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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의 탕자(누가복음 15:11-2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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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의 탕자(누가복음 15:11-24)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오늘 본문의 탕자 비유는 너무나도 잘 아는 비유입니다. 그 때문에 설교학에서는 웬만하면 탕자의 비유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비유 강해에서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 탕자 비유가 그렇게 유명한 것은 그 내용이 우리의 생활상과 너무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친근감이 우리로 많이 생각하게 하고, 게다가 자주 들음으로 잘 아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말씀은 그렇게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 탕자의 비유 하나 속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이 방법론은 히브리적입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나 합리적 혹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징적인 한 사건을 통하여 비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탕자의 비유가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다른 비유들의 초점은 보통 하나인 것에 비해 이 비유는 그 초점이 셋이나 됩니다. 그 첫째가 탕자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아버지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둘째번 탕자인 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탕자가 이방인이라면, 두 번째 탕자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귀한 진리가 이 비유를 통하여 폭넓게, 그리고 깊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우수하고 중요한 비유가 됩니다.

본 비유의 배경은 이미 앞에서의 두 비유를 위해 설명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본 비유 역시 누가복음 15 : 12의 말씀을 그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어쨌든 버려진 자가 돌아오며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씩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일인가를 강조하시는 말씀으로 한 마리의 잃은 양, 하나의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는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까지 하시게됩니다.

오늘 본문의 소재는 너무도 잘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속입니다. 이것은 또한 동양 사람들의 이야기로 우리들로서도 흔히 겪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지금도 아버지의 재산이 반드시 아들의 것이 된다는 보증이 없습니다. 비록 아들이 하나뿐이라 하더라도 다소 얼마를 주거나 자동차라도 한 대 사주면 다행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권적 가정 풍속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대가족 제도 하에 생활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 재산은 의례 그 아들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동양적인 가정을 배경으로 하여 두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갖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유산이란 부모가 세상을 떠나야 나누어 가지게됩니다만, 대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분배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통속적인 규례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게됩니다. 신명기 21 : 17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아들이 그 유산을 분배받을 수 있는 기준은 아들이 둘이라면 형이 를 받고, 동생은 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동생은 형의 절반을 유산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자동적으로 나누어 갖게되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도 아버지가 미리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가 보기에 저 아들은 불량한 불효자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유산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잠언 172절에 있는 말씀처럼, 종도 슬기롭게 잘하였으면 아들들만큼 많이 주지는 않겠지만 그 유산의 얼마를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자기의 재산을 통속적인 규례에 따라 분배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자기 살아 생전에 마음대로 유산 처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유산인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들은 대단히 불량한 아들입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줄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것인데, 아버지의 유산을 빼앗는 것처럼 강요해서 얻게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감히 아버지에게 내게 올 몫을 미리 달라며 대드는데 이것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은 아버지의 마음대로 언젠가는 자식에게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어차피 아버지 본인은 세상을 떠나게 될테니까요. 그런데 이 아들은 아직도 건강한 아버지 앞에서 내게 올 몫을 미리 내어놓으라니 참으로 좋지 못한 아들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량한 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아들은 자기는 당당히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기왕에 줄 것 지금 내놓으라며 떼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말싸움을 벌이지도 않고 제지할 자세도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한 마디의 꾸지람도 없이 그저 이 재산을 내어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주지 않으면 나가지는 못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대신 집에 있으면서 아주 못된 불량자가 되겠지요. 아니면 빈손으로라도 나가서 어디서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에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 마음의 초점을 "이 재산은 다 없애도 좋으니 제발 내 아들만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재산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도 재산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 재산을 죽기 전에 내놓으라는 것입니다만, 아버지는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는 이까짓 재산 어차피 네게 갈 것인데 가지고 가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 없애고라도 좋은 아들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나쁜 감정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아버지의 생각에는 재산보다는 아들을 더 사랑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입니다. 내게는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중요하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증명으로, 그 사랑으로, 이 재산을 아들에게 미리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라도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을 그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는 상당한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아들은 재산을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가게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재산을 받은지 며칠이 못되어 재물을 다 모아서는 먼 나라로 떠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까이 있는 것도 싫다는 것입니다. 재산은 좋고, 아버지는 싫고, 더구나 아버지의 간섭은 더욱 싫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부모의 간섭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무관심처럼 무서운 증오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먼 나라로 가버립니다.

