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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아들하나님7(사도행전 2 : 29 ~ 3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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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7(사도행전 2 : 29 36)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 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오는 부활절에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늘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가집니다마는,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좀더 학문적인 입장에서 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부활의 문제는 우리가 일생을 두고 끊임없이 상고해야 할 문제이자 새롭게 해야 할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한마디로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가 죽음에서 생의 의미를 찾습니다마는, 기독교는 오직 부활에서 생의 의미를 찾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는 입장에서 지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두고 지혜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혜의 가장 근본에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세상에 이처럼 엄연한 진리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비롯된 이래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내가 죽으리라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죽음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죽음만큼 확실한 일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보장을 할 수 없지만 죽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장담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듯 확실한 사실도 때로는 외면을 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순서를 밟아 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오고 아버지가 오고, 아들이 오고 손자가 오고…… 이렇듯 올 때에는 차례차례 왔습니다마는, 떠나갈 때에는 무순(無順)입니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가고 나중 온 사람이 나중 가라는 법이 없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보다도 앞질러 세상을 떠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실제적인 것이 없고 죽음만큼 엄연한 것이 없고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 하고 부정하려 합니다. 죽음을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죄 때문일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 다음에 있을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함으로 죽음을 꺼려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죽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자세가 어떠하냐----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증거의 첫째가는 잣대가 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털끝만큼도 없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광산으로 전도를 하러 들어갔더니 그곳 광부들이 이를 만류합니다. "목사님, 여기서는 전도하지 마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만한 곡절이 있었습니다. 얼마전 선교사 하나가 이 광산에 들어왔습니다. 갱내(坑內)에 들어가려면 승강기를 타야 하는데, 보통 우리가 건물을 오르내릴 때에 사용하는 그런 승강기가 아닙니다.

쇠줄 하나에 바구니 같은 것을 매달아놓고 그 바구니에 들어가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바구니 같은 것이라 밖을 훤히 내다볼 수가 있어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엄습합니다. 줄이 끊어지는 날이면 그대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선교사,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다가 그만 아래를 내려다본 것입니다. 다 올라왔을 때에 사람들이 문을 열어보니 선교사는 기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전도하는 사람이 여기서 떨어져 죽을까봐 겁먹어 기절할 정도라면 도대체 그 사람의 말을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 목사님, 가만히 듣고 보니 백 번 옳은 말입니다. 내려다보니 아닌게아니라 아찔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지혜를 짜내어 대답을 합니다. "목숨이야 아깝지 않지만, 죽는 맛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지요." 죽음 저편에 아름다운 세계가 있을 것은 알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기는 힘들지 않겠는가----궁색한 대로 그렇게 대답해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부활의 증인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곧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생의 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언제나 염두에 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확실한 종말론적 신앙을 구비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진리에 대하여 거듭거듭 고백하고 확인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보고 '잔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자는 자들에 관하여'라고 죽음을 말씀합니다. 죽음을 '큰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깨어날 ''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죽는 맛이 어떠하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는 맛은 잠드는 맛과 똑같다는 것이지." 남이 보기에 딱할 뿐이지 죽는 것은 깊이 잠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죽음 앞에 벌벌 떨지 말 것입니다. 초라해서 못볼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다음에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죽는 과정 자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죽음은 마치 옷을 벗는 것과 같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다고 죽음을 간단하게 정의했습니다. 옛것을 벗어버린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영원한 장막에 들어간다----사람의 생을 장막생활에 비유했습니다.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신 튼튼하고 영원한 집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옷이 낡으면 빨아 입고 기워 입고 다려 입고 하다가 정 낡아서 더는 입을 수 없게 되면 내버리고 마는 것과도 같이, 육신도 낡아지면 고장난 속을 약으로 다스리거나 상처에 약을 바르기도 하고 째거나 꿰매거나 하며 치료를 하다가 끝내는 육신이라는 그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토대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이렇듯 긴 설명이 필요한 것은 부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죽음을 확증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증명되고야 부활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죽음이 있고야 완전한 부활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이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확증하고, 그리고 부활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특별히 오늘의 본문도 그렇습니다마는,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를 증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냥 부활하셨다고 만 말씀하고 맙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부활은 '사실(事實)'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습니다. 대개 거짓말이면 으레 설명이 길어지게 마련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저를 꼭 만나야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앞에 앉아서 묵기도(黙祈禱)를 합니다. 제가 그 묵기도하는 시간을 잽니다.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 한 분이 "묵기도 오래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러 온 사람이다"라고 말씀한 바 있어서입니다. 묵기도를 길게 하고 나서 "목사님"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 말들은 거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본디 거짓말은 꾸밈이 많아서 설명이깁니다. '사실'은 한마디로 끝납니다. 숫제 말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있어도 길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를 말씀할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그 하나는 구약성경을 빌어 "성경에 이미 예언한대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우리가 그 증인이로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있겠습니까? 부활에 관하여 어떤 변증가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고하셨다. 그 때문에 로마 측은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할까봐 걱정되어 돌무덤을 다시 큰 돌로 막아놓고 군사로 하여 지키게 하였다. 사흘 후에 부활하시겠다고 했으므로 적어도 사흘 동안은 작정하고 지켜야 할 만큼 부활의 소문은 이미 예수님 자신에 의하여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부활하시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웃기는 일이다. 부활하시겠다 해놓고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부활'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이야깃거리도 못되었을 것이 아닌가'----재미있는 변증입니다.

