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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하나님3(히브리서 11 : 1 ~ 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도신경은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매주 드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지난 두 시간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 신앙고백의 제 1 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성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믿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신앙고백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모든 신앙고백을 총괄하는 의미가 이 '창조주 하나님'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히 알아나가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항상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창조론(創造論)에 반하는 주장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러한 여러 가지 설(說)을 창조론과 비교하면서부터 창조의 뜻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진화론적 우주관(進化論的宇宙觀)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물질은 있었다, 있었던 물질이 긴 세월을 두고 형태만 점진적으로 발전적으로 변해왔다고 보는 것이 이른바 진화론적 우주관입니다. 이는 헬라사람들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입니다.
건축가가 이미 있는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듯이 하나님께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로 천지를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즉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을 형태와 양상만 다르게 조형(造形)한 것이라고, 그러므로 질(質)은 본디 있던 그대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사람들의 우주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어디까지나 무(無)에서 유(有)를, 즉 '창조'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적 견지에서는 물질에서 물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질이 변해서 또다른 물질로 바꾸어졌을 뿐입니다. 즉 유(有)에서 유(有)가 나온 것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같은 자연발생적 우주관(自然發生的宇宙觀)에서 보면 천지는 원인이 없이 우연하게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그리고 생존경쟁,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과정을 수없이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자연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인격이 먼저 있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있기 전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인격이 있어서 그 인격으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먼저 계시고 그에 의하여 보이는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를 보면 진화론은 있는데 창조론이 없습니다. 마치 진화론만이 과학적 이론인 양 내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무식한 소치라 하겠습니다. 진화론을 진리로 생각한 것은 인지(人知)가 덜 틔었던 옛날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자연과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마는 자연과학계의 논문을 많이 읽어본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함에 따라 날이 갈수록 창조론이야말로 과학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는 우리 교계에서도 창조론을 교과서에 반영시키도록 문교당국에 건의하고 있으며, 수년 전에 창립된「창조과학회」에서도 다방면에 걸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터입니다.「창조과학회」는 '창조'의 진리됨을 깨달은 자연과학자들의 모임입니다. 일찍부터 자연과학을 전공하여 선진 외국에도 나가 공부했으며 '진화론'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많은 연구를 하고 돌아온 세계적인 석학들입니다. 말하자면 어느 누구보다도 이른바 '과학적'인 입장에 서서 '진화론'을 옹호할 것 같은 분들인데, 오히려 일견 아이러닉하게도 '창조론'이야말로 과학적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고자 애쓰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 학회에서 내놓은 책들, 이를테면「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창조는 과학적인 사실인가」등의 책자만 해도 진화론의 비과학성과 창조론의 과학성을 알게 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렇듯, 과학이 깊이 발전하면 할수록 창조의 신비가 더더욱 '과학적'이라는 신뢰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적 추세이거늘 우리네 문교당국에서는 아직도 진화론만을 교과서에 싣고 있는 뒤떨어짐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진화론도 하나의 학설이니 그것은 그것대로 싣되 창조론을 마땅히 교과서에 다루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하여 진화론은 자연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확실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라고 구차하게 비약 설명하는 황당무계한 이론이 진화론입니다. 