다시는 연락이 없을 것처럼 미련 없이 아주 시원한 기분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 같으면 그래도 전화라도 하고 편지를 띄울 수도 있겠지만, 그 옛날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한 번 떠나면 그만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못하고 간섭으로 받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가까이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곳에서 돈 가지고 마음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싫고 재산과 향락만이 그의 추구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멀리 떠나갑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 그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들입니다. 이것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분명 자유가 아닌 방종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권내에, 아버지의 간섭의 권내에, 아버지의 주권의 권내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 영역을 떠나서 방종 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종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방종의 종, 방탕의 종이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에는 정말로 현실적인 종이 되고마는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다 없이한 후"에는 별 수 없이 남의 집 종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 할지라도 돈을 쓰기에만 여념이 없는 이 부잣집 아들의 재산이 언제까지나 남아날 리가 있겠습니까? 돈이란 사실 버는 데서부터 배워야하는 것이지 쓰는 것만 가지고는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모를 때에 자식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 자식을 죽이는 것이라며, 가정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돈의 가치를 모를 때에 돈을 주는 것은 자식을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돈의 가치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돈을 벌어보는 길밖에 없습니다. 땀 흘려서 벌어보아야 이 돈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됩니다. 버는 데에서 알고, 그것을 지키는 데에서 알며, 그 다음에는 쓰는 데에서 그 가치를 압니다.

이 세 가지를 알아야 돈의 필요성도, 돈의 의미도, 그리고 돈의 귀중함도 알게됩니다. 그러므로 돈은 성실히 벌 줄도 알아야하고, 보관하면서 그 가치를 알며 또한 잘 쓸 줄도 알아야합니다. 있는 돈 쓰지 못하면 그것은 수전노요,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쓰임에 있어서도 좋은 일에 쓰면서 그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는 돈 버는 일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보관할 줄도 모릅니다.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쓸 줄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좋은 데 쓸 줄은 모르고, 못된 것에만 쓰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자니 이 사람은 돈 버리고, 몸 버리고, 체통 버리고, 인격 버리고, 인간 버리고, 다 버린 것입니다. 돈과 함께 한 인간을 몽땅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래도 연명은 해야겠으니 그 타국의 어느 집에 일군으로 붙어살면서 들에 나가 돼지를 치게됩니다. 본래 돼지를 치는 일이란 이스라엘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들은 돼지를 기르지도 않을 뿐더러 먹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인 줄 알고는 일부러 돼지를 치게 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지금 이 사람이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민족적인 권위와 관습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방탕하여 가난하고 병들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된 바로 이 시판에는 그 자랑스럽던 이스라엘의 선민권마저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요, 물론 부잣집 아들도 아닙니다. 인격자도 아니요, 청년이란 의미도 없습니다. 완전히 버려진 신분, 버려진 인격이 되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더구나 비참한 것은 흉년이 너무 크게 들어서 돼지를 치면서도 사람이 먹는 양식을 얻어먹지 못하고 돼지가 먹는 그 음식을 먹으면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625를 지난 우리로서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배고프면 무엇이나 다 먹게되어 있고 그 맛 또한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다 맛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무엇을 먹고, 맛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돼지가 먹는 음식을 같이 먹 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들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참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고 진짜 종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마음껏 자유하고 방종하더니 이제는 정말 종으로서도 가장 처절한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스스로 돌이켜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돌이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런가봅니다. 이처럼 죽을 지경이 되어야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술집에 있을 때에는 안 난단 말입니다. 칭찬 받을 때에도, 성공할 때에도 이러한 생각이 나지를 않았는데, 이제 정말 죽을 지경에 이르고 보니 제 정신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질 인간이라고 합니다. 돈이 좀 있을 때에 생각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미국에서 한 빵집에 들렀다가 그 집주인인 교포의 탄식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부부가 거기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분인데 제가 주문한 샌드위치를 갖다놓고는 의자를 당기더니 옆에 앉아 엉엉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인 즉 모 대학 영문학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온다는 생각으로 돈을 좀 모아 가지고 왔는데 그 돈 있을 때에, 집 팔아 가지고 온 돈 있을 그때부터 이렇게 앞치마 두르고 빵장사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체면이 있어서, 그래도 내가 영문학 교수인데, 영어도 좀 하는데 하면서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망설이는 중 다 까먹고 이제는 죽는구나 했답니다. 차마 자살도 못하고 이젠 정말 죽는다 하는 그 순간에 가서야 팔을 걷어붙이고 이렇게 빵집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거듭하는 말이 돈 몇 푼 있을 때에 이 일을 시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며 크게 후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때에 제 정신 차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도 젊었을 때에 말입니다. 다 늙어 가지고 별 볼일 없을 때에 정신을 차리겠다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 때엔 정신 차려봤자 도리가 없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저 겨우 천당갈 정도이지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도 젊음도 없지요, 지식도 돈도 없습니다. 이제 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때문에 눈물만 흘리다가 겨우 천당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천당은 간다지만 참으로 비참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여기 이 사람이 가진 돈 절반이라도 남았을 때에 제 정신을 차렸다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결국은 정 죽을 지경에 이르러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져 앉고 보니 이제서야 생각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그리하여 첫째로 생각나는 것이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죽음의 실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심각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종말적 생각입니다. 인간 종말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시작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아직은 철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죽음, 그리고 나도 죽는다는 사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물음과 요청이 인간 실존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며 죽는다는 사실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아버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하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 조심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나머지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비록 돌이키는 마당이라고는 하지만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며 엉뚱하게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의 이런 점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제 죽음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자기를 생각합니다. 이후로 나는 집에 돌아가더라도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완전히 자격 상실이라는 생각입니다.