부활하시겠다 하시고 부활하셨으니 이제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연사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절대로 우연사가 아닙니다. 미리 계획하시고 널리 예고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dynamic power(역동적인 힘)를 가지는 것입니다. 굉장한 능력을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인하여 인류의 역사가 흐름을 다시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는가하면, 기독교는 마침내 부활의 종교로서 세계 문명을 선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반론들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이라 하고 싶어서 억지로 끼워 맞춘 이론이 몇 가지 있는데 참으로 졸렬합니다. 그 첫째는 '기절설'입니다.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던 것이다. 기절했다 깨어난 것을 두고 부활했다고들 한다----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축입니다. 세상에 기절했다가 살아난 사람을 위하여 죽는(순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여자들이 무덤을 잘못 찾았다는 설명입니다. 새벽에 여자들이 찾아가 빈 무덤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그 무덤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고 말하는 억지입니다. 셋째는 '도난설'입니다. 누군가가 시체를 다른 곳에 감춰놓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신을 감추어두고서 부활했다고 소문을 낸 것이라고 둘러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디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세상에 거짓말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을 위해서는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해놓고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만들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후에 열 한 제자가 모두 순교하지 않습니까? 그들 모두가 거짓을 지키려고 목숨을 바쳤단 말입니까?

넷째는 '환상설'입니다. 부활은 없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어쩌다 눈에 헛것을 보고 '부활'을 보았다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간혹 환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만 환상을 위하여 순교까지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다 한결같이 일시에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을 한결같이 실제 사건으로 오인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환상'을 실제화 하려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사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온통 순교의 역사입니다. 왜 아까운 목숨들을 거침없이 바쳤습니까?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의 생명이 너무나 확실하였기에 즐거움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강한 죽음은 없습니다.

부활은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옛 생명의 연장도 발전도 아닙니다. 옛 생명의 완전한 죽음에서 비롯되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생명에는 네 가지 차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첫째가 기원의 신비입니다. 생명 그 자체의 근원이 신비합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밝힌다고 노력하여 '진화론'이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마는, 기원의 신비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둘째가 성장의 신비입니다. 처음에는 작던 생명이 어떻게 하여 크게 자라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들딸이 있습니다.

아들딸이 나를 닮았습니다. 저 아이들에게 나의 무엇을 주었길래 나를 닮게 된 것인가? 성장의 신비야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정도였던 생명의 씨가 어떻게 그토록 성장할 수 있으며, 어떻게 부모를 그대로 닮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듯 생명에는 놀라운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셋째가 죽음의 신비입니다. 이 문제로는 세 주일에 걸쳐 말씀드렸기에 더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넷째가 부활의 신비입니다.

