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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8(빌립보서 2 : 5 ~ 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에 오르사…
사도행전 1장 6절로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승천(昇天)이라고 하는 이 기상천외의 사건에 대하여 성경에는 읽는 사람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설명이나 구구하게 증명하고자 하는 따위의 의도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건 그 자체만을 있는 그대로 간명하게 '알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곧 승천하신 사건이 결코 무슨 환상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어떤 사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설화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음입니다. 특별한 논리적 의도가 배제된 단순하고 깨끗한 하나의 사건으로만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오히려 실재성을 실감하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승천 또한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 이하가 아니더라도 성경 여러 곳에서, 이를테면 복음서의 원본이라고 하는 마가복음 16장 19절을 비롯하여 누가복음 9장 51절과 24장 51절, 요한복음 6장 62절과 20장 17절, 디모데전서 3장 16절, 에베소서 4장 8절로 10절, 히브리서 4장 14절 등에서 우리는 승천의 기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승천에 대하여 이 시간에 신학적인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만 조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공생애의 사역을 거쳐 십자가에 죽으시는 데까지,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신 것, 병고치신 것,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런 일은 누구나 그리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까지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부활사건부터는 여느 인간의 상식 가지고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로 막연하게 떠올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나 부활하신 사건에 조금도 구차한 설명을 붙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천사건에 대해서도 일체의 수식을 붙이지 않은 채 역사적 사실로 단순하게 기록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승천은 곧 부활사건과 같이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기사요 역사적 사건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하늘에 오르사"라고 고백합니다. '하늘'이라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하늘이라는 말로 인하여 꽤나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도 해서,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신 분 곧 '유일'하신 분이므로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이라 불러야 옳다고 '외고집' 부릴 것까지는 없는 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하늘을 '하??'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피란나올 때에 가지고 나온 성경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보시던 옛날 성경책인데, 거기에 보면 '하늘'이 'ㅡ' 대신 '아래아(??)'를 쓴 '하??'로 되어 있습니다.
북녘 사람들은 본디 '으' 발음을 잘 못합니다. 저도 '으' 발음을 배우느라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대개들 '으'를 '아'로 발음합니다. '아버지'를 '아바지'로, '하늘'을 '하날'로 읽습니다. 곧 '하늘님'--'하??님'--'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님'에서 ㄹ받침이 줄어진 '하느님'도 반드시 하나님을 잘못 부르는 말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디 하늘을 신격(神格)으로 받들어왔다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늘'에 두 가지의 개념이 있습니다. 공간적 의미에서 말하는 '하늘'과 차원적 의미에서 말하는 '하늘'이 그것입니다. 공간 개념으로 '하늘'과 '땅'이라고 말할 때의 '하늘'은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과 구별된 저 창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원적으로 '하늘'과 '땅'이라 하면 '땅'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요, '하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공간적 의미의 하늘을 말할 때에는 보통 '공중'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공간적 의미의 하늘은 'sky'라 하고 차원적 의미의 하늘은 'heaven'이라고 합니다. 똑같이 하늘이라는 말을 쓰지만 '푸른 하늘'이라고 할 때의 하늘과 신령상의 '하늘'은 같지 않은 것입니다. 올바로 구별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고 하는 문제를 공간적 의미로 해석하려들면 여러 모로 어려운 문제가 따르는 것입니다.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1963년에 저는 경험을 쌓기 위하여 미국 학생들의 캠핑에 지도목사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로 나뉘어 각각 한 주일씩 함께 지냈는데 특히 국민학생들과 함께 할 때에는 선생님 한 분이 못 오셔서 제가 그 반을 맡아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반을 맡지 않았다면 아침저녁으로 설교만 하면 되는데, 반을 맡고 나니 아이들과 함께 공작하고 토론하고 가르치면서 3시간 동안이나 같이 있어야 합니다.
