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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3(마태복음 1 : 18 ~ 24)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거듭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신경은 세 단계로 짜여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고,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께 대한 고백입니다. 어느 신조이든지,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반드시 이 세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잡하게 삼위일체라는 교리는 왜 그리 강조하는가? 그것 좀 모르고 넘어가면 어떻단 말인가?"하고 쉽게 말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의 소치입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전통적인 교리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Trinitarian Creed)요, 여기서 떠나면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시간에 걸쳐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예수님께 대한 고백에 대하여 공부해오는 중에 지난 시간에는 '독생자'에 대하여 공부했거니와 이제, 이 시간에는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의 예수님께 대한 고백은 특별히 케리그마(kerygma)적입니다. 케리그마란 복음서의 좋은 소식을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33년 간의 생애를 일대기를 쓰듯 차례대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전생애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역점을 두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일주일간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에 전체의 거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내용을 총괄하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이라 할진대 십자가와 부활에 역점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알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우리는 이 간단한 고백으로부터 예수님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고난과 부활하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다고 하는 등의 이적들과 봉사 생활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듯 이천 년의 역사를 지내오는 동안에 기독교는 예수님의 봉사하시고 이적을 행하신 행적에 대해서는 그만큼 소홀히 여기고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교리가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마는 예수님의 생애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십자가에 의미를 두고 그 생애를 해석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일컬어 초대교회적 신앙이라고 하며, 학술적인 용어로는 케리그마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1909년에서 1915년에 걸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거센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도대체 전통적 보수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보수주의와 유사한 신학 방향은 여럿 있습니다. 정통주의니 복음주의(Evangelism)니 근본주의(Fundamentalism)니 하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표현을 쓰든지 간에 우리가 초대교회 이래 변함없이 전승되어온 기독교의 교리와 바른 신앙을 제대로 알고 갖춘다는 것은 귀중한 일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성경을 보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때에 따라 기분에 따라 이쪽으로 휩쓸리고 저쪽으로 몰려가고 합니다. 이는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성경은 먼저 전승에 의하여 이루어진 다음에 기록된 것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야 기록으로 남겨지곤 했던 것입니다. 기록 이전에 전승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의 해석은 전승을 먼저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마땅히 전통적인 교리와 신앙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통적인 신앙이란 어떤 신앙인가? 일반적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그 준거(準據)로 삼습니다.
첫째, 성경의 영감(靈感)됨을 믿습니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정확무오(正確無誤)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함께 예수님의 신성 곧 하나님 되심을 믿습니다. 오늘에 보아하면 예수님을 다만 하나의 봉사자로 또는 생의 귀감으로, 훌륭한 스승으로나 병이나 고치시는 분으로, 또는 '마술사'쯤으로 간주하려 하는 신앙상의 흐름도 없지 않습니다. 지각없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것,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셋째,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이렇게 믿고 고백하는 것이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넷째, 대속(代贖)의 구원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제사였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전통적 신앙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되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든가 우리도 부활한다던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엄연히 '육체로' 부활하신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전통적 신앙입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재림을 믿습니다. 오셨던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장차 다시 심판 주로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전통적 신앙입니다.
이 여섯 가지의 전통적 신앙을 종합하여 믿을 때에 우리는 정통주의,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자유주의가 되거니 이단이 되거니 하여 바른 신앙에서 떠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문제도 바로 여섯 가지의 전통적 신앙 가운데 들어 있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방증하는 성경말씀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말씀인 마태복음 1장 18절로 24절과 누가복음 1장 26절로 38절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둘은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던 중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를 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요셉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 1:19)"-이것은 '동정녀 탄생'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당시 얼마나 중요하고 역사적인 일이었나를 실감나게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의 결혼 풍습을 살펴보면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애결혼을 많이 하는 요즘과는 달리, 당시의 이스라엘사람들은 양가의 부모나 중매쟁이가 성사시키는 중매결혼을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문적으로 직업적으로 중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매쟁이의 중매로 두 가정, 곧 두 사람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약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약혼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두 가정의 대표적인 식구들만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의식을 갖춤으로써 약혼은 성립합니다. 우리의 풍속과 다른 점은 결혼식을 끝낸 후에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약혼식만 하고도 서로 왕래할 뿐만 아니라 여행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상으로는 간단해 보이는 그들의 약혼식에는 이렇듯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결혼 풍속이 다 있습니다. 종족이 다양한 만큼으로 풍속도 가지각색입니다. 문화인류학상 결혼의 풍속에 대하여 쓴 책을 보면 가지가지의 희한한 결혼 풍속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 둘을 먼저 낳아 가지고 결혼식을 올리는 데도 있습니다. 처녀보다는 아기를 낳아본 사람이 더 '비싼 값'으로 대접받는 데도 있습니다. 아기를 낳아본 사람이 더 잘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습속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풍속이란 나라마다 민족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풍속은 참으로 해괴하여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이 보기에 아무리 기이한 풍속이라 해도 그 세대, 그 지역에서는 당연시되는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성경말씀과 풍속을 혼동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는 것이지, 지역적이고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풍속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풍속으로는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야 함께 사는 것이 정상인데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약혼식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약혼식입니다. 약혼식을 올린 다음에 6개월 내지 1년의 기간을 가집니다. 이 정혼기간이 끝난 뒤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들은 정혼기간 동안 자유로이 오가기도 하며 함께 여행도 합니다. 그리고 결혼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준비도 이 기간에 마칩니다. 중매, 약혼식, 결혼식의 세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결혼식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단순한 잔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혼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에 그들은 이렇듯 약혼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직분상 주례를 많이 서게 됩니다. 약혼식과 결혼식에 참석해서 주례를 맡다보니 더러는 골치 아픈 문제도 생깁디다. 드리고 싶은 말씀을 약혼식에서 모두 하고 보니 막상 결혼식에서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하나, 어느 정도 권면해야 하나…… 좀처럼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결혼식이든 약혼식이든 한 가지 절차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예식은 약혼식입니다. 약혼식을 올림으로써 두 남녀는 하나님 앞에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약혼식을 하고는 곧바로 호적신고를 합니다.
