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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10(마태복음 25 : 14 ~ 3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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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10(마태복음 25 : 14 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저 앞에 있을 심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심판이 있음을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의 결론으로 하고 있습니다. 때로 '예수님은 자비하신 분이요 사랑의 주님이신데 어떻게 심판의 주가 되실 수 있을까'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랑의 주님, 말구유에 오셨던 그 주님께서 심판 주 되심은 참으로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일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먼저, 심판에 대하여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행한 대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우주의 이치요 법칙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심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적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흔히 기독교를 가리켜 도덕적 종교라고 말합니다. 간혹 기복적(祈福的) 종교라느니 하고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 고치려고, 잘살려고, 사업에 성공하려고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기독교에 그러한 기복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것을 기독교의 본질인 양 알아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입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복이 떨어지리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이루어 달라고 기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하고 주술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실 때에는 반드시 도덕적인 통로를 통하여 주십니다. 복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된 자로 만들어 복된 길을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이를테면 올 농사가 아주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농사도 짓지 않고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까? 수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또한 내게 건강을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당신의 지혜를 주시고 우리를 부지런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풍년을 주신 것입니다. 학생으로 말해도 그렇습니다. 커닝을 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습니다마는, 그것이 복입니까? 커닝을 했는데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할 것입니까? 뒷문으로 진학하는 것도 복이겠느냐 그 말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시고, 인내력을 주시고, 열심을 주시고, 총명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그래서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인이 더 잘살고 못된 사람이 출세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깐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심판 받는다고 하면 매맞는 것부터 생각하게 됩니다만 심판을 받아야 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려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험날짜가 발표되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아이쿠, 또 낙제하겠구나'라고 지레 포기를 합니다.

왜 우등생 될 생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두운 쪽으로만 생각하려드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옥 갈 걱정부터 하고 앉았습니다. 심판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심판은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자 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하려 하심입니다.

