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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주 안에서 기뻐하라(3장 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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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기뻐하라(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본 장에서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한 절에 지나지 않지만 실은 이것이 빌립보서 전체의 테마입니다. 1절 서두의 '종말로'-'토 로이폰' '이제 남은 바를 말한다'또는 '다른 주제를 말하겠다' 하는 의미가 됩니다. 앞으로 할 말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로-끝으로 말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끝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다가 "끝으로……" 하면 이제부터 하는 말은 중요하니까 잘 들으라는 뜻입니다. 설교 시간에 졸더라도 결론은 잘 들어야 합니다. 평생 부모님 말씀을 안 들었다 해도 그 유언은 잘 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종말로'라고 하는 말은 이제부터 하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해서 종합적으로 이야기하겠다는 말도 됩니다. 또 여기서 '종말로'라는 말은 편지를 끝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종말로 라는 말을 편지 중간에 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종말로'라는 강조형을 쓰고 나서 그 주제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미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약 아홉 번 나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밖의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합니다. 남보다 좋은 여건에 있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보고 기뻐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해도 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불행한 여건에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을 향해 기뻐하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바로 그 때문에 강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제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폐결핵으로 세 번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를 병 문안 간 적인 있는데 찾아간 친구들은 어려운 처지에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울었으나 그는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나 대신 당신들이 많은 일을 해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했습니다. 큰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기쁘게 찬송하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들이 오히려 큰 은혜와 감동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218절에서 이미 보았듯이 바울은 지금 자기가 먼저 기뻐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나는 괴롭지만 너희들은 기뻐하라", " 나는 너희를 위해 고생하지만 너희는 행복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쁘다, 그런고로 너희도 함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고서야 남에게 기쁨을 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불행한데 남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나는 고생할 테니 너는 잘 되라"고 하는데 이런 부모의 교훈을 듣고 잘되는 자녀가 없습니다. 오히려"나는 너를 키우며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그 아들이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 먹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맛있게 먹으면서 남에게 권해야지, 저는 안 먹으면서 남한테만 연신 맛있으니 먹으라 한다면 누가 먹어 주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는 시작부터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고생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믿었는지 아십니까? 지금도 인도나 동남아 쪽에 가면 카스트 제도 때문에 그리스도인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당장 가문에서 쫓겨나고 상속권이 없어집니다. 가산이 몰수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유롭고, 전도하면 칭찬도 받지만 원래 안 믿는 가문에서, 안 믿는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제가 늘 기억하고 감사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집안에서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신 분이 제 조부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3대 독자로서,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할아버지가 상투를 자르고 집에 들어왔을 때에는 많은 매를 맞고 쫓겨나 한 달 동안 집에 못 들어왔다고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부터 고생이요 손해요 추방당하는 것이요 핍박당하는 것이다. 그래도 기뻐하라.' 그 의미를 알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기뻐하라고 하는데 기뻐할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안에서'입니다. '주안에서'는 사도 바울의 전용어입니다. '주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이러한 말이 그의 편지 가운데 132회나 나옵니다. '주안에서'라는 말은 아주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과 기독교를 구별짓는 큰 특징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쁨에도 언제나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주안에서'는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면 주안에서의 기쁨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 얻은 기쁨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기쁨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이 주 안에서의 기쁨을 극대화해서, 이 벅찬 기쁨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주 큰 기쁨을 느끼게 될 때에 시시하고 작은 걱정들은 다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이 절대적 기쁨에 충만해서 이 기쁨으로 모든 시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것은 기쁨입니다. 기쁠 때에 건강하고, 기쁠 때에 창조의 힘이 있고, 기쁠 때에 능력이 있고, 기쁠 때에 화평이 있고, 기쁠 때에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이 떠나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절대적 기쁨이 없을 때에는 돈을 벌어도 걱정이요, 출세해도 불안합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고독하고 괴로울 뿐입니다.

