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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4(요한복음 18 : 33 ~ 4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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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4(요한복음 18 : 33 40)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사도신경은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이렇듯 간단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케리그마적(福音書的)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촛점을 맞추어 거기에 역점을 두고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 복음서요, 복음서의 이러한 의도에 맞추어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내용을 간단하게 총괄한 것이 사도신경(사도들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들도 이와 똑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정비해보십시다. 적어도 우리가 이 사도적 전승의 신앙을 지켜나간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으뜸의 관심은 당연히 십자가와 부활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봉사와 그 놀라운 이적들은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건들이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公生涯)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다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뚝 잘라 예수님의 고난을 요약하고 만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과 마리아 외에 사도신경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라 하고 보니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어느 농촌 교회에서 신학적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장로님 한 분이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다가 '본디오 빌라도'를 설명하게 되자 "빌라도의 성()이 본디오가(吳哥)"하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입니까?"하고 교인들이 묻자 "본디 오() 빌라도라고 하니까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총독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크게 세력을 뻗치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로마 본국에는 황제가 있고, 그 밑에 13명의 총독이 있어 각자 식민지를 맡아 황제를 대리하여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민지 가운데 시리아(수리아)를 다스리던 총독이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본디오'가 이름이고 '빌라도'가 성입니다. 유대는 그 수리아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꼭 10년 동안 수리아의 총독을 맡아보았습니다. 그가 거하던 총독부는 원래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었으나 유월절을 전후하여 이곳에 정치적 소요가 일 것 같다는 정보가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총독부를 잠시 옮겨 있었는데, 이때에 예수님을 재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예수님께 대한 재판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는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각 나라 왕들을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나 인정은 해주었습니다. 기독교인과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에 앞장섰던 헤롯도 이 같은 허수아비의 하나였습니다. 로마는 그 각 나라에 자치권을 주어 정치를 하게 했으나 거기에는 조건이 따랐습니다.

반드시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르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왕이 될 때에도 반드시 로마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꼬박꼬박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특별히 죄인에 대한 판결, 특히 사형은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습니다. 이것만은 자치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에는 산헤드린공회라고, 71명으로 구성되는 기구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최고회의', 요새로 치면 국회와도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이 기구도 죄인의 사형을 판결 집행할 자치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사형 여부의 판결권은 총독에게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고난을 안기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라고 사도신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제사장 가야바였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게 한 자도 가야바요,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끌고 간 자도 가야바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주선한 자도 가야바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도신경에 '가야바'라는 이름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의 책임이 고스란히 빌라도에게 떠넘겨진 것 같아서 빌라도는 참 억울하겠다 싶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형집행이 결과적으로 엄연히 빌라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형의 최종결정권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으니까요.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보듯이 그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알았고,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 앞에 데려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과단성 있게 놓아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빌라도가 좀더 확고한 소신의 사람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가정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예수님을 확실하게 옹호하였다면, 예수는 무죄하다, 그러니 앞으로는 누구라도 그를 고소하지 말라 하고 땅땅땅 판결을 내렸다면, 엄청난 가정입니다마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빌라도는 어찌하여 그런 판결을 내리고 말았을까요? 일견 종교적이요 일견 미신적이기는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께 대하여 은근히 두려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재판이 있기 전날 밤에 빌라도의 아내가 상서롭지 못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재판정에 앉은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꿈이 좋지 않으니 조심해서 재판하라고 전하면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했습니다. 자고로 아내 충고 들어서 손해나는 법이 없다는데, 이 빌라도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불쌍하게도 그만 사도신경에 그 이름이 박힘으로 천추에 걸쳐 만민의 입에 욕되이 오르내리는 이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때 빌라도의 아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해져오는 이야기에는 그럴싸한 것이 있어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진땀을 빼는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꿈이었다면 영락없이 사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신경이 얼마나 긴 세월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외어지고 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20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만도 대대로 수억 수십억의 헤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외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앞으로도 두고두고 사도신경은 변함없이 외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다시없는 불명예를 떠 안았으니 빌라도야말로 참 불쌍한 사람이다 싶은 것입니다.

빌라도는 정치적 욕망이 매우 승한 사람이었습니다. 강경한 기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총독들은 감히 엄두도 못 냈던 강경책으로 권역(圈域)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강경책만으로 남의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병했을 때에도 처음에는 강경책을 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져 31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이 그치지를 않자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쓴답시고 이른바 '문화시책'이라는 추파를 던졌습니다. 이렇듯 식민지 국민을 다스리는 것은 무작정 짓누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다른 총독들이 엄두도 못냈던 갖가지의 강경책으로 억지를 부려나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원래가 철저하게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성지(聖地)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이곳을 로마가 무력으로 점령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빌라도의 로마군대는 로마제국과 로마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에다, 둥그렇게 만들어 가이사(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판(銅板)을 앞세워 치켜들고 저러한 예루살렘에 호호탕탕 입성했었습니다. 로마사람들에게는 가이사의 상()이 곧 그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동판 앞에 예를 갖추어 절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로 비쳤습니다. 로마 총독들은 예루살렘에 부임할 때마다 이러한 의미가 담긴 황제의 상을 앞세우고 들어오려 했지만 그때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결사적인 저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그따위 우상이 들어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사람들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 이전의 총독들은 감히 아무도 로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그 동판을 들여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전의 총독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기어이 저희 황제의 상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게다가 빌라도는 '성전세'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지금도 그렇듯이 원래가 물이 귀한 곳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갈릴리로부터 물을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수도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시설을 갖추려면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궁리하던 끝에 빌라도는 예루살렘 성전에 모아놓은 성전세를 강제로 뺏어다가 수도시설을 했습니다. 이 돈은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위하여 한푼 두푼 모아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토록 못돼먹고 강경했습니다.

