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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아들하나님5(히브리서 9 : 11 ~ 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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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5(히브리서 9 : 11 15)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오늘은 이 고백에 대하여 공부할 차례입니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이 고백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어느 부분에서 우리와 관계되고 어느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것이 그 중심으로 드러나 있을 뿐, 그 밖의 지엽적인 이야기들은 이 고백에서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내 믿음의 중심이요 그 밖의 모든 것,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생전에 행하신 그 많은 이적과 봉사의 행적은 그 '중심'을 위하여 있는 지엽(枝葉)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발부터 보고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부터 먼저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라면 행여라도 '중심'을 놓치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두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제가 알던 장로님 가운데 양화점을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 년에 한 번씩 구두를 만들어 제게 선물을 하는데, 그 구두가 미처 해지기도 전에 다시 새 구두를 만들어다주시곤 했습니다. 이분이 저하고 마주쳐 인사를 하게 되면 습관적으로 제 구두에부터 시선이 옵니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에 어느 쪽부터 보아야 합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가장 중요한 중심부를 먼저 보고 나서 이것저것 지엽적인 것에 시선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땅히 중심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역점을 두고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대 생명의 문제입니다. 생명에 속하기 위해서는 역시 생명 문제가 해답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죽으심이 없이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 대 생명의 문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운다든가, 봉사한다든가, 불쌍히 여긴다든가, 고난에 동참한다든가 하는 것이 다 중요한 것이지마는 생명 문제에 비한다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느냐 죽느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직하게 사느냐 불의(不義)하게 사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근본문제는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문제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생명의 문제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랑을 계시하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는 죽으심과 죽임 당하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연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병에 걸려서라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해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나이 많아 때가 되어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자살도 아니요 실수로 세상을 떠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하는 고백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죄 값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처형당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인에 대한 형벌입니다. 죄인을 매다는 형틀이 십자가입니다.

서른세 살의 청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죄 없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그런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혹 그렇게 중요한 고백인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말이 사도신경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하여 궁금해합니다. 문맥을 액면대로만 보면 그런 의문을 품을 만도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앞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라는 수식이 없음을 아쉬워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하는 고백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을 때, 당신의 죄로 죽으신 것이 아닌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토록 단순하게 고백하고 만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거기다가 '우리를 위해서'라고 한마디 더 붙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에 어떤 신학자는 '원래 로마사람들은 문장에 약하다. 그들은 돈만 알고 힘만 아는 사람들이지, 부사구, 형용사구 따져가면서 문장을 엮는 데는 약하다.

그런 점에서는 헬라사람들이 잘한다'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헬라사람들이 만든 니케아신조나 칼케돈선언 같은 것과 사도신경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명백히 드러납니다. 니케아신조는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이며"하는 등 아주 자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사도신경은 다분히 로마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십자가'는 초대교회부터 한결같이 중요하게 강조되어오고 있는 말입니다. 처형당한 죽음이라는 것, 죄 값으로 대신 처형당했다고 하는 것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그렇듯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연사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뭐가 좀 잘못돼서,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오해를 사서 죽으셨다고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죽으심은 일생을 통한 고난의 절정일 뿐입니다. 'accident'가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지시려고 요리조리 피해다니시다 어떻게 돼서 그만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 복음서에서는 이 점을 거의 의식적으로 누누이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죽으심을 아셨습니다. 예언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식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떡과 술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행하신 성만찬식과 함께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골고다를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따로 뚝 떼어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결코 우연사(偶然事)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계획하시고 생각하시고 예고하시고 준비하신 뒤에 바로 그 절정(peak)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준비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수난을 의미합니다. 그 죽음이 얼마나 무거운 고난이었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돌아가셨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교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엄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간수들에게 뇌물을 주어 길을 터놓고 도망하도록 권합니다. 그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이를 거절합니다. 