참 어렵습디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교재에 있는 대로 서툰 영어로 설명을 하는데 내용 가운데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구름까지는 무엇을 타고 오시나요?" 이렇게 과학적으로 덤비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금방 구름 층에 이를 수 있다, 이 구름층을 벗어나면 막막한 우주공간이다, 그런데 우주인도 아닌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타고 그 우주공간을 지나 구름까지 내려오시느냐---이런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 이토록이나 지나치게 과학적인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련의 우주인 티토프가 우주를 다녀와서 말하였습니다. "우주공간에 아무리 찾아봐도 하나님은 없었다." 그러나 똑같은 우주를 다녀온 바 있는 미국의 우주비행사 글렌은 티토프를 보고 딱부러지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이 우주선 창문으로 내다보고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오." 예수님께서 구름까지 무엇을 타고 오시느냐고 묻는 저 어린이나 소련의 우주비행사 티토프나 '하늘'의 의미를 그저 공간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의미를 차원적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었다면 저렇듯 어리석은 소리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천이란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마는, 성경에는 이 말이 여러 가지 용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하늘로 올리우사(19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he was taken up into heaven'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전반적으로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3장 13절, 6장 62절, 20장 17절에서 그 같은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승천'이라는 말도 쓰고, '들리우다'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이번에는 구약으로 돌아가 살펴보십시다. 잘 아시는대로 구약에는 두 사람이 승천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세계로 데려가셨으므로 땅에 없다, 그 말씀입니다. 또 열왕기하 2장 11절에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세계로 옮기워간 엘리야의 모습을 그린 기사입니다. 간혹 화가들이 구름을 아래 깔아놓고 공중으로 사람이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비록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8편 10절이나 68편 18절이나 24편 7절로 10절이나 47편 5절에서도 승천에 관한 다양한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좀더 깊은 차원에서 부활과 승천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부활로부터 승천을 생각하고, 승천으로부터 부활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하면 승천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면서도 승천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교회에서도 부활절은 있는데 '승천절'이라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신경은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라고 부활과 승천을 대등하게 나란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의 노스틱주의자들(Gnosti-cists)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고백을 확립하기 위하여 승천의 교리를 이렇듯 강조하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지마는, 성경에서도 부활 못지 않게 승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당연히 그러했을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구름뿐이니까요. 구름 너머 그 위는 보이지 않고, 구름만을 보았기 때문에 구름에 가리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름은 변화산에도 있었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도 있었고, 성막에도 덮여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쉐키나'라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 잘 쓰이고 있습니다.
이제 부활과 승천을 연결하여 생각해보십시다. 부활의 참뜻과 성격은 승천에서부터 밝혀집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하게 죽었던 모습 그대로의 몸으로 회생(回生)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몸은 이 땅에 다시 매일 몸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입니다. 죽었던 자가 숨을 돌이켜서 죽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나, 그전처럼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피곤해야 하고 늙어가야 하고, 그리고 다시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회생(回生)과 예수님의 부활은 다릅니다. 무심코 보면 나사로가 일견 행복한 사람인 것도 같습니다마는, 제대로 생각해보면 나사로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이도 들립니다마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에 '나사로'라고 대답해야 정답이 되는 수수께끼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첫째는, 사람이 한 번 죽기도 힘든데 나사로는 두 번이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회생했을 때의 몸은 죽기 전의 몸 그대로이므로 이전처럼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하고 늙어가야 하고, 마침내는 또다시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나사로는 예수님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난 그 생을 그후 바람직스럽게 활용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고통을 당하시는데도 이렇다할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칠 때, 그만이라도 "아니오"라고 한마디쯤 했어야 하겠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언덕을 오르실 적에 따라가서 '제가 지겠습니다'하고 나서기라도 했어야 하겠는데, 성경에나 전설에나 다시 살아난 뒤에는 나사로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사로는 그리 살만한 생을 살지 못했던 것 같고, 따라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 호사가(好事家)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가 바라는 부활이요 참 부활입니다. 부활은 승천이 있음으로 그 성격이 증명됩니다. 승천은 참 부활의 뜻을 온전하게 일러줍니다. 지상에서의 생명이 부활과 함께 하늘에서의 생명으로 그 차원이 옮겨집니다. 보이는 생명, 보이는 육체를 가졌던 생명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이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하늘과 땅을 통하는 생명이 되심을 승천은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부활'이라고도 말하고 '변화'라고도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적 변화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보통 육신도 장차 그리스도의 그 영화로우신 몸과 같이 변화(부활)할 것임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이었다 해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어느 좌표에 있었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저렇듯 우주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승천사건이 있음으로입니다. 부활하시고 다시 몇 년을 더 세상에서 사셨다면 아마도 부활은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승천이 뒷받침함으로써 부활의 성격이 온전해지고 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승천이 있음으로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한 사건이 우주적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하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어, 우리는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구속 사역, 다시 말하면 구원 사역과의 관계에서 승천사건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그 대신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육으로는 승천하시고 영으로 다시 임하셔서 오늘까지 그 역사를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부활사건과 오순절사건 사이에 승천사건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만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에서도 두 사건을 통합하는 중간적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세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승천하셔서 오늘도 우리의 중보자(仲保者)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고백하시고 사함받게 하시고자 기도하시면서 제사장적인 중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한낱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의 영원한 메시야,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대제사장적 메시야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듯 우주적인 대제사장이자 참메시야 되심은 승천하심으로써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속죄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졌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사람마다 사건마다 입니다. 