이 같은 본디오 빌라도의 강경 정책은 유대사람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대의 도처에서 소요와 반란이 일어나고, '게릴라'가 출몰했습니다. 더욱이 얼마 남지 않은 유월절에 대대적인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있습니다. 이를 두고 빌라도는 무척이나 고심합니다. 만약 그때에 반란이 일어난다면 막을 길이 없어지고, 빌라도 자신은 총독직에서 물러나 문책을 당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바로 이 같은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야바를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의 사람들과 유대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앞으로 있을 반란을 막기 위해서도 이들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총독직과 예수님의 재판을 놓고 그 사이에서 고민을 합니다. 그실 빌라도는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시민들과 제사장과 산헤드린공회 회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한두 가지쯤 들어 줄 생각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때에 예수님의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성격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나친 정치적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진실을 잃게 됩니다. 지나친 정치적 수단은 흔히 정의를 묵살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교활한 정치적 수단을 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죄 없음을, 당연히 풀어주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사람들이 두려워 방면하지를 않고 유월절까지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매년 유월절 축제 때마다 백성들의 희망에 따라 죄인 하나를 방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죄인 아닌 자는 끝까지 죄인 아닌 것으로 석방을 해야지, 죄인 아닌 자에게 일단 죄인의 누명을 씌운 후에 석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해서 빌라도는 제 꾀에 스스로 걸려들고 맙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랄까요.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어떻게든 교활하게 일을 처리해보고자 했으나 결국은 자신의 음모에 스스로 걸려들고 맙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흉악범 바라바를 예수님과 함께 내세워 시민들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히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사람들은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빌라도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인간적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빌라도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재판의 마지막 과정에서 손을 씻는 '()'를 행했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손을 씻으면서 "나는 죄가 없다.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습니까? 손을 씻는다고 그 큰 죄가 없어집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결국 빌라도 자신의 어리석은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그것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끌고 왔을 때에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으며, 군중을 향해서도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또한 제사장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거듭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할 때에도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하고 물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은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고 정치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정치가가 되며, 따라서 정치적 범죄가 형성되어 처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정치적 의미의 ''이 아닌 줄 알면서도 끝까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일삼아 들먹였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에도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를 붙이게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은 "그는 우리의 왕이 아니니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라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을 우겼습니다. 너희들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합리화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총독의 지위에 얽매인 나머지 끝내 이렇듯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살려고 할 때에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특히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사도신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실 정도로 나약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장님을 눈뜨게 하시고,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 같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능력은 다 어디 두시고 그처럼 비참하게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26:53, 54)"-이는 겟세마네동산에서 내려오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고난이 능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받으신 고난은 수동적 피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큰 권능을 행한 역사가 전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빌라도에 의한 고난과 그 십자가에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게 됩니다.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죽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커다란 권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순순히 받아들이셨습니다. 받으신 그 고난은 능동적인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고뇌하시던 모습이 성경 복음서에 나타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26 : 38)"-이것은 분명 육신이 당할 고통을 고민하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그 내용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몇 갈래로 추측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내려오시니 군인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의 종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이를 막기 위하여 베드로가 검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아마도 목을 치려고 한 것이 빗나가 귀가 베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귀를 주워 다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 : 11)"-귀중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신 이유가 이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당신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추상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로운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선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희생하는 길이요 사랑하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러한 길을 선택하려고 할 때에는 참뜻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령 결혼적령기에 있는 처녀가 저에게 찾아와 결혼 대상이 될 수 있는 남성상을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저 돈은 없어도 건강한 남자, 학벌은 시원치 않아도 성품이 좋은 남자, 직장은 좋지 않아도 믿음이 좋은 남자,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일을 앞세울 수 있는 남자를 택하세요"라고 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다시 와서 구체적으로 몇 사람을 제시하면서 "이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오늘의 문제를 놓고 어느 쪽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그토록 고민하신 것은 그 까닭이 이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시고 제자들에게까지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만찬 예식까지 치르셨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요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무엇을 더 망설이고 고민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작 내일 아침이면 그렇게 모순되고 부조리한 빌라도의 재판을 받아 나약하게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현실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시고 얻은 결론은 역시 십자가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확실히 믿고 십자가를 받으신 것입니다.

간혹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정치적인 무기력의 소산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압니다. 사랑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정의가 소멸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만 내세우면 정의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회 정의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어리석고 무능하고 초라한 실패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빌라도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인지 능력이 있는 것 같고 무슨 권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침묵하고 계시므로 빌라도는 말을 하라고 재촉합니다. 거듭 재촉하다못해 그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게 진정 진리라면 어째서 이 자리에 혼자 섰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지지자가 있어야 진리요 이겨야 진리요 영광을 누려야 진리지,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처지에서 무슨 진리를 논할 수 있겠느냐 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도 진리라는 것을 빌라도 주제에야 알 턱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성취요 성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단 사흘밖에는 붙잡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셨습니다. 그 사흘 끝에 부활 승천하시어 만세토록 세상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받으신 것 같은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억울한 고난이 때때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빌라도에게서 받으신 것과 같은 고난이, 그런 어두움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를 바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이 고백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시간, 시간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된 자로서 당하는 고난과 그 고난 뒤에 펼쳐질 부활의 아침을 믿으면서 하루하루를 올바르게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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