심지어는 너무도 태연하게 약 먹는 법까지 제자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는 사형집행날 정중하게 앉아 스스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죽음치고는 썩 신사적인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약을 마시고 점잖게 앉아죽는 것-이것은 일종의 안락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같은 안락사가 아닙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처절한 아프심을, 그 고통의 피크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는 그러한 고난의 사실(寫實)입니다. 그 무슨 말로도, 그 어떤 일로도 이를 액면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실제로 겪어보고자 했던 사람들도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기무라라고 하는 목사님도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 고통을 경험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못과 망치를 준비하고, 기도를 올리고, 실제로 자신의 몸에 못을 박으려 하는데 어느 교인이 뛰어나와 만류하고는 그 모든 것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험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필리핀의 어느 청년도 실제로 손바닥에 못을 박고 십자가에 매달려봤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손바닥에다 못을 한번 박아 본다고 해서 예수님의 그 고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그 십자가의 고난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이란 그렇게 단순한 육체적 고통만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충분하게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별로 긴 설명을 하지 않은 것도 그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십자가에 대한 기록으로 역사상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정복해 들어갈 때, 이에 반대하고 항거하는 사람 이천 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야네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팔백 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또 하드리안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루에 무려 오백 명을 한꺼번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 생전에도 바루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는 갈릴리사람 이천 명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십자가란 정치적 반역자나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 즉 정치범들을 위한 형구(刑具)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페니키아, 카르타고, 페르시아, 앗시리아, 심지어는 인도에도 이 처형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처형법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가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방법입니다. 민수기 254절은 바알 숭배에 참여했던 이스라엘의 두령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공식적으로 처형했음을 보여줍니다.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달라." 그리고 신명기 2122, 23절에도 이 교수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셋째는 화형에 처하는 방법입니다. 레위기 2014절은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넷째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돌로 쳐서 죽이는 방법입니다. 이는 레위기 2027절과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동네 밖으로 끌어내다가 온동네 사람들이 일제히 돌 세례를 퍼부어 죽이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로마법에 따른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노예만을 십자가에 죽이고,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죽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약소 민족의 서러움까지 함께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이 극악한 처형법은 주후 4세기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역사의 무대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엑스자(X) , 티자(T) , 십자(+) 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는 십자형입니다. 십자가의 모양이 다양하듯 그 처형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놓고 굶겨 죽이는 것입니다. 일주일 이상 매달려 있다가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손바닥과 발에 못을 박아 숨질 때까지 십자가에 달아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수의가 발견된 것을 여러분께서는 아마 환등(幻燈)으로도 보고 이야기와 책으로도 많이 접해보았을 줄로 압니다. 과학적으로도 이것이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그 수의임이 증명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지금껏 보관되었다 나왔는지,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손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한 도마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감추어놓으셨다가 내놓으신 것이나 아닌지, 아무튼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그 세마포 수의가 지금에서 발견되어 과학적으로 연구를 하고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으니 감격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수의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에 나타난 못 자국을 보면 그 위치가 손바닥이 아닌 손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군인들은 십자가 처형에 익숙했던 터이라 손바닥은 찢어질 것이므로 손목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못이 손바닥 쪽을 향하도록 손목에다 박았다는 것이 수의를 통하여 역력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듯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처형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의 과정 또한 더없이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선 당신께서 당하실 고난을 당신 스스로 몰고 가야 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못 박힐 십자가를 당신 스스로 지고 가셔야 했으며, 옷을 벗기우는 수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귀빈'들로 하여금 '긍휼'을 베풀게 해서 당신께 독주를 마시게 하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수치를 입힌 다음에 고통을 술기운으로 약간이나마 잊어보게 해준다는 '로마식 긍휼'입니다. 위선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독주를 거절하셨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15:23)"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27:34)"----몽롱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끝까지 맑은 정신으로 고난을 당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고 형틀을 곧추세웁니다. 그렇게 하여 죽음을 맞으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숨진 다음에는 반드시 그 주검을 확인합니다.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보고 다리를 꺾어보고 해서 혹 가사상태가 아닌지 확인합니다.