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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2(요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고백 속에 다 요약되어 있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 앞에는 또한, '그 외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외아들' 곧 독생자(獨生子)라고 하는 이 고백을 저는 지난 시간에 일부러 빼놓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그 외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네 단계 고백의 의미를 다 종합한 고백인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을 따로 떼어 한 시간을 잡아 말씀드리고자 해서였습니다.
먼저 신학적인 문제를 조금 살펴보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란 한 인간의 이름이며,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인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으로 믿고 완전한 사람으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기독교 2천 년 전통에 연면히 흐르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자(聖者)나 위인(偉人)으로 우러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생의 귀감으로 삼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은 철저한 유일신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이스라엘사람으로서 하나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을 단죄하는 데는 증인 두 사람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생활규범이자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믿습니다. 이렇듯 유일신 신앙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거나 충돌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직선적으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모형을 놓고 민족마다 그 문화적 상황과 개념에 따라 표현을 달리하여 고백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학적 다양성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내용은 똑같은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고, 그래서 유일신 사상과 마찰되는 일이 없었으며, 그 똑같은 내용을 두고 이를테면 헬라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 '로고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헬라의 철학에서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고전적인 헬라어에서는 무인격적인 원리를 나타내던 '로고스'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창 1:3, 6, 9 및 시 32:6, 33:6 등).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곧 '로고스'였습니다(렘 1:4). 그런가하면 신약에서도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요 1:1, 요일 1:1 등).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의 '말씀'이 곧 로고스인바, 예수님께서는 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 1:14)이시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요 1:1). 그런데 이 '로고스'가 무슨 의미로 쓰였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역사상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잘못 이해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피조물'이라고 묘하게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신학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사(敎理史)를 보면 이 말의 해석을 싸고 논쟁하다가 피를 흘리고 정배를 가고 했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고스'의 이해를 두고 복잡하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로고스'라는 말을 썼지만 이것은 헬라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데에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말을 모르는 이방사람들, 이를테면 로마사람들은 '주(퀴리오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로고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히브리 문화권도 헬라 문화권도 아니기 때문에 그 말들을 그대로 쓰면 이해를 못하거나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로고스'라는 말을 쓰고는 있지만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로고스'를 우리는 '말씀'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마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도(道)'라고 번역해서 이를테면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 '로고스'는 상당히 알기 어려운 말입니다. 헬라 문화권에서만, 헬라의 철학적인 배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특수한 용어로, 헬라 문화권에 복음을 전할 때에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헬라 문화권이 아닌 이방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면 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저들의 왕을 가리켜 '천자(天子)'라느니 '신의 아들'이라느니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권세를 가지게 되면 자신을 좀더 높이 과장하고 싶어지는가 봅니다. 일단 높은 자리에 앉았다 하면 족보까지 고쳐서라도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안간힘쓰는 모습을 역사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이나 통치자가 '천자'나 '신의 아들'로 불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로마사람들이나 그 밖의 이방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자기네 왕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보고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아, 왕을 말함이구나'하고 받아들일 뿐더러 오해가 이에서 그치지 않고 '너는 왜 다른 왕을 섬기느냐'하고 반역자로 몰기까지 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오해로 인하여 사람들이 순교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로마당국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들여가지고 "여기 엄연히 신의 아들인 우리의 황제가 계시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신의 아들이 달리 또 있다고 하느냐"고 으름짱을 놓으면서 가이사(황제)의 화상에 경배하라고 윽박지르고 듣지 않으면 죽였으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던 것입니다.
말이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것이어서 같은 말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어서 엉뚱한 결과를 낳는 일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대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대만의 길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기차 수리소'라는 게 있습니다. 곳곳에 수리소가 있을 만큼 웬 기차가 그리도 많은가 하고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자동차를 가리켜 기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일에 중국사람이 한국사람에게 통신으로 '기차를 한 대 보냈으니 받으시오'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쪽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동차를 보내는 줄 모를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똑같은 단어인데도 사람 나름으로 생각하는 개념은 조금씩 다른 것이 말입니다.
