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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건축자(고린도전서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텅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 스스로 지혜로운 건축자로 비유하고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을 한 제자는 아닙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부름을 받은 것도 아니며,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다니면서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여정인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와 사도의 길을 가데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뒤늦게 사도가 된 바울 사도이었으나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기독교를 가장 분명하고 체계 있게 이해한 사람은 사도 바울 이상의 인물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기에 신약 성경을 보아도 무려 절반이나 되는 분량이 사도 바울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방의 많은 교회들이 주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업적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 있게 설명해 주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복잡한 제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는 고린도서 등, 그의 서신은 우리에게 목회자로서, 교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세세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나고 있는 기독론, 교회론, 신론, 성령론, 예정론 등은 참으로 심오한 말씀으로 예수님의 뜻을 잘 설명해 주는 내용들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는 마치 마태복음 7:24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건축자의 비유에 이어지는 속편과도 같은 말씀으로 들려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의 긴 말씀을 하신 다음 그 마지막에 가서 건축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며, 반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다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축에 대한 요지는 오직 하나 그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건축 자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거나 집의 크고 작음 등의 그 외형적인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기초 하나만을 조건으로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구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또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건축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해석가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조금이라도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갓 상상일 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라는 내용의 속편으로 이어지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며 건축에 있어서 기초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음에 있어서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계로 집을 짓는다 하더라도 기초를 튼튼히 하지 못하면 그 집은 무너지는 것이며, 이는 고층 건물일수록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고 높은 집일수록 기초가 튼튼하고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앞서 9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매우 세밀하게 자기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누구냐라는 문제를 두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따로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각자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교회 생활을 하였다하더라도 은혜 받지 못하고 일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저 겉으로는 꼭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중생하지 못하고 은혜 받지 못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뒤에 가서 자기의 공적을 논하며 불평과 원망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은혜를 거저 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내 공로로 인해 주어지는 어떤 보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요 전혀 자격이 없는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된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 은혜의 힘으로 일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여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란 개별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라면 민족 전체에게 주신 은혜도 있고, 모든 교인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은혜도 있겠습니다마는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 개별적인 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 그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에 대한 감각, 그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며,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 것도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큰 은혜로 감격해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기 위하여 가는 걸음인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하고 불러주신 그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되며, 자기가 받은 이 은혜는 특별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혜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특별히 받은 은혜가 아니면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자라는 감격이 있고서야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명한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성 프랜시스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겸손히 사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의 제자가환상 중에 하늘 나라를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 제자는 아무도 안지 않는 화려한 의자 하나를 보면서 이 의자에는 누가 앉을 것인가를 천사에게 물어 봅니다. 그랬더니 그 천사는 이것은 프랜시스가 앉을 의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이 제자는 그렇다면 왜 프랜시스가 이 의자에 앉게 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성 프랜시스가 가장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환상에서 깨어난 이 제자는 자기의 선생님이긴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 슬그머니 시험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자기의 선생님인 성 프랜시스에게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어보게 되는데, 이 때에 성 프랜시스는 선뜻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내가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는 그것은 위선이라며 설명하기를 선생님은 성자가 아니십니까? 이 세상에는 도둑이나 사기꾼, 살인자들도 많은데 선생님 같은 분이 제일 악하다는 것은 위선이라며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성 프랜시스가 대답하기를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게 주신 특별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주었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거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은 먼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내게 주신 이 큰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준다면 그들은 더 좋은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은혜는 특별한 것이므로 거기에 따르는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터를 닦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터를 닦는 일은 피곤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증축하면서 보아도 위로 올라 가면서하는 일은 보기에도 좋고 시원시원합니다. 그러나 기초 공사를 하느라고 땅만 파고 있는 것을 볼 때이면 저것이 언제 끝나려나 싶은 것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피곤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터만 닦는 처지라면 그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일을 맡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는다는 것입니다. 터를 닦는 일은 들어 나는 일이 아닙니다. 저 밑 깊숙한 곳에서 피곤한 일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화려한 손놀림은 없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다 지은 다음에 간판 붙이는 일입니까? 아니면 가위로 테이프를 끊는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은 터를 닦는 일만 맡았다는 생각에서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터만 닦았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연세가 80이 되도록 목회를 하셨으니 위임식 한 번을 못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개척 교회만 하셨기 때문인데, 이 목사님은 교회를 세운 다음 교인이 조금 모이는 정도가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또 개척을 하는 식으로 일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80고령에도 위임식 한번 못해본 목회자! 그렇다고 언제 표창장 한 장을 받아 보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목사님은 "나는 80평생 80교회를 세웠다."며 그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쉬워서 80이지 얼마나 피곤한 일이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말대로 일생 터만 닦다가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교회가 있어서 그의 이름을 높여 주었습니다마는 인간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당대에서는 실로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온갖 비난과 도전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나는 터를 닦는다고 하는 투철한 사명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터 외에 다른 터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복음의 절대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7, 8에 보면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전주를 받을 찌어다."