이제는 서로를 부를 때에도 아예 아내로, 남편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렇게 정혼기간을 가지다가 적당한 때에 여자를 데려오면 그것이 바로 결혼생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저러한 결혼풍속 대로라면 약혼한 여인이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한 집에서 살지만 않을 뿐, 약혼식을 치른 남녀는 부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침 마리아와 약혼만 했을 뿐이요 서로 잠자리를 같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요셉은 걱정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임신한 아기는 내 아이가 아니다, 나는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고 사실대로 드러내는 날이면 마리아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히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풍속들을 살펴보면 불효자식과 창녀에 대해서는 유독 가혹하게 처벌하는 풍속이 눈에 뜁니다. 부모에게 '미쳤다'고 하는 자식이 있으면, 그리고 그를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둘만 있으면 그 자식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신들린 무당도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창녀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창녀도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풍속은 지금도 전해져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관계를 맺더라도 돈만은 거래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녀관계에서 돈 거래가 있었던 것이 발각되면 창녀로 인정되어 잡아다 죽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창녀는 근본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엄격한 법이 있으니만큼 밴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가를 밝히지 못한다면 부정한 여자로 인정받아 죽게 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마리아를 위하여 요셉은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본래 의로운 사람이라 자신과 약혼한 여자, 마리아가 부정한 여자라고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고민하던 끝에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셉은 조용히 이혼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관계한 그 남자와의 결혼을 주선해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듯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마리아가 죽음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엔가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말씀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마리아가 가진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의심 없이 마리아를 맞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요셉은 마리아의 아기가 비록 자신의 아기는 아니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이렇듯 어려운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참 아슬아슬한 과정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신앙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더라면 큰 사단이 빚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와 의로운 사람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실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관련해서는 역사적으로도 때마다 중요하게 고백되고 확인되고 증거 되고 선포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시우스는 그의 기록을 통하여 "처녀의 몸에 참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주후 170년경에 순교한 저스틴도 "처녀의 몸을 빌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이밖에도 사도신경과 '니케아(Nicaea) 신조'에도 '처녀 탄생'을 말씀하고 있고, 주후 451년의 칼케돈(Chalcedon) 종교회의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신 누가복음 1장 3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능치 못하심이 없는 능력이 나타나 동정녀 탄생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특별한 길을 통하여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성령에 의한 잉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과학적이므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자 혼자서 어떻게 아기를 잉태할 수 있느냐고 반박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비신앙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능력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는 자가 어찌 동정녀 탄생을 못 믿겠습니까? 신학자 바레트(Barrett)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창조적 능력을 동반한다. 그 능력은 크게 둘이 있는데, 하나는 창조요 또하나는 재창조다." 창세기 1장도 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나님의 영이 물위를 운행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하는 말씀을 원문에 보면 '머라헤페트'-'닭이 알을 품고 있다'라는 뜻이요, 품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닭이 자신의 체온으로 알을 따뜻하게 감싸면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함으로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이 우주를 덮싸서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 생명이 중생 하는 데도 성령의 창조적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전파되고 그것을 감당하도록, 열매맺도록, 효과를 내도록, 성령이 계속 감화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순종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십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이 역사의 재창조에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창조적 능력,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하는 그 능력을 믿을 때에 비로소 '동정녀 탄생'을 그대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복음 1장 23절의 이 말씀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이 히브리어 원전에는 '하 알마'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알마'라는 단어의 고어가 아닌 현대어에서의 의미는 영어의 'lady'와 같습니다. 이는 결혼연령에 달한 여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처녀'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조금 안다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알마'의 뜻이 '처녀'가 아닌데 번역을 잘못해서 '처녀'로 해놓았다는 식으로 아는 체를 합니다마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에는 '알마'가 그저 '여자'의 뜻으로 쓰이지마는 2000여년 전, 아니 2300여년 전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헬라어로 옮겨놓은「70인역(七十人譯, IDB)」을 살펴보면 '알마'를 '파르테노스'로 번역했습니다. 이 '파르테노스'는 '처녀'입니다. 영어로는 'lady'가 아니라 'virgin'인 것입니다.