생명에는 저렇듯 네 가지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자연적 생명의 변화나 윤회가 부활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는 것은 변화일 뿐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소위 '윤회설'에서 말하는바 한 생명이 죽었다가 다른 생명으로 되살아난다고 하는, 그 되살아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 마치 죽은 것처럼 동면하다가 새봄이 되면 다시 뛰어나오는 것도 '부활'이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한 생명이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할머니 교인이 저를 찾아와 묻습디다. "목사님, 저희가 죽으면 부활한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저는 부활할 때에 이 허리 좀 죽 폈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구부리고 부활된 생을 살고 싶지는 않네요." "걱정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늙은 사람이 죽으면 늙은 그 모습대로 다시 살고,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린아이 그 모습대로 다시 살고----부활은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이란 무엇인가----이제 신학적으로 분명히 정리해두기로 하십시다. 부활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생명의 신비로운 변화로서 그리스도적인 부활만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말고는 그 예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부활인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소설부활은 기독교적이요 도덕적인 작자의 사상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대표적인 고전의 하나입니다. 주인공 네플류도프가 자기로 인해 타락하여 창녀로 전락하고 법정에까지 서게 된 하녀 카츄샤를 갱생시키고 자신도 종교적인 사랑에 의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간혹 문학을 한다는 사람 중에는 이 작품에서 말하는 '부활'을 두고 '성서적 부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가보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바 몸은 죽지만 정신과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다고 하는 이른바 영혼불멸설(immortality)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이 아닌 것입니다. 혼동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적인 부활은 영과 육이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불멸설에는 정신적 부활은 있지만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실제적인 부활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적 부활만이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처럼 또 먹어야 하고 또 죽어야 하는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몸입니다. 오히려 더욱 완전한 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몸은 불완전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참으로 완전한 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도 불완전하고 육도 불완전한 것을 느낍니다. 영도 육의 지배를 받고 육도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도 완전한 것이요, 영도 완전한 것입니다. 바로 그 부활, 그리스도적 부활, 그것만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이제 우리의 온 생명,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한 자들이 다같이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깊은 생각 없이 들으면 이것이 그것인지 그것이 이것인지 아리송한 개념이 있는데, 곧 역사적 부활 개념과 신령상의 부활 개념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사건이라는 개념과 신앙적 사건이라는 개념입니다. 전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역사상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과 우리도 장차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적인 사건을 말함이요, 후자는 철학적 용어를 빈다면 '실존적 부활'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건을 놓고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려고 하는 경향이 '실존적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인데, 그 대표적인 신학자가 불트만(Bultmann, R.K.)입니다. 대개 이 후자에 치중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부활절에 역사적 부활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넘겨놓고 오늘의 부활만을 열심히 강조하다보면 결국 불트만과 다름없는 경향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엄연히 역사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사건대로 엄연히 있는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건은 우리에게 있어 사건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집안에 있는데 그 집에 불이 났습니다.

불났다는 사건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이야"하고 소리치는데도 나는 불났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나에게는 내가 불에 타죽는다고 해도 불이 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두 번째 사건은 지극히 주관적인 사건이요, 이것은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여간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도 중요하지만 그 부활을 믿는다는 믿음의 사건도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역사적 사건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있어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이래서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과 신앙 사건(faith event)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불트만 같은 사람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는 아랑곳없이 그것을 믿는다는 사실에만 비중을 두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위험한 함정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고백하는 데서부터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장사되신 것이, 다 역사적인 사건인 것과 같이 그에 이어 일어난 부활사건도 역사적인 사건임을 고백하는 것-이것이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과 오순절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활하신 모습을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고 분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4, 5)."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오순절 날에 한자리에 모인 사도들에게 드디어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오순절 사건 또한 엄연히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오순절 사건이 없었다면 부활절은 단지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없었다면 오순절은 단지 하나의 영적 운동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영적 부활을 강조할 것입니다 마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영적 부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역사적 부활을 먼저 고백하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영적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곧 칭의(稱義)의 힘입니다. 성경은 이 대목을 강조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 부활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칭의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그 사랑을 확증하심입니다. 십자가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분하게는 증명되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해도 다시 사시는 역사가 없었다면 당신의 죽음은 한낱 감상(感傷)과 우러름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를 살리시는 역사는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입니다. 우리에게 있을 부활의 능력을 확실하게 예고해주시고 약속해주심입니다. 부활을 약속하시는 사인(sign)입니다. '사인'이 그리스도인의 동력이 됩니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 안에 살아갑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음이 곧 생의 시작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것이 나의 부활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셨다'----이 고백에 우리의 신앙간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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