라는 매우 강력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일에서는 양보가 많은 사람입니다 마는 복음, 특별히 그가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일체의 양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 외에 다른 터를 생각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고 할만큼 이 문제에 관한 한 절대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절대화와 확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경우에서도 복음의 문제를 두고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위하여 자기의 생을 걸로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을 쌓음에도 그 기초가 필요합니다. 그 기초는 언제까지나 흔들리지 않는 기반인 영원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의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죄로부터의 구원, 율법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은 바로 그것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인격이라 하여 자기의 의나 공로자를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한 그 위에 신앙과 교회와 그 인격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이, 기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초가 집을 지키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가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를 의지하지 않는 나의 존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닦아둔 터 위에 집을 짓게 되는 건축가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나는 터를 닦고 너희들은 집을 짓는 자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에는 두 가지 사항을 생각하라는 것인데 그 첫째는 "조심할지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닦아둔 이 터는 그야말로 피에 피를 흘리면서 닦은 터이거늘 어떻게 함부로 지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삼가 조심하면서 세워져야할 건물이 바로 세워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고 또한 이 터가 얼마나 소중하게 주어졌는가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자재는 임의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본문은 금과 은, 보석, 그리고 나무와 풀, 짚 등 다양한 자재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온 정성, 온 마음을 다 기울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대조적인 자재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바 대로 금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귀하고 아름답고 견고한 것으로 그 값 또한 비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짚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천하고 초라하며, 그 값이나 수명은 금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섬기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가장 귀한 것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두고 보더라도 새벽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루의 시간 중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미리 깨끗한 돈을 준비해 두었다가 정성된 마음으로 바치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뒷 주머니 속에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돈을 그대로 꺼내어 바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가장 귀한 것으로 정성을 드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금과 은, 보석이라는 말은 어렵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축기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짚이나 풀, 나무로 짓는 집은 매우 손쉽게 지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두막 같은 것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짚으로 짓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콘크리트로 짓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대리석으로 지으려면 더욱 어렵고, 게다가 금으로 지으려한다면 보다 더 많은 정성과 시간, 그리고 많은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도 예수 그리스도를 터 한 그 위에 세워나갈 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좁은 문이라는 것이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금, 은, 보석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형식은 갖추었으되그 내면에 있어야할 것들이 없는 십일조를 책망하시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 수는 맞고 갖출 것은 다 갖추었으되 그 정성과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귀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정성을 드리지 않고 적당히 지어 버리고 마는 집을 바로 짚이나 풀로 짓는 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어 놓으면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그 날에 불로 시험을 하여 각각 그 공력을 판단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제 불을 붙여보아 건물을 판단한다고 하면 짚이나 풀, 나무로 지은 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쉽게 지은 집은 쉽게 불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튼튼한 자재로 오랜 시간 차곡, 차곡 쌓아 올라간 건물은 드려진 정성만큼 오래 오래 남은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좋은 기술에 의해 대 규모의 건물들을 훌륭하게 지어 놓고는 합니다마는 사실 정성을 드리는 면에 있어서는 옛날 어른들을 따르지 못합니다. 저는 워싱턴디시에 갔던 길에 내셔널 슈라인(National Shrine)이라는 예배당을 짓고 있는 현장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공사를 시작한 지가 97년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좀더 공사를 해야만 완공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드렸으면 97년이 걸리고도 아직도남은 일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진정 정성을 다해 짓는 집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성전이라면 오랜 세월, 수백 수천 년을 두고 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는 우리 나라 개신교의 초기 예배당들은 선교 백년이 되기도 전에 다 허물고 새로 지어야만 했습니다. 더러는 이것을 문화재로 그냥 두어야 하느냐? 헐어야 하느냐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겠기에 헐기로 한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상동 교회와 새문안 교회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교파는 다르지만 명동성당은 훨씬 오래 전에 세워졌음에도 예나 오늘이나 꼭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오막살이들만 있던 당시의 진고개에 오늘 우리가 보아도 크고 아름다운 명동성당이 세워졌을 때 얼마나 장관이었겠습니까? 그토록 공력을 들였기에 백년 이백년을 지나면서도 제 구실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지은 공력이 불로 나타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불에 타버릴 것으로 형식적인 건물을 지었으면 그대로 다타버릴 것이겠고 불에 강한 자재들을 사용한 것이라면 잘 견디어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게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긴 세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 얻어진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너무 쉽게 얻어진 신앙은 또한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 등 자기 중심적으로 세워진 인격이나 신앙은 시험이 올 때에 타버리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태리나 로마에 가보신 분들은 800여년 동안이나 무너지지 않고 비스듬히 서있는 피사의 사탑을 보셨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스듬히 서있는 피사의 사탑이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서있는 것에 대하여 의아한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11년에 세워진 이 탑은 피사의 대학생들이 지금까지 그 기울기를 측정한 바에 의하면, 1년에 약 1인치씩 쓰러지고 있어서 언제 꽝하고 쓰러질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쓰러지고 있는 탑이 되었는가 할 때 그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이 탑은 한 사람에 의하여 쌓여진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이 탑을 쌓으려고 했을 때 그 기초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허물어 다시 기초 공사부터 시작하지를 않고 자기의 의무만을 생각하며 잘못된 그 기초 위에 그대로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또다시 그 위에 쌓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대로 기울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초가 잘못된 줄 알았으면 깨끗이 헐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잘못을 알고도 그 위에다 짓는다면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사도 바울은 나는 터를 닦는 자로 내가 닦는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임을 강조하면서 이 터 위에 집을 짓는 자는 각각 그 공력이 들어 날 때가 있을 것이니, 정성을 다해 지으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거두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 인격의 기초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진정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출발된 인격인가? 그리고 어떤 것으로 세우고 있는가? 쉽게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공들여 어렵게 세우고 있는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그 공력에 따라 부끄러움과 영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 인격을 쌓아감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이제라도 헐어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다시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날에 있을 영광과 상급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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