저는 진화론에 대한 의문 때문에 신학 공부를 할 때부터 그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책들 가운데 '세 번을 비약하지 않고는 진화론을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미 있는 것에서 변화해왔다고 하는 진화론에서는, 그렇다면 이미 있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즉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사실을 '진화'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로 넘어가는 단계를 비약해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무기체에서 유기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진화'로는 역시 설명할 수가 없으니 비약해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유기체에서 인격체로 넘어오는 과정을 진화론적 이론으로는 도저히 규명할 수가 없어서 또다시 무책임하게 얼렁뚱땅 비약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3단계의 비약이 없이는 진화론을 설명해낼 천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일종의 미신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설명, 규명, 증거를 할 수가 없으니 비약을 하는 것이요, 비약이 없이는 설명을 할 수 없으니 '미신'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과학적'이요 '자연과학적'이라 한다면 '비약'의 단계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과학적이니 비과학적이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와 높은 차원에서 진화론적 우주관과 창조론적 우주관을 대비하여 살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적 우주관은 목적이 없습니다. 유물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습니다. 과거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듯이 미래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을 거치고 거쳐 오늘이 있어온 것과 같이 미래도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할 뿐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목적이 없이, 마치 키가 없고 돛대도 없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에 나온 것과 같다는 이론이 진화론적 우주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가 생성된 데는 목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목적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진리는 그 목적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마지막 심판을 밝히 보여줍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샤르댕과 같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적 관계를 되도록 화해시켜보고자 시도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샤르댕(Chardin, P.T.)은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신학 체계를 다 세우지 못하고 만 아쉬움이 있습니다마는「현상으로서의 인간」이라고 하는 저서에서 일종의 종교적․진화론적 문명론을 개진하고 있거니와, 이렇듯 진화론을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 가운데는 창조의 진리를 설명하는 데에 진화론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창세기 1장을 히브리 원문으로 상고하면서 창조설에 아주 오묘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거기에는 '창조'의 뜻인 '바라'라고 하는 단어가 동사로 세 번 나옵니다. 1절의 "천지를 창조하시니"의 '창조'와 21절에서 보는바 동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의 창조, 그리고 27절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의 '창조'-이렇게 세 번 나오는 것입니다. 첫번째의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로의 비약이요, 두 번째 창조는 무기체에서 유기체로의 비약이며, 세 번째 창조는 유기체에서 인격체로의 비약인데, 진화론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이 세 단계의 비약에 성경은 이미 '바라'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 영어로는 바로 'create' 입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낳는 '창조'인 것입니다. 이렇듯 무에서 유를 말할 때에는 성경은 꼭 '바라'로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에는 이 '바라'라는 말 외에도 만든다는 뜻의 '아샤'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make'에 해당하는 말이 '아샤'입니다.
성경을 유념하여 읽어보면 '창조'라는 말과 '만들다'라는 말이 구별되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는 천지를 지으실 때와 동물을 지으실 때, 그리고 사람을 지으실 때에만 쓰였고, 그밖에는 전부 '만드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이후로 이미 있게 된 재료들을 써서 단계적으로 만들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이렇듯 오묘합니다. 성경은 진화론과 무관합니다. 진화론이 세상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진화론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조차 신비롭고도 오묘하게 단계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말끝마다 과학을 운위하는 사람들은 말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에는 창조가 세 단계 있고 그 나머지는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하늘'이라는 말은 단순히 푸른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invisible world), 곧 영계(靈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땅'은 단순히 뭍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세계 전반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하늘 위의 하늘'과 '하늘 아래 하늘'로 갈라 말씀하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 천사의 세계, 영의 세계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보이는 세계, 물질의 세계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은 유한하고 정신은 무한하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를 부인합니다.「타임」지와 같은 잡지의 과학란만 보아도 재미있는 논문이 많이 게재됩니다. 그런 논문들만 보아도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인 이 우주가 무한하다고 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숫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천체 망원경이 발달할수록 한정이 없이 관찰되고 있는 것입니다. 몇억, 몇 백억, 몇 천억…… 갈수록 더 많이 관찰됩니다. 한마디로 무한한 것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망원경이 생겨난다 해도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다 볼 수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미세한 세계도 그 끝을 볼 수 없습니다.