오해를 부르고 마찰을 일으키는 말로서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예로부터 신학이 많은 고민을 안아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로고스'라고, 또 어떤 사람들에는 '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적 다양성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데도 소망교회에서는 이렇게 설교하고 저 교회에서는 저렇게 설교합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신학입니다. 이천 년 전부터 오늘까지 신학은 내내 이런 고민을 안고 왔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원론적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랫동안 고집과도 같이 지켜온 유일신 사상에 금이 가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 불명예가 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입니다. 이는 역시 히브리사람들과 비슷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어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할 수 있습니다. '외아들'이라 했습니다. 이는 독생자라는 뜻입니다. 어느 가정이고 독생자는 귀한 존재입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 부인이 슬하에 딸만 내리 일곱을 낳았는데 여덟 번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새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 얻은 기쁨에 잔치를 하는데 한 달 동안이나 계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가서 축하를 해주면 융숭하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외아들의 의미를 그 부인만은 누구보다도 실감했을 것입니다. '외아들'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분이 한 분 더 있습니다. 저의 할머님입니다. 우리는 가정예배를 볼 때에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할머님의 기도는 항상 서두가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렇게도 시작하고 저렇게도 시작하는데 할머님의 기도는 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주시고……"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떼시고는 한참동안 훌쩍훌쩍 우신 다음에야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할머님 차례만 되면 '또 우시겠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이 예상이 한번도 빗나가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김없이 우시니까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이것이 우리 할머님의 신학이었습니다. 그 신학의 전부였습니다. 하기야 제 아버님이 4대 독자셨으니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시집가서 아들을 못 낳으면 소박을 맞을 정도로 무서운 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 하나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쑤셨겠습니까? 그분이 성경에서 '외아들'이라는 말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하니 이 어른한테 그 무슨 다른 신학이 필요했겠습니까?'외아들'-하나님께서는 이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시고자 아브라함의 가정에 외아들 이삭을 주십니다. 그도 25년 동안이나 애태워 기다리게 하신 다음에야 주셨는데, 그러시고도 또 그 외아들을 바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외아들'의 의미, 그 절대적인 은혜를 철저히, 절실하게 깨닫도록 그렇게 하시더니 보십시오.
마침내 당신께서는 당신의 지중(至重)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습니까? 볼품없는 죄악의 우리들 가운데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여기에 신학이 자리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가없으신 사랑을 이보다 더 강하게, 이보다 더 온전하게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외아들' '독생자'-이것은 상징적 용어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해석하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됩니다. 즉 하나님 같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의미냐,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의미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에워싸고 기독교사(史)에는 2천 년 동안 줄기차게, 심지어는 피를 보면서까지 교리적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알아야 할 것은 '외아들'이 하나님 비슷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 그'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역사상에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누구를 추상적으로 특징지어 나타낼 때에도 '아들'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 나오는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요,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는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셨는데, 이는 그들의 성급한 행동과 열렬한 성격을 보심이었습니다.
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5장 9절에 나오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심은 '하나님을 닮았다' '마치 하나님같다'라는 의미의 표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토로한 백부장의 고백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무죄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다'라는 뜻일 뿐, 로마사람의 그러한 표현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백부장의 고백이 누가복음 23장 47절에서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외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하나'라거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거나 하는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 'the only begotten son'-'외아들'-'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같다'는 뜻으로 쓰일 수 없는 특수한 표현입니다.
구약의 외경(外經) 에스드라II서(II Esdras)의 7장 28절과 29절, 13장 37절과 5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들 곧 메시야가 나타나리라." '아들'이라는 말과 '메시야'라는 말이 동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문맥으로 보면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역시 메시야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아들' '아들'이란 쟁취해서 얻는 신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빼앗아서 얻는 지위가 아닙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외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외아들'이요, '아들'로 태어나서 '아들'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은 본래적인 것이지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은 일시적인 것이거나 우연한 것이거나 얻어진 신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한데도 신학상에는 이에 반하는 해괴한 학설이 있으니 소위 '양자설(養子設, adoptionism)'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디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보통의 인간이었는데, 나중에 세례 받으신 때부터, 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고 하는 따위의 이단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헛소리하는 학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결코 뒤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셨으며, 그 신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은 하나님과 같다는 동등성, 동일성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예속성을 말하고 있음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무릇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무엇이 닮아도 닮았습니다. 그러나 서로 엄연히 딴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이같이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장 17, 18절의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냥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는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 되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요 5:2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요 10:1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요 12:49)" 등의 말씀이 그러하며, 그리고 특별히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는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하셔서 특별한 위치에 있으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내 양(羊)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 10:14, 15)"하셔서 지식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하셔서 계시를 말씀하시며, 16장 15절에서는 "무릇 어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하셔서 특권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다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즉 '하나님되심'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문에 오시고, 그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귀한 결론을 분명하게 주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되심을 믿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나와의 생명적 관계가 바로 맺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러한 생명적 관계는 맺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이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하실 수 없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나님과 당신의 하나됨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무소부재(無所不在)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시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음이라는 것,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오늘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저러한 사랑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바로 이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시는 거룩한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내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내가 처한 이 형편 이 처지 그대로의 나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으로 한결같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현실성을, 그 사랑의 영원성을 우리는 항상 새롭게 고백하여 마지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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