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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9(사도행전 10 : 34 ~ 43)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하여 동정녀 탄생에서부터, 곧 말구유에서 나신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고 이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좀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종말론적 의미의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고백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습니다. 부활사건은 막중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우주적 개별적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재림의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십자가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어렵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마는, 만일 승천하심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좋은 곳으로 가셨지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와의 관계는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더는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부활 승천도 중요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재림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재림이 없다면 그야말로 괴로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버린 그리스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괴로워 거처를 옮겨버린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고백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의 중보자 되어 기도하시고, 오늘도 중보자 되시고,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여기서 우리와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추상적 진리가 아닙니다. 이념적 문제도 사상적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재림의 의미가 얼마나 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처럼 세상에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다시 오겠다 하십니다.
여기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임하심에는 두 가지 차원의 양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오심이요, 또하나는 승천하실 때의 모습 그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차원의 임하심을 바로 소화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 '오신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어떤 때에는 영으로 오심을, 어떤 때에는 재림하여 다시 오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그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신다'고 한 약속이나 기록을 볼 때에는 두 가지 의미의 어느 쪽인가를 분명히 판별해야 합니다.
재림인지 영으로 오심인지 구분하여 이해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문자대로 그저 무심히 읽어나가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도 말한 바 있듯이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세 가지의 형태로 임하시는 것(three kind of advent)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육신을 입으시고 말구유에 오심이요, 그 둘은 성령으로 오심이요, 그 셋은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으로 오심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육신으로 오시는 임함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세계에 오시고자 답답하게도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니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큰 것을 작게 만들어 보십시오. 큰 희생입니다. 이를테면 어른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투 잡히기 십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 쉰에 첫아들을 보았습니다. 늦게 얻은 것이고 보니 너무도 귀하던 나머지 버릇없게 키웠습니다. 그저 귀하게만 키우느라니 도대체 부자지간인지 막놓고 지내는 친구 사이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상투를 잡고 놉니다. 어깨 위로 올라가서 잡아당기기 일쑤입니다. 그 지경인데도 야단 한번 못 칩니다. 너무 귀하여 타이르거나 꾸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손님이 왔습니다. 이 손님 앞에서 아이가 제 아버지의 상투를 잡고 흔듭니다. 손님 앞이라 아버지는 마지못해 아이를 야단칩니다. "이놈아, 그러면 못써." 이 어린아이가 무어라고 대꾸했을 것 같습니까? "어? 이 자식이 어제하고 다르다?"--보십시오. 어른이 어린아이와 어울리면 이 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 세계로 오셨다-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하나님께는 굉장한 희생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God makes Him small."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작게 만드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연약한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토록 크신 분을 그토록 작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희생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십니다. 그 육신은 우리가 보기에 완전한 것 같으나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제 영으로 와 계시지만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과 육이 합한 완전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육으로도 완전치 못하고 영으로도 완전치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이 배고플 때에는 배만 고픈 것이 아니라 슬프기까지 합니다. 배만 고픈 사람은 편한 사람입니다.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영도 아프고 영이 건강치 못하면 육신에 병이 생깁니다. 이렇듯 영과 육은 묘한 관계에 있습니다. 둘 다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격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때의 그 인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격으로 다시 오시는 것-그것이 재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여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성령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역사 하십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과 교회의 관계를 신앙의 근본으로 알고 중시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성령에 대한 이해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해와 사도 바울의 이해가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이 임하여 오순절로부터 교회가 확장되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는 신비로운 상황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영으로 오셔서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하셔 개별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의 양상을 달리하여 오늘도 역사 하시는 것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어서인지 사도 요한과는 조금 달리 이해하고 있습니다. 장차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대리자(agent)로 먼저 오셔서 역사 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이해하였고, 사도 바울은 미래로부터 현재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메시야 대망사상(待望思想)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해하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의 어느 싯점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과 부활 승천하시는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그들이 믿는 가장 귀중한 진리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구약 성경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fulfilment)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의 촛점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예수 때문이요, 선지자들의 예언도 예수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 만이 본체입니다. 