원자니 전자니 하지만 그보다 더 미세한 것이 끝도 없이 발견될 뿐더러 아무리 놀라운 과학 기기가 발달한다 해도 우리의 육안으로는 그 궁극에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양극의 안 보이는 세계는 빼고 그 중간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소리도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에 오르간이 있습니다. 이 오르간이 내는 소리는 특별합니다. 사람의 귀가들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에서부터 가장 낮은 음까지를 낼 수 있는 것이 오르간의 특징입니다. 피아노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저음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론상으로는 16사이클까지 낼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의 귀가들을 수 있는 최저 한계 음입니다. 사람의 귀는 16사이클 아래의 저음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은 가청한계(可聽限界)를 넘는 고음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만약 지구가 돌아가는 엄청난 크기의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의 고막은 터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소리도 양극 사이의 중간 음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만질 수 있는 것에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릇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다 이렇듯 한계가 있습니다. 무한과 무한 사이의 하찮은 유한 세계만을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는 게 고작인 우리 인간인데, 그 체험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오만불손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가늠 못할 창조의 역사 앞에 우리는 마땅히 숙연해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 하나를 지으셨을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여, 기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히브리말 '와이야르 엘로 힘 키트'에서 '키트'라고 하는 말은 참 귀한 말입니다. '아름답게 보셨다' '좋게 보셨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낙천주의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근원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종말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깊이에서 볼 때에 세계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전쟁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다 해서 세상을 노랗게 볼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아름다움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히브리인 자연과학자들은 전자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거기 보이는 자연의 오묘함에 경탄하여 '할렐루야'를 외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눈(雪)의 결정(結晶)은 그림으로도 많이 보셨을줄 압니다. 아무렇게나 빚어져 되는대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흰눈이지만 그 결정이 얼마나 오묘한 질서로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는지, 탄성을 지르다말고 오히려 숙연해질 정도입니다. 자연의 세계, 그 질서, 그 이치,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로운지 사람의 필설로는 형언이 안 되는 것입니다. 병원의 의사들은 사람의 몸이 참 오묘하다는 소리를 자주 합니다. 수술하고 나왔다면서 한숨 돌리는 의사선생님을 보면 저는 일부러 짓궂은 농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되는대로 얼렁뚱땅 꿰매놓았겠지 뭐." 이렇게 말하고 웃을라치면 의사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그게 참 오묘하단 말이에요. 그저 바느질하듯 적당히 쳐놓는데도 잘 듣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잘 들어 붙는 것이 사람의 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술하고 나서 적당히 맞붙여 꿰매놓는데도 힘줄과 힘줄이, 핏줄과 핏줄이, 근육과 근육이 저절로 가고 오면서 연결되어 원상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옷가지 하나라도 어느 바느질인들 그렇게 적당히 해 가지고 되나요? 깃을 맞추고 결을 맞추고 아구를 맞추고…… 빈틈없이 재고 맞추어서 꼼꼼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바느질을 하고 나면 풀을 먹인다 눌러준다 다듬이질을 한다 다림질을 한다 하고 얼마나 손이 많이 갑니까? 그런데 째고 수술을 한 사람의 살은 의사가 그저 바느질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고 말았는데도 원상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질서를 되찾게 된 것은 의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정신의 세계만이 아니라 물질의 세계도, 육신의 세계도, 모든 것이 구속받은 자의 눈으로,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낙천관입니다.
간혹 생명을 하나의 프로세스(process)로 보려 하는 억지가 있습니다. 생명은 과정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사이클의, 윤회(輪廻)의 한 과정이다-라고,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이런 사상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생명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과정이 아니라 창조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에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은 책임자로 지음 받았습니다.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여기에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복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흔히 '스무고개' 같은 문답을 할 때 보면 광물성, 식물성, 동물성 운운하다가 '인간은 동물성이다'라고 대답합디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어떻게 동물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복합체입니다. 사람의 몸에는 광물성도 있고, 동물성도 있고, 식물성도 있습니다. 인간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의 몸을 빚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흙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흙에서 살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신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여기, 지으셨다는 것은 '바라(창조)'가 아니라 '아샤(만드심)'입니다. 이 일은 '창조'라 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지으시고(아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바라)하신 것입니다(창 1:27). 인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장례식에서 흙에서 나고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살다가 흙으로 돌아간 사람, 관속에 안치된 사람을 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주검은 사람이 아닙니다. 유해(遺骸)일 뿐입니다. 사람이 남기고 간 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몸뚱이가 아닙니다.