이렇듯 '알마'는 현대에 와서 일반적인 여성을 뜻하게 되었지 2000여년 전 그 당시에는 분명히 '처녀'라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르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구태여 문자에 매달려 이렇다저렇다할 것까지도 없는 일입니다. '알마'가 '처녀'인 것은 요셉이 고민하고 문제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처녀가 잉태했으니 걱정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어 하나를 가지고 이 뜻이니 저 뜻이니 하는 심사가 차라리 고약하다 하겠습니다. '알마'는 '처녀'인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사도 바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소위 '사도 바울의 기독론(基督論)'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들어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할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는 동정녀 탄생이란 그의 관심 밖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셨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을 뿐, 처녀 탄생 자체에 대하여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아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기에 구태여 딱 꼬집어서 언급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전적으로 동참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설명하지만 예수님의 생애에 이르러서는 오직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한마디를 인용한 것밖에는 없습니다(행 20:35). 그도 그럴것이 그는 어디까지나 율법적인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생애를 다 알고 보고 들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만은 잘 모르는 자신이 '처녀 탄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 없는 처지일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처녀 탄생'의 문제가 왜 그토록 역사적으로 중요한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처녀 탄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드시 믿어야 하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참사람 되심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꿈으로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가현(假現)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사람이십니다. 사람의 몸을 통하여 사람의 아기로 나셔서 사람어른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일단 여자의 몸을 통하여 나셨다는 사실이 입증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고백이 확실한 근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증은 영지주의자들의 학설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여느 아이들처럼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갔다, 지혜와 몸과 키가 자랐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예수님께서 참사람 되심을 증명하는 데에 그 태어나심과 성장하심을 살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가 곧 하나님 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special way를 통해서였습니다. 일반적 과정이 아닌 특별한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시되 사람이 아님을,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sign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사인이며 표적입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이도 애를 써왔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이 두 마디로써 예수님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이 시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는 것이 부정된다면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신다고 하는 그 중요한 고백이 끝없게 무너져버리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적 전승을 이어 그들과 같이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자 하는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해야 할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동정녀 탄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잘못 적용되곤 하는 사상이 있기에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위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염시태--길게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라고도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미리 힘입어 원죄의 물듦 없이 모태에 잉태되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셨다, 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원죄 없는 여자의 몸에서 나셔야 했다, 곧 성모 마리아는 원죄 없는 여자였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나아가 여기서 마리아는 죄가 없는 여자이므로 여느 사람들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승천을 했다고 하는 이른바 '마리아 승천설'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죄없는 마리아를 낳은 어머니까지 신성시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성 안나여, 이 망혼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여기 나오는 안나가 바로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죄 없음을 말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까지 거슬러 올라가 신성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신이 아닌 인간이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남자와의 관계가 없는 여자의 몸을 빌어서 났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에게는 이미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몸으로부터 죄가 유전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시적인 논리입니다.
유치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동정녀를 통하여 나셨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되시기에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택하신 것으로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말씀해주기 위한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은 세례를 받으신 후라든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라든가, 거룩한 사역을 통해서 얻어진 신분이 아니라, 태어나신 때부터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증거 해주기 위한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설(養子說)'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분을 얻게 된 것은 세례를 받으신 때부터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동정녀 탄생'은 분명하게 말씀해줍니다. "예수님은 나실 때부터 하나님이시다, 근본적으로 본래적으로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런 의미에서 '동정녀 탄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빌어 오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를 가리켜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고집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무너질 수도 없으며,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만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만 우리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되시지 아니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낭설이요 감상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2000여년을 두고 변함없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이시요 사람이시라고 고백해오는 것입니다. 특히 칼케돈 신조는 '완전한 사람이요 하나님'이라고 문맥을 박아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 '동정녀 탄생'입니다.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다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이에 있습니다.
incarnation-도성인신(성육신)이라는 말에는 대략 세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현대신학적 표현을 빌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화적 관계를 맺기 위하여 인간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적 관계를 가리켜 'God makes him small.-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작게 만드셨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다니,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그렇게 크신 분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셨으니 그 희생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고자 택하신 길이었습니다.
간혹 예배시간에 늦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간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육신이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조금 늦은 어떤 분이 조용히 예배보는 가운데 들어와서 뒤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서두를 걸. 오다가 만난 그 사람과 수다만 떨지 않았어도 늦지 않았을 것을'하고 후회를 합니다. 송구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자기보다도 더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더구나 장로님입니다. 순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송구했던 마음도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장로님도 늦는데 내가 늦은 것은 대수롭지 않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합니다. 우리 가운데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께서도 죄인 되시지 않고는 죄인을 만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문화권에 들어오시지 아니하고는, 그 문화의 채널을 통하시지 아니하고는 죄인을 만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성인신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께서 인간 되시어 우리 가운데 늘 거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우리는 이 고백을 항상 새롭게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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