심판이 있어야만 이렇듯 억울하게 산 사람들이 능욕을 벗을 수 있고 또 마땅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제 불의한 가운데서도 잘산 사람, 완전범죄에 가깝도록 잘 넘어간 사람은 온전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완전범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사람을 속여넘긴 잔재주가 통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에 적합한 예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려놓았습니다 마는,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을 할 때에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보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뽑아버려야 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주인은 가만두라고 합니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다가 먼저 거두어 불살라버리라고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모든 부조리함과 모순이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현재는 악인이 잘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 정말로 잘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생각할 때에 우선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종말론적 심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적 심판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심판이 있습니다. 전부 드러나고 있습니다. 역시 죄지은 자는 망하게 마련입니다. 몇 시간, 며칠, 몇 년 후에는 다 알게 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도덕이 행사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mystery)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죄인은 그 죄대로 당연한 보응(報應)을 받았습니다.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것 같아도 마음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남 억울하게 하고 잘사는듯이 보였던 사람은 속이 썩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남이 모르는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늘도 무서운 심판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각을 못한달 뿐, 하나님의 공의는 어떠한 모양으로든 행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인과응보의 원리가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되어 있습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라는 말씀이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저는 종말론적 심판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면 늘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벌써 여러 해 전에타임지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녹음기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녹음기라는 것 때문에 설교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대로 녹음을 해서 카세트 테이프로도 나가고 방송으로도 나갑니다. 잘한 것이 나가면 괜찮습니다 마는, 실수한 것까지 그대로 나가서 문제입니다. 기침하는 소리하며 말 더듬는 것까지 나갑니다. 그러나 할수없는 일입니다. 또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안한 말이 나가는 것은 아니니 별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녹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지 모릅니다.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과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예견한 것 가운데 녹음 기술에 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 한 말뿐만 아니라 어제 한 말도 되살려 녹음기에 옮겨놓을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답니다. 이 연구가 발전하게 되면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신 것도 녹음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과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저마다 자기만이 가지는 특별한 사이클(cycle)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적이고 전자공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추적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흩어져도 개는 자기 주인의 냄새를 맡고 따라갑니다. 주인이 지나간 지 사흘이 지나도 그 냄새를 따라갑니다. 그것으로 추적이 가능한 것입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따라갔다는 개도 있습니다.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서 코로 맡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는 말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을 녹음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렇듯 엄청난 생각을 현실로 옮겨놓을 수 있다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모든 언행을 기억하시고 계시겠습니까? 이 세상이 끝난 다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일생동안 지내온 바를 심판 받는다는 것을 누가 감히 못 믿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시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심판을 이해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주로 오셨고 동시에 심판주로 오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우리는 다같이 그 어린양의 보좌 앞에 나타나야 한다고 로마서 216절은 말씀합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우리는 다같이 주님의 보좌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시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들의 개인적인 삶은 단순한 수명이 아니라 장차 주님 앞에 결산할 것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장차 영원한 삶을 어떻게 살게 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대를,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시각각 구원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만을 보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밤이 깊어진다는 것은 곧 새벽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두움을 보고 빛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이 지닐 세계관입니다. 빛을 보고야 빛을 생각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가 아닙니다. 점점 어두워지고 어려워지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 것, 이러한 역설적 신앙을 가지는 것이 지혜요 위대한 신앙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빛 가운데 살듯이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로마서 1313절에서는 이에 대하여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이 어두움 속에서 앞에 있는 빛을 의식하고, 빛 안에 사는 모습으로 단정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빛이 온 뒤에야 단정히 하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어두운 중이지만 빛과 같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현재는 캄캄하지만 우리의 눈은 미래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앞에 서 있을 그때를 생각하면서 단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비유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다같이 진실한 중에 진실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짓 속에서 진실하고, 불의한 가운데서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어두움 속은 혼돈상태이다가 갑자기 빛이 들어오면 크고 작은 부끄러움과 더러움이 죄다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는 그 같은 심판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 앞에서 미리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미리 심판하면 회개가 되지만 내가 미리 심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지적하게 되면 이것은 심판이 됩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사랑이 많으신 그 예수님께서 어떻게 만민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에서와 같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서운 분으로 변신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났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면서 까지 공의를 실현하시고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인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요 예표 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주 되심을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심판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마는, 이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것에 촛점을 맞추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속에 나타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주가 되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상고해볼 것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30)"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유익한 것은 두고 무익한 것은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게으르고 쓸모 없는 것은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다시 말해서 의로운 사람까지 다 쓸어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3절에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 고깃덩이만 남아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장사지낸 것이 그 홍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심판이란 필요 없는 것을 잘라버리신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136절로 9절에 보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요샛말로 '정화작업'입니다. 생사람 죽이는 것을 심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죽은 것을 쓸어버리는 것이 심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을 쓸어버릴 뿐입니다. 열매 있는 나무를 찍어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심판을 특별하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심판의 기준을 인간의 행위에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좀더 읽어나가보면 염소와 양의 비유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하시는가를 보십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25:42, 4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저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그러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이웃의 절대적 빈곤, 어려운 사정을 돌아보지 않은 것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도적질했다거나 하는 것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지 아니한 것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높은 차원의 심판 기준입니다. 나는 도둑질하지 않았다, 살인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이것만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한 죄가 있습니다. 도와주지 아니한 죄가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본체만체하면 살인입니다. 긍휼이 없는 것이 죄목이 됨을 잊지 말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부자가 나사로에게 드러나게 해코지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부자가 크게 악한 일을 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죄가 됩니다. 나는 못 할 짓을 하지 않았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이것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부자의 죄는 바로 나사로를 돕지 아니한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지 아니한 것----이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한 죄, 곧 죄의 원인을 제공한 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6절 이하를 보십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내가 직접 죄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에게 죄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로 죄짓게 한 죄----이것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크지도 많지도 않은 내 이익을 위하여 남까지 예수 못 믿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가 본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러 왔는데 참 대단한 사람입디다. 핸드백을 사는 모양인데, 이것 보자 저것 보자, 너무 비싸다 어떻다 하면서 20여개를 끌어내어 죽 늘어놓고 보더니 결국에는 안 사고 나가버립디다. 그러자 그 주인, 내가 목사인 줄 모르고는 큰 소리로 투덜거립니다. "저런 인간이 예수를 믿으니 내가 어떻게 교회엘 나가노? 저런 인간이 어떻게 집사야!" 내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여러분, 손해 좀 봐가며 사십시다. 깎아달라 더 달라 하고 콩나물 몇 가닥 더 얹어 오겠다고 실랑이하느라 예수님 욕되게 하지 맙시다. 전도 길 막지 맙시다. 그러한 행위도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 또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심판에는 업적이 통하지 않습니다. 직업적인 교인이라도 다 통하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721절을 보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소리가 아무리 높아도 입으로만 그러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7:22)"-그러나 이미 천국 문은 닫히고 안에서 말씀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 저는 이 장면을 놓고 한번 짓궂게 생각해보았습니다. 끝까지 매달려서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까? "주여, 들어가게 해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나이다." 병을 고쳤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병을 고쳤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업적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안에 계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내 이름으로 병을 고쳤다면 네가 고친 것이 아니라 내가 고친 것이다. 네가 무엇을 했다고 이리도 소란이냐?"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목사 되고 장로 된 것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목사다 장로다 집사다 하는 직분이 곧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에는 명예니 업적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내가 내 것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사람이어야만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속속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가고 오는 것, 행하는 것을 죄다 밝히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12:36)." 무익한 말, 생각 없이 농담 삼아 내뱉는 말도 심판을 받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7)"하셨습니다.