지난날 아버지께 재산을 달라며 조를 때에는 당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나는 부잣집 둘째 아들이니 나의 몫을 주어야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나는 자격이 없으며, 설령 집에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제가 아들입니다" 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집 어느 구석에서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그저 품군의 하나로서, 종의 하나로서 남은 생을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들 노릇은 할 수도 못해도 좋으니 아버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지금 이 사람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극한 상황 중에서도 이 사람에게 훌륭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자살을 하지 않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반항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요, 부모님께 대한 반항이며, 자기에 대한 살인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며 그것은 불 신앙의 소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왔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요, 대단한 결단입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체면을 생각하며 이제 와서 감히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느냐는 식으로 나오면 그는 영원히 아버지 집에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죽을 지경에서 무슨 체면이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회개하는 자에게는 체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에 있어 무슨 자격이 있다, 없다 문제되는 것 아닙니다. 그저 그대로 손들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돌아오는 용기! 이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내어보내 놓고는 분명히 거지가 되어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나마나 저애가 가서는 다 없애고 거지가 되어 돌아올터인데 "어쨌든 제발 살아서 돌아만 와다오" 하는 심정으로 기다려온 것입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길목을 바라보며 눈과 목이 지칠 정도로 기다려왔습니다. 그 때문에 저만큼 거리가 먼데도 알아보고 달려간 것입니다.

이는 매일 매일을, 순간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기다렸고 기대했으며 어떤 의미에서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거리가 먼데 벌써 알아보고 측은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히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이 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냐? 심은 대로 거두었구나. 인과보응인데 당연한 것이지" 하며 마음껏 책망하고 채찍이라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여기 이 아버지는 전혀 비판이 없습니다. 한 마디의 묻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감격해할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만약에 이 아버지가 분노하며 이것저것을 물어 책망할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이 아들은 자살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그런 대로 굶어죽고 말았지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아들이 집을 나갈 때에 적어도 그 아버지의 모습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의 마음에 아마 내가 이런 모습이 되어 돌아가면 우리 아버지는 문간에서 만나자마자 때려 죽이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아들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밝히는 중요한 것은 이 아들은 그 아버지를 믿고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처럼 용기 있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는 그의 용기에서보다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준 사랑의 인상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아들이 생각한 대로 아버지는 측은히 여기며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냄새나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로 영접하는 환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들은 율법적으로 나오는 것에 비해 아버지는 은혜로 나옵니다. 아들은 말하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면서 차라리 외양간의 머슴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사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율법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일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이 그러한 말을 더 이상 이어갈 기회를 주지 않고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합니다. 옷은 영광과 신분을 말해줍니다. 아들에게는 아들의 옷이 있고, 주인에게는 주인의 옷이 있습니다. 또한 "가락지를 끼우라"고 하였는데 이는 권세를 말합니다. 이 가락지는 도장을 겸한 것으로 옛날에는 어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권세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신을 신기라"는 것은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노예들에게는 신발이 없었습니다. 주인의 가족들만 신발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신었다는 것은 아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너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큰 즐거움이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조금도 어두운 그림자가 없이 생명을 얻었다는 것에 대한 충만한 기쁨, 그 즐거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아들의 죄스러워하는 이야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너는 자랑스러운 내 아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 이 아버지는 살았다는 것, 그리고 다시 얻었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만약 아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이러지 마십시오. 나에게 차라리 매질을 하든지 책망이라도 크게 해주셔야지 이렇게 대하시면 저의 마음은 더욱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아버지를 말리려 든다면 이 아들은 끝끝내 율법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아들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이 아들은 자기가 이러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습니다만, 그러나 아버지가 이 자격 없는 자를 자격 있게 사랑해주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무지 죄송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지만 아버지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니 염치불구하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잘 모르는 입장에서 율법적 관계로 본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정말 체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구 못지 않게 죄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은혜나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저쪽에서 나를 사랑하면 그만이지 이쪽에서 자격이 있고 없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 받는다면 사랑 받는 줄 알고,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줄 알 것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있건 없건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흔히들 걸핏하면 나갔던 탕자가 돌아왔으니 얼마나 훌륭한가라며 탕자를 영웅시하는데 그럴 것이 아닙니다. 