본체 없는 그림자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본체가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 전부가 상징적인 것, 예표적인 것, 'prototype'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완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언은 좋은 것이로되 성취없는 예언은 거짓이요 사기(詐欺)일 뿐입니다. 준다, 준다 하고는 주지 않는다면 요새 아이들 말마따나 '공갈'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속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효입니다. 제아무리 액수가 크다 해도 부도수표이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들은 어김없이 구체화하였습니다. 수천 년 동안 예언해온 그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마다 신약의 사건들이 구약의 말씀에 응하여 전개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 역사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상주의(Utopianism)가 아닙니다. 한낱 이념(ideology)도 아닙니다. 엄연한 역사입니다. 구약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구체화하고 역사화 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 열매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재림 대망 사상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스라엘사람들의 그 믿음이, 그 소망이 이제는 이른바 기독교화(christianize)하여 새롭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망사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대망하는 메시야는 구체적 우주적 메시야입니다. 세상 끝날에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날' '주의 날(the Lord's day)'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이 '주의 날' 사상과 합해져 역사의 끝에 가서 온 우주가 심판을 받고 그때에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게 된다고 하는 우주적 종말론을 종합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이요, 초대교인들이 기다려오던 종말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4, 2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에 대하여 누누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종말론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의 서신 가운데 종말론이 빠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눈앞에 있으니 환난을 참으라, 열심히 전도하라, 성실하라, 진실하라,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고 말씀합니다. 모든 가치관, 축복관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재림사상에 근본을 두고 그로부터 신앙체계를 세웠습니다. 베드로의 서신에도 재림이라는 말이 간단없이 나옵니다. 야고보서에도 나옵니다. 사도 요한의 글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느 편지건 어느 글이건 재림 대망 사상으로 충만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을 전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윤리를 한마디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재림'을 학술적인 용어로는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어사전에도 없습니다. 이 재림사상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복음서 전반에 걸쳐 친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천국관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로,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었고, 예수님의 임하심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사건이 바로 천국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21)" 하셨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하셔서 예수님께서 오셨음이 곧 천국의 임재(臨在)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임한 천국을 말씀하심입니다.
둘째로, 천국이 확장되어나가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확장되어나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세째는, 다시 임하는 천국,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임하게 되는 천국을 말씀합니다. 곧 완성되는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미 임한 천국, 확장되는 천국, 그리고 재림으로 완성되는 천국-이 세 가지 차원으로 이해해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 차원을 혼동하면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바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임한 천국, 확장되는 천국, 완성되는 천국----이것을 구약으로 돌아가서 상징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옵니다.
이것이 1차 구원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면서 많은 시험을 당하지만 마침내는 시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2차 구원입니다.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드는데, 이것이 세 번째 구원입니다. 이는 완성되는 천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말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합니다마는, 성경은 이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손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은 가르쳐주시고 필요치 않은 것은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필요치 않은 것까지 알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겸손하게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만큼 알면 됩니다. '여기까지만 알아라'----거기까지만 알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제 죽을 날을 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가 나의 죽을 날을 알고 있다면 세상이 선해질 것 같습니까, 악해질 것 같습니까? 알아서 좋을 것 같으면 왜 진작에 가르쳐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나이에 왜 예수를 믿습니까? 좀더 놀다가 한 육십이 넘으면 믿지요 뭐" 합니다. 알기는 많이 알고 있습디다. 십자가 옆에 있었던 강도, 그 정도로만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은 차 사고로 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 사랑하는 친구는 자동차에 '예수님과 함께 운전하나니'라고 써붙였습디다. 그리고 자동차에 앉을 때마다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가다가 '꽝'하면 기도할 시간이 없으니 미리 임종기도 하고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약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마는, 아무튼 사람이 제 죽을 날을 모른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는 순서대로 왔지만 세상을 떠나갈 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재미있게 산다고 늦게 간다는 법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에게는 종말론적 인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날에 대하여 지나치게 마음을 쓸 것이 아닙니다. 재림의 때를 알고자 하는 것은 마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이 교수한테 시험날짜를 자꾸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무 때나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해야 할 공부나 부지런히 했으면 되었지 뭘 자꾸 물어봅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시건 내일 오시는 줄로 아십시다. 