하는 뜻의 '예수' 그 이름 자체가 예수님의 생애를 함축하고 있다는 데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수'는 분명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예수의 실재성(實在性)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둥,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라는 둥, 별소리를 다합니다. 그리고 신앙적 사건이냐 역사적 사건이냐 하고 시비를 벌이는 한편 신앙적 사건이라는 데에 치우친 나머지 예수님의 실재성과 역사성마저 부정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조도 한때는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논쟁이야 어찌됐건 이제는 다 결론이 난 일이므로 문젯거리가 못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 가보면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문제입니다. 이 양자 사이에는 늘 복잡한 문제가 대두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신성이 믿기 어려운가 하면, 어떤 때에는 인성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다니실 때에야 그 누가 당신의 인성을 의심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신 후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자 세월이 가면서 슬슬 의심이 싹터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차치하고 생전에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그 3년 세월을 돌이켜보니 꼭 꿈인 것만 같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누구한테 흘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노스틱주의(Gnosticism) 곧 영지주의(靈知主義)가 나왔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1-3세기에 널리 퍼졌던 종교철학 운동의 하나로, 사람이란 무지와 망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영지(Gnosis)를 통하여 영적 해방에 도달한다는 것, 신성과 자신의 일체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 사상입니다. '노스틱'은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의 영어화 발음입니다.

노스틱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높인 나머지 예수님께서 볼 수 있는 몸(seeing body)으로 오셨던 것일 뿐 실제로 몸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완전히 환상으로 돌려버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당신의 제자에게 팔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예수님을 지극히 신성시하고 신비스럽게 본 나머지 그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사람마다 이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신비로웠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라고 강조합니다. 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는 사실을 구태여 강조한 것은 그럴만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분명하게 경험을 했는데도 인성을 부정한단 말이냐, 내가 이 눈으로 보고 이 손으로 만져봤는데 너희는 웬 딴소리를 하고 다니느냐-하고 노스틱주의자들을 향한 꾸짖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육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토록 신성하고 높아 보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19 : 28)"-"내가 목마르다"하신 말씀을 요한은 굳이 써놓은 것입니다. 이는 인성을 강조하려 함이었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니 목마른 것입니다. 당연히 목마른 것입니다. 환상이었다면 목마르다는 말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를 가지셨기에 피가 빠져나가고 물이 빠져나갈 때에 목이 마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19 : 34)"-눈앞에 선연히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예수님의 인간됨(인성)을 말씀해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가 참육체로 오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허깨비와도 같이 환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신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육체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incarnation 곧 성육신(成肉身)의 교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다는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바 그 육체는 온전한 육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실 때에 분명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인지 신인지 모를 어중간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온전한 육체를 입으신 '사람'으로 역사성을 가지고 오셔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실제적 신앙입니다. 허깨비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 '예수'는 구체적인 인성을 지닌 온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보통이름인 '예수'를 들어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드리는 우리의 세 번째 고백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말하자면 직명(職名)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는 한 개인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 이름 뒤에 붙는 신분인 셈입니다. 이를테면 '곽선희 목사'라고 할 때, '곽선희'는 이름이고 '목사'는 직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를 놓고 볼 때에 '곽선희'라고 하는 일개 자연인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목사'라고 하는 직명입니다. '목사'라는 직명이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를 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이치는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리스도'로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 '메시야'의 헬라어역(語譯)'크리스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붓는다'라는 뜻의 '크리오'가 명사화하여 크리스토스-그리스도가 되었으며, 역시 '붓는다'라는 의미의 히브리말 '마사'에서 나온 말 '메시야'와 똑같이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나 몸에 기름을 바르거나 부음으로 예배의식의 대상으로 신성화하였던 이 '기름부음'의 행위는 성서시대 전기간에 걸쳐 이스라엘 안팎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진 관습이었습니다.