몸은 만들어진 것이요, 사람은 창조된 것입니다.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이 창세기 1장이 그 원리를 말씀해줍니다. 몸은 이미 있던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진' 부분입니다. 그러나 창조된 부분인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직접 부여받은 생명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라는 것도 참 오묘합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드셨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솜씨 좀 보십시오. 처음 것보다는 그 다음 것을 더 잘 만드셨어요. 그래서 그런 것인지 여자가 좀더 부드럽게, 좀더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 마지막 작품이 여자입니다. 마지막 작품이어서 예술가들이 즐겨 찬탄하는 소리마따나 '아름다움의 극치'인 것인지, 아무튼 여자는 남자보다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라는 피조물도 역시 그 몸은 만들어진 것이요, 생명은 창조된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그 만들어진 부분은 다르되 창조된 부분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인간의 가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동물성을 지녔습니다. 동물적 본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입니다. 창조된 부분이 있어서 비로소 '인간'인 것입니다.
일생을 진화론자로 살다가 늘그막에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수필 가운데, 당자는 심각한데도 읽는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가끔 동물원에 구경을 가는데, 회개하기 전에 동물을 보던 기분과 회개하고 나서 동물을 보는 기분이 다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진화론에 몰두해 있을 때에는 원숭이를 보면 '저 원숭이님이 나의 16대조 할아버지쯤 되실까'하고 생각하니 기가 막히곤 했었는데, 회개하고 나서는 창조론을 믿게 되니까 '나는 저놈들과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다'하고 긍지를 가지게 되어 마음이 놓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창조의 신앙에서부터 인간의 인간된 가치가 주어집니다. 또한 창조의 신앙은 우리의 본질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창조론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내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즉 나는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나날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생명 주심을 감사할 것이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피조물 된 인간이 취할 바른 삶의 자세이며 예배자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의 기본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인데, 창조론에서 이미 그 싹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창조하신 만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다스리라"하셨는데 잘 다스리지 못해서 세상을 이토록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간에게는 만물을 다스릴 책임이 있고 의무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살 때에 동물도 바로 되고 만물이 주어진 질서를 유지합니다.
어렸을 적에 겨울날 눈이 오고 나서 한 이틀쯤 지나고 나면 동네 장정들이 "노루사냥 가자" "토끼 잡으러 가자"하고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산으로 올라가곤 했는데 저도 열심히 따라다녔었습니다. 이렇게 짐승을 잡자고 쳐들어가는 광경만 보고 자랐는데, 뒷날 미국의 미시간주에 갔을 때에 보니, 그곳 사람들은 겨울이 되어 눈이 오면 동네사람들이 모두들 나와서 눈 위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곡식을 뿌려두는 것이었습니다. 산이 눈으로 덮이면 새들을 비롯한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으러 어슬렁어슬렁 마을로 내려오게 되는데 그들은 이런 동물들을 잡으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열심히 곡식 먹는 것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죽이나 배가 고팠을꼬?"하면서 말입니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눈이 쌓여서 짐승들이 먹을 것을 못 구하니 배가 고플 것이고 눈 속이라 제대로 달리지도 못할 것이다, 때는 이때다, 잡으러 가자'하는 사람들과 '눈이 이렇게 왔으니 산에 사는 길짐승 날짐승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배가 고플 것이다, 우리가 먹을 것을 주자'-이렇게까지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들과, 그 자세는 땅과 하늘의 차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바로 되고 보면 동물의 세계까지 혜택을 입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2절은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사람이 바로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물을 바로 다스린다면 만물이 사람의 혜택을 입어서 심지어는 식물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데, 그렇지를 못함으로 피조물이 다 탄식하며 고통 한다 함입니다.
창조의 교리는,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역사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엄숙한 고백 안에서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장되어주심으로 우리는 그 배 안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주인 없는 배, 방향 없는 항해라면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잠시 깜빡하는 사이에도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의연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에까지 진행하여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되어 끝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어느 영국사람이 쓴 책에 "지구여, 스톱. 나 좀 내리겠소"라 부르짖는 대목이 있습니다. 지구가 너무 흔들리니까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말입니다. 지구라고 하는 탈것이 너무 흔들려 불안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불안하십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지구는 하나님께서 운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오, 심판 주이십니다. 우리는 이 고백 안에서 안도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교리는 우리에게 순간순간 새로운 의미를 줍니다. 창조에 가담된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고, 주인의 기쁨에 함께 참예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 창조의 역사에 동참함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바로 관리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창조의 교리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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