내가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내놓는 말마디 하나라도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이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누가복음 1415절로 25절에 왕의 천국잔치 비유가 있습니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배설해놓고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청합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자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초청에 응하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오라고 할 때에는 너그러웠던 왕의 그 마음이 오지 않으니까 가차없이 징계를 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럴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 거절을 당합니다. 나의 사랑이 배신당하고 거절당하는 것처럼 마음 아픈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천국잔치 초청을 거절하다니, 죄 중에서도 큰 죄입니다. "예수 믿읍시다." 거절합니다. "교회 가십시다." 거절합니다. 이렇듯 복음을 거절하고 용서를 거부하는 것, 은혜를 마다하고 핑계를 대는 것이 심판에 걸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12:8, 9)"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충성하며 말로 충성하며 행위로 충성할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그리스도인 된 신분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한국 교회는 일단 거부를 했으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이때 신사참배에 앞장선 사람들은 '국민의례인데 어떤가, 그저 머리만 한번 꾸벅하면 될 것을'하면서 신사참배 여부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우상 앞에 어떻게 절을 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거부하다가 순교까지 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세상 앞에서 분명한 크리스찬의 자세로 살아갈 것입니다. 식당이든 길거리이든 어디에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 "내가 그리스도인이오"하고 나섬으로써 때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감추거나 속이고 나선다면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되며, 이 또한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잘 믿던 사람인데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서는 안 믿는 양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수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나는 그리스도인이오"하고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청년이 군에 입대하면서 작은 성경책 한 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배속된 부대의 선임하사가 불교인이라서 그런지 그가 가진 성경책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아 합니다. 하루는 상사가 그를 불러놓고 묻습니다. "너 그리스도인이냐?" ", 그렇습니다." 대답하자마자 주먹이 날아옵니다. "나는 불교인입니다 라고 말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주먹이 날아옵니다. "이 자식, 불교인이라고 말하지 못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주먹이 날아옵니다. 이러기를 스물 일곱 차례나 되풀이했습니다.

마침내 백기를 든 것은 선임하사 쪽이었습니다. "지독한 녀석! 좋다. 너는 성경책 가지고 다녀." 선임하사는 이렇게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규정 밖의 개인 소지품을 다 빼앗겼으나 그 청년은 스물 일곱 번 얻어맞은 댓가로 성경책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를 가지고 살자면 이렇듯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인가?"하고 비난을 받습니다.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하리라'-비밀 교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언제든지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실히 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또한, 물질 씀씀이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내 돈 내가 썼는데 무슨 상관이야?"-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16절 이하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많은 재물을 모은 이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써야 할 일에, 바쳐야 할 일에 재물을 쓰지 않고 쌓아두는 데만 열중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고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하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을 때에 남겨둔 재물이 많으면 좋은 심판 받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유서부터 써놓고 다니십시오.