그 옛날 히브리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다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을 일컬어 왕이라거니 제사장이라거니 선지자라거니 하는 것을 성서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메시야'는 그런 뜻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왕을 가리켜서 '메시야'라 일컬은 일이 없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가리켜 '메시아'라 일컫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메시야'일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위의 세 직분을 다 통합한 의미의 이상적인 직분이 '메시야'입니다. 이같은 이상적 메시야를 히브리사람들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친히 속량(贖良)하시고, 친히 말씀하시는 바 그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자 '그분'을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그분'이 메시야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메시야인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신학적 이야기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메시야''메시야의 나라'라고 하는 것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라고 하는 인격체(Messiah the Person)'Messianic Age'와의 관계입니다. 종래에는 이 둘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새 신학자들 가운데는 하나로 보지 않고 따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이스라엘의 랍비들도 상당수가 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스라엘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아니한 소치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랍비들 가운데도 보수주의자가 있고 자유주의자가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지금도 한 인격체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라는, 한 인격체를 믿지 않습니다. Messianic Age '메시야의 세대'만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야의 세계, 메시야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지, 메시야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의 세대는 어떤 특정한 사람(the Christ)이 아니라 다수의 메시야, 다수의 그리스도(a Christ)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하여 공헌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메시야(the Christ)'가 아니라 '한 메시야(a Christ)'가 되는 셈입니다. 이같은 자유주의 신학적 해석이 있는 것입니다. 요새 히브리사람들 가운데도 꽤 많은 부류가 이같은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야'는 결코 그런 메시야가 아닙니다.

성경은 'the Messiah'의 오심과 함께 메시야의 나라가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한 인격체로서의 메시야(Messiah the Person)'Messianic Age'는 함께 오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요, 함께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께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the Messiah'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나라가 임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신 그것으로 인하여 메시야의 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과 함께 그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마침내 메시야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3:2)"-메시야의 나라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귀신을 내쫓은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메시야와 메시야의 나라는 함께 왔고 함께 이루어졌다-우리의 신앙고백에는 이 같은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제성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그 고난 속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그 대망의 메시야, 종말론적 메시야가 마침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메시야(the Messiah)입니다. 종말론적 메시야인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또 다른 메시야를 주장하고 억지를 부리는 이단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문선명(文鮮明)'통일교'라는 것이 그렇고, '몰몬교'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야'되심을 부정하고 다른 메시야(a Messiah) 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문선명 그 자신입니다. 그밖에도 예수님 이후의 이른바 다른 메시야라고 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인정해줄 수 없는 이단(異端)의 행태들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메시야요 예수님만이 끝입니다. 예수님이 종말론적 메시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아닌 어떤 메시야도 인정할 수 없고, 어느 다른 그리스도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오셨던 그 메시야(the Messiah) 가 우리 앞에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것(재림)을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제사장이십니다. 선지자이십니다.

그 모두입니다. 하나님나라를 그가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되, 히브리서 문맥으로 보면 지성소(至聖所)로 양을 잡아 가지고 들어가는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이며, 그는 죄 있는 인간 제사장이 아니라 결()없는 완전한 제사장입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제사장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이십니다. 그는 말씀을 가르치셨고 율법을 해석하셨습니다. 그는 영원한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그리스도'께 드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제 끝으로 ''에 대하여 상고해보겠습니다. '()'의 헬라말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노예가 주인을 향해서, 백성이 왕을 향해서 부를 때에 쓰던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는 ''의 의미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성서적 의미의 ''는 첫째, 절대충성을 고백한다는 의미에서 쓰입니다.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충성을 고백하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소유주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는 완전한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다 그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 구주 되심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과 함께 '구속'이라는 말도 씁니다. 구속(救贖)이란 돈주고 산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팔고 사고했습니다. 여기 죄를 지어 죽게 된 노예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돈을 주고 그를 사주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돈을 주고 샀을 때, 그 준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 돈을 주고 샀으면 그 노예는 이제 돈을 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당신의 피를 치르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구주라 고백하는 것은, 이렇듯 그가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란 언제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우리로 승리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믿어,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죄와 사망과 율법을 이기게 합니다.

다섯째, 신성(神性)을 의미합니다. ''라는 말에는 신성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려드는 사단을 향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시고 물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16절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인용하신 바, 같은 말이 신약에서는 '',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부르는 것을 삼갔습니다. 대단히 조심스러워했습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쓰기는 '여호와'라고 쓰고도 읽기는 ''라는 의미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경건한 이스라엘사람들이므로 이방사람들이 읽도록 성경을 번역할 때에도 '여호와'라고 읽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여호와'를 전부 아도나이, 퀴리오스라고 고쳐 번역해놓았습니다. 그 여파로 영어성경을 보면 ''라는 말을 전부 대문자로 하여 'LORD'로 번역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전부 여호와를 가리킨 말이지 그 뜻대로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함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과 함께 절대적 충성을 다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살아 계셔서 오늘도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기도 드립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기억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제사장으로, 우리의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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