어차피 재림적 종말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종말이 곧 주의 재림이요, 우리는 그 날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delay of parousia'-예수님 당시에도 때가 찼다고 했는데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말은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학설도 많고 문제도 많고, 까다롭기도 한 것이 이 재림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문제에 대하여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이 시간에는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네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슈바이처(Schweitzer, Albert)의 '실패적 종말론'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마는 신학적 입장에서는 이단이었습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종말론'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의 종말론은 지극히 비기독교적이요 비성서적입니다. 그의 종말론은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있는데, 이른바 '실패적 종말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리는 그 중심이 종말론에 있다'고 한 것까지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인자'라고 하는 그 누군가가 다시 올 것으로 믿고 기다렸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며, 메시야는 오시지 않고, 제자들은 메시야가 언제 오느냐고 자꾸 묻고 그래서 '내가 메시야다'하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종말론을 입증했다는 이론입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은 구주가 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슈바이처는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슈바이처를 존경한 나머지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하다 돌아오신 이일선목사님도 슈바이처를 가리켜 기독교인이라기보다 불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는 다드(C.H.Dodd)의 'realized eschatology(현세적 종말론 또는 인식된 종말론)'입니다. 이는,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동시에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언자들의 종말론적 가르침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성취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종말은 임했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이론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 승천하신 뒤로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을 열심히 기다렸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심지어 일도 팽개친 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재림의 날이 자꾸 늦어져 그만 실망을 하고 말았다-이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 내일 하면서 하마나하마나하고 무려 2천 년이 지나도록 지연되는 재림을 기다리면서 기독교가 지탱해나왔을 리는 없다, 실망한 사람들은 결국 기독교를 등지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오늘까지 존재해오는 데에는 필히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초대교회 이래로 무엇인지 해답을 얻었기에 기독교의 존립이 가능했을 것이다----이렇게 가정하여 해답을 추적한 것입니다. 그 결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잘못임을, 예수님의 재림은 이미 실현되었음을 뒤늦게 인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더는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realized eschatology'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럴싸한 듯하나 이 역시 바른 해석은 아닙니다.
셋째는 불트만(Bultmann, Rudolf)의 견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은 없고, 다만 마음 속에 성령이 임함으로 재림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존철학을 도입하여 신앙이란 그 구조상 원래가 미래적인 것이라고 전제, 초대교회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오실 역사적인 재림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임함으로써 재림은 벌써 다 이루어졌다고, 어느 시대에든지 역사적인 재림은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 역시 비성서적입니다.
넷째는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은 쿨만(Cullmann, Oscar)의 '히브리적 종말론'입니다. 쿨만은 유명한 용어를 썼습니다.
"Already not Yet"--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이미 임했으나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미' 임했는가 하면 '아직' 임하지 않았는데, 이미 임한 천국과 아직 임하지 않은 천국 사이에 선교(宣敎)가 있고 교회(敎會)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성서적 재림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재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주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처음의 오심과 우주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선교가 있고 교회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종말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재림의 지연이 아니라 선교의 기회가 주어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의미에서 항상 미래지향적이자 종말론적입니다. 종말론적 미래지향적 신앙을 떠나서는 기독교의 교리도 윤리도 설명할 길이 없어집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전통적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골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는 이 땅 위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순교도 기꺼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로마의 원형극장 안에서 맹수에 찢겨 죽으면서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재림의 신앙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6절과 4장 17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고난을 피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는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종말론적 의미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본뜻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신부로서 오늘 예수님과 '약혼식'을 갖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의 시각은 앞으로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인치심을 받게 되는 시각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비자(visa)'를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외국에 가려고 해도 먼저 내가 가고자 하는 나라의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아야만 하지 않습니까? 그 비자는 자격심사를 거친 뒤에 받을 수 있는데, 그 심사가 꽤 까다롭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기 위하여 미대사관에 가 비자를 신청할 때에 보면 비자를 못 받고 그냥 돌아가는 사람도 상당히 많습니다. 먼저 자격을 보고 괜찮으면 비자를 내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 임할 하늘나라의 백성에게 하늘나라의 대사관인 교회가 비자를 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듯 세례에는 종말론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늘 '기업'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내세의 기업, 영원한 기업에 대하여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waiting faith)입니다.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 기다리는 마음이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닙니다. 동적(動的)인 것이요 행동적인 것입니다.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주님께서 임하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최선을 다해 선교와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이렇듯 종말론적이며 동시에 선교적인 것임을 명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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