그래야 어떻게 되든 청산될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유산 처리를 잘 못합니다. 서양사람들의 경우, 보통 때에는 교회에 헌금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만큼 열심히 헌금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헌금으로 치자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마는, 제대로 알고 보면 어림도 없습니다. 푼돈은 잘 내는데, 큰돈은 내놓지 못합니다. 반면에 서양사람들은 푼돈은 잘 안내지만 죽을 때에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몽땅 바칩니다. 그런 유산을 받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에는 늘 돈이 넉넉합니다. 고아원도 학교도 그런 돈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푼돈을 내놓고 큰돈을 땅속에 묻어버리므로 나중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여러분, 누가 잘 믿는 것입니까? 나는 잘 믿는다, 나만큼만 믿어라-이렇게 말할 자신 있습니까? 마지막 유산 처리에 실수가 있으면 헛 믿은 것입니다.

스코틀란드에 한 노랭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장로였던 그는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에게도 전혀 용돈을 주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않으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아무튼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교회에 아주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이런 노랭이 영감도 있구나" 했습니다. 또 그가 죽었을 때에는 "불쌍도 하지, 그 많은 돈을 두고도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아니하고 죽어버리다니……"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시신을 옮기는데 베개 밑에서 유서가 나왔습니다. 자녀들이 모여서 펼쳐봅니다. 유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나의 모든 유산을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에게 돌린다.'여러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드러나게 죄지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재물을 땅에는 쌓아놓고 하늘나라에는 쌓아놓지 않았습니다. 써야 할 일에 쓰지 않은 것이 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다. '나는 돈을 어떻게 썼는가?' 액수는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을 위하여 쓴 것, 자식을 위하여 쓴 것, 나를 위하여 쓴 것, 어느 쪽이 더 큽니까? 나를 위해서는 큰돈을 쓰고 부모님을 위해서는 푼돈 쓰기에도 벌벌 떨지는 않았습니까? 더욱이 교회를 위해서는 잔돈을 고르느라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지갑에 만 원짜리만 들어 있으면 '아차, 내가 왜 잔돈을 준비하지 않았던가?'하고 안타까워한 적은 없습니까? 만 원짜리 한번 내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될 일입니다.

어느 군인이 미국에 훈련을 받으러 갔습니다. 보니 동료들이 주중에는 훈련을 받고 주일이면 모두들 교회에 갑니다. 이 사람도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따라가 보았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헌금대가 주욱 돌아갑니다. 얼마를 내야 할지 몰라서 참으로 난감합니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5달러 짜리가 하나 잡힙니다. '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내자니 아깝고 안내자니 체면이 깎일 것 같습니다. 헌금대는 여전히 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헌금대가 주머니로 되어 있지만 미국은 세숫대야처럼 생긴 은그릇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헌금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헌금대가 이 사람 앞에 왔습니다.

아깝지만 하는 수 없이 5달러 짜리를 내고 다음 사람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가 얼마를 내는지 눈여겨봅니다. 그 역시 5달러를 냅니다. ', 5달러가 기준인가 보구나, 내가 제대로 했구나'하고 돌아보니 웬걸, 그 친구가 4달러를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람은 아뿔사 하고 머리를 칩니다. 이 사람이 헌금을 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물질 씀씀이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헌금을 하더라도 꺼림칙하게 말 것이요, 봉사를 하더라도 봉사답게 할 것입니다.

끝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누가복음 13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죄짓는 것이 심판 받아야 하겠지만, 회개하지 아니한 것은 더 큰 심판에 이르는 죄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 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 준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에 준하여 그리스도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았다면, 세상에서 못 다 받은 것, 억울함을 당한 것,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생한 것, 순교한 것, 그 모든 것의 보상을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났던 것에 대해서는 무서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고백의 결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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