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면 무덤에 장사하고, 심지어는 그 무덤을 지키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러한 수치와 고통의 과정을 거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고는 신비로운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주후 3세기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녀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 형틀을 찾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어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자 그녀는 몸소 예루살렘까지 찾아가 그곳에 오래 머물면서 애를 쓴 나머지 마침내 그것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가 찾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포함된 세 개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중의 어느 것이 예수님의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신심 깊은 이 여인은 참으로 지혜롭게 머리를 썼습니다. 그녀는 병들어 다 죽어 가는 예루살렘 여인 하나를 데려와 세 개의 십자가에 몸을 대게 했습니다. 병든 여인이 첫 번째 십자가에 몸을 댔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에 몸을 댔습니다. 역시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십자가에 몸을 댄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인의 병이 씻은듯이 나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헬레나는 그 십자가를 분해하여 일부는 예루살렘에 두고 나머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한테 보냈다고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이 곳곳에서 여러 가지 능력을 나타냈다고 하는 전설은 역사적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은 은관 속에 넣어져 보관되어왔다고 하는데, 너무나 소중히 보관되어서 그런지 확인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자원적(自願的)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여기서부터 그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귀중한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찬송가 가운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찬양하는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승리의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2:15)."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공의 상징이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먼저 설명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고야 예수님의 부활이 완전한 부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듯 실제적으로 생생하게 설명해야 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분명한 것인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우리는 이 십자가로부터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가장 귀중한 것으로, 속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바로 속죄 제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기독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 기독론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고, 이해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기독론에 관심이 많아서 프린스턴대학과 풀러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이에 대하여 공부했었습니다. 그 공부를 통해서 초대교회로부터 기독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조금 말씀드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으므로 쉽게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주로 마가복음을 토대로 했습니다. 마가복음이 복음서의 원조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18세기 무렵에 또다시 등장하였으니 곧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무엇을 하셨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 신학자 불트만(Bultmann. Rudolf Karl) 이후에는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이해하려는 신학상의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른바 헬라적 관점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관은 예수님을 빛으로, 선한 목자로, 로고스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히브리서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히브리서가 이해하는 예수님은 한 마디로 속죄제물 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필요한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대하여 마가복음에 의한 이해도 있어야 하고, 요한복음에 의한 이해도 있어야 하며, 히브리서에 의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세 가지의 이해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생애를 토대로 한 이해도 필요하고, 로고스로 오신 예수님, 제물 되신 예수님도 잘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제사장이자 제물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히브리서 9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의 기자는 갈보리 언덕을 성전으로, 지성소로 생각합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로 이해합니다. 우리의 피를 대신하여 바쳐지는 제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절의 이 말씀도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대신 죽는 일이 없이는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지 아니하고는 죄인이 의인처럼 사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히브리 율법의 원리입니다. 이런 까닭에 히브리서는 끝까지 예수님은 죄의 대속을 위하여 바쳐진 하나의 깨끗한 제물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양의 피나 소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피를 제단에 바치셨습니다. 이렇듯 '피는 생명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사랑의 계시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혹독한 고통을 치르시고 십자가 희생을 치르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구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스스로는 죄인인 양 죽으셨습니다. 공의로운 사랑이요 구체적인 사랑이요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는 부활을 참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지셨다,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희생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고백이자, 우리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저토록 이나 사랑하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고, 또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 가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본교회의 십자가를 눈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십자가는 금을 입힌 쇠붙이와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가운데는 금이고, 그 금을 싸고 있는 것이 나무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무는 육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크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보다는 금이 조금 더 큽니다. '말씀''육신'보다 더 큰 것입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육신을 감싼다는 의미에서, 저나름으로는 많이 생각해서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있고 우리의 생명이 있음을 항상 재확인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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