여기 탕자가 잘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용서하시는 아버지! 재산을 다 없애고라도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랑의 아버지! 그러고 보면 이 아버지는 아들이 나갈 때에 오히려 더 큰사랑을 베풀어준 것이기도 합니다. 떠나보내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그리고 기다립니다. 돌아오기 때문에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벌써 용서했으니 돌아만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요,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들은 돌아올 때에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회개할 용기도, 회개할 믿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어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내가 아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처지에서 아들이 되게 하고, 아들 노릇을 할 수 있게, 아들 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도 감격스럽게 그를 영접하기 때문에 이 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다 잊어버린 채 그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믿으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무런 구김살 없이 자기를 아들로 영접해 주시며 다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대로 아들이 됩니다. 당장에 아들이 되고 당당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이것은 탕자의 자기 윤리가 아닙니다. 자기의 도덕 생활, 자기의 선행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전혀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이 탕자의 마음속에 있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아들이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진리가 사람을 구원케 합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으며, 여기에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제는 당당하게 그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와 창기는 죄인의 대표자입니다. 특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사람들이 제일 천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창녀 하면 제일 천하게 보는 직업이라면 직업이고 인격입니다. 이는 몸을 팔아서 산다고 하는 옛날부터 있어온 직업입니다. 그런가하면 세리라는 것은 당시 로마를 위해 강제로 세금을 받아 가는 직업이므로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비애국자요, 폭행자이며 착취자이었기에 이는 허락 받은 강도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리와 창기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히 소외당한 죄인들의 대표자입니다. 모두가 싫어하고 멀리하며 천시하는 이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세리들과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으로 담대하고 용감한, 죽음을 각오한 폭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노라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그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장면들을 두고 슈바이처 같은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아예 '날 죽여라' 하고 다니셨다"라는 표현까지 하고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혀 일리가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의 사회 구조와 관습이 어떤 때이라고 감히 이런 말을 하고서 살아남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이며 "아멘" 해놓고 가지 않는 위선과 외식의 종교 지도자들, 이들은 결국 이중적인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세리와 창기들은 벌써부터 죄인이요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며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막달라 마리아나 세리 마태가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너희들은 아직도 위선과 형식으로 굳어진 "아니오" 상태에 있지만. 너희들이 그렇게도 멸시하는 세리와 창기는 뒤늦게나마 철저히 뉘우치고 "" 하고 갔으니 당연히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신학적인 다른 의미에서 구분한다면, 맏아들은 유대 사람을 뜻하며, 둘째 아들은 이방 사람을 의미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 않았으며 종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유롭게 죄를 지으며 온갖 우상을 섬겨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으니 구원은 바로 이 이방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안가겠다고 하였으며 반항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뉘우치고 갑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처럼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온 아들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맞아주지 않는다면 문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복음은 언제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돌아와서 일하는 흉내라도 내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안가겠다고 반항하며 무척이도 마음 아프게 했는데 이제 찾아온다고 그렇게 쉽게 받아줄 수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아버지의 권위를 찾기 위해서라도 특별한 조처가 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기뻐하며 영접합니다. "돌아왔느냐! 잘했다. 지난 일은 잊어버려라"고 할 뿐 과거를 묻거나 뉘우치라는 권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에스겔 18:21,22 말씀에 보면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과거는 묻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물어야하고 책망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묻지 않겠고 책망도 아니하시겠답니다. 그리고 영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나온 그것만을 의로 여기시고 이제 후로는 의롭다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은 안가겠다고 반항하던 아들의 태도를 본래적이 아닌 실수나 병리적 반응으로 간주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였을 뿐,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일하는 이 시간을 출발로 그의 진실된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잊어버린 과거를 내가 왜 기억하며 고통스러워합니까? 하나님이 묻지 않는 과거를 무엇 때문에 내가 묻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 앞에 나왔으면 나온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의로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심판입니다. 이는 제사장과 장로, 서기관, 바리새 교인들에 대해 여지없는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세리와 창기들이 회개하며 돌아올 때 아버지는 기쁘게 영접하고 있는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 번 회개의 기회가 있었고 계속하여 말씀이 들려지고 있지만,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그 심판 또한 누가 준비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할 인간을 맞기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늦게라도, 어느 때에라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묻지 않고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여기에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여기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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