사람이 드리는 제사는 다시 때마다 드려야 하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제사는 완전한 제사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희생되어 죽으신 것만으로는 완전한 제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문제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사람마다 사건마다 드리는 일상적인 제사말고도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제사 곧 속죄제(贖罪祭)가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백성의 죄를 합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지성소에서 드려집니다. 일반적인 제사는 모두 성소에서 드려지지만 속죄제만은 지성소에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무거운 장막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으며, 한 번 들어가려면 일주일 동안 혼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지성소는 너무나 두렵고 은밀한 곳이어서 거기 들어가는 제사장은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는 일까지 있는 터라 옷자락 끝에 방울을 달고 들어갑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 방울소리가 납니다. 밖에 있는 다른 제사장들이 그 소리로 그 제사장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방울소리가 나다가 멎으면 죽은 것으로 알고 시체를 끌어 내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렇듯 지성소는 휘장으로 성소와 엄격히 구별되어 있고, 일 년에 한 번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사장이 휘장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막 15:38)"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화해를 이루면서 서로 통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를 인위적으로 가로막아놓았던 장막이 예수님의 중보로 찢어짐으로써 화해가 성취된 것입니다.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 교회의 이 예배당에도 십자가 앞에 커튼을 드리워 놓았습니다. 이 성전 휘장을 걷는 데에는 십자가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이 같은 신학적 의미에서 이렇게 해놓은 것이지 십자가 앞에 장식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틔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단 한 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승천하시는 그 사건 하나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once for all) 대속하여 주신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당신의 피를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서 중보자 되십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양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하심으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말씀이 로마서 8장 34절에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오늘도 제사장의 역할을 하시고 계십니다. 좀 상상력을 발휘하여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저 사람에게 벌을 내려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닙니다. 저 이마를 보세요. 내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내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고, 저는 나를 믿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심으로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이때문에 승천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은 말씀합니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라고 말씀하는 10장 21절도 같은 말씀입니다. 승천하셨다는 것은 곧 '제사장이 되시다' '영원한 중보자로 계시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왕이 되심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과 5장 11절로 12절, 에베소서 1장 21절, 빌립보서 2장 9절로 11절에서 보는 바 "모든 사람으로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게 하셨다" "만왕의 왕이 되셨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라는 말씀은 곧 그의 권세를 나타냄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해서 전능하시다는 고백이 두 번 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권세로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주관자 되심을, 왕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선지자로 계심입니다. 영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감화시키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과 14장 26절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과 성령으로 임하시는 역사를 연결해서 설명해줍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지 않는다, 내가 가야만 또다른 보혜사가 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면서 역사 하시던 그리스도께서 이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더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 하십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승천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로 계십니다.
신령한 선지자이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신 것입니다.
부활이 첫 열매가 되는 것처럼 승천도 첫 사건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하고 승천할 것을 말씀해주심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계,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세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하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과 같은 성격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아주 오묘하고 신령한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이 땅에 있지만 '승천하신 그리스도', 바로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생명의 일부가 먼저 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건, 어느 때건, 어떻게 건 간에, 어느 날 홀연히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그 길로 그리스도 앞에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저렇듯 신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의 생명이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보증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장님인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날 때부터 장님이니 키우기도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고집을 부리고 떼를 씁니다. 열 다섯 살이 되었을 때에 병원에 가보았더니 날 때부터 장님이기는 하나 수술을 잘하면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돈을 모아서 마침내 수술을 받았습니다. 차차 회복되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들 모두가 신비롭게 보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대자연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보자 어머니한테 묻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왜 말해주지 않았겠느냐? 알려주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네가 알아듣지 못하였다." 알아듣지 못한 것이지 말을 안한 것이 아니라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에 대하여 듣고 또 들어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장님으로 살다가 눈뜬 이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도 언젠가는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베일을 쓰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감화로 알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저 밝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생명에 대한 보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시간, 시간 고백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 고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의 생활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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