둘째, 주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아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주안에서, 성령 안에서, 또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교제를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하나님의 일꾼된 영광, 그리스도와의 동행, 그리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다, 나를 알고 사랑하고 동행하신다 하는 것을 아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하게 느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셋째,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소망적인 것이요, 미래지향적인 것이요,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늘나라 간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천당 갈 수 없을 것같이 때문에 걱정입니다. 천당이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히 믿어지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천당이 분명히 있고 내가 틀림없이 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 예수님께서 내 이마나 손바닥에 '너는 천당 갈 수 있다'고 사인이라도 해주신다면 이 정도의 세상 고생쯤이야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슬픔이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이것을 종말론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영적 안목의 결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쁨, 이것이 주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내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내가 하늘나라에 갈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죽더라도 틀림없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약속, 바로 이것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마치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뻐했던 것과 같은, 그런 기쁨이 주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넷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도 주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입니까? 사실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 자체도 특권이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한번은 제가 어느 교회 헌당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곳 목사님이 목을 놓아 웁니다. 그 예배당을 짓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건축 위원장이 두 명이나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 번째 건축 위원장이 일을 마무리짓고 마침내 헌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 건축에 가담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피곤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주안에서, 주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자의 특권에서 오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 이 모든 것을 깨달음으로써 오는 충만한 기쁨을 주안에서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이 기쁨이라는 것은 조금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구 충족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환경이 바뀌면서 내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여건이 충족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에 좋은 음식 먹으면 기쁘고 추울 때에 따뜻한 옷을 입으면 기쁜 것처럼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기쁨입니다.

둘째, 지적인 기쁨입니다.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자의 기쁨, 이치를 깨닫고 무릎을 탁 치는 기쁨, 무엇을 만들고 기뻐하는 창작의 기쁨을 말합니다.

셋째, 선행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사회학적 또는 도덕적인 기쁨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 할 때 기쁘고, 사랑할 때 기쁘고 사랑 받을 때 기쁩니다. 선행에서 오는 기쁨은 곧 사랑 속에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넷째, 영적 기쁨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기쁨입니다. 소망 중에 기뻐하며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쁨은 이런 신령한 은혜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기뻐하게 될 날을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요 지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쁨은 픽션이 아닌 창작입니다. 우리가 기쁨에 대해 생각할 때 먼저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 내가 기뻐하는 줄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조건적인 기쁨이 아니요 행동하는 기쁨입니다. 창조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니 기뻐하라'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뻐하라. 그리하면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하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입맛과 음식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사람이 음식으로 인해 기쁨을 얻으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맛있는 음식이 있어야 하고, 둘째 입맛이 좋아야 합니다. 입맛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좋은 음식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늘 소화가 안 되어 좀전에 먹은 것도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은 음식 냄새만 맡아도 고약하여 먹은 것이 올라올 지경입니다. 간혹 단 것 대신 짠 것, 짠 것 대신 매운 것뭐 이렇게 메뉴를 바꾸어 볼 수는 있어도 잠시뿐입니다. 조금 색다르게, 접시라도 바꾸어 보고 테이블보도 좀 바꾸어 보지만 그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입맛입니다. 소화 기능이 좋고 입맛이 좋으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음식을 가리지 않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아 맛있다" 하면서 먹습니다. 이 음식은 이래서 좋고, 저 음식은 저래서 좋습니다. 기쁨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쁨에 조건이 따로 없습니다. 기뻐하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기쁩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여름은 더워서 좋고, 가을은 서늘해서 좋고, 겨울은 추워서 좋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어디에서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크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제 알만하지 않습니까?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입맛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입맛은 네 살 때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나이 40세가 넘으면 네 살 때 먹던 음식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가정 주부들이 남편에게 좋은 음식 만들어 주려고 TV도 보고 요리 책도 보지만 모두 헛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이 네 살 때에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남편이 식탁에서 "어이구, 우리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김치찌개는 맛이 어땠는데, 된장찌개는 어땠는데……"하면 지혜롭지 못한 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옛날 음식이 무슨 맛이 있었겠어요?" 하고 남편이 괜한 음식 타박이나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모르는 소리지요. 입맛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굳어진 입맛은 아무도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젊었을 때는 그럭저럭 아무 것이나 남이 해주는 대로 잘 먹다가도 나이가 들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아무리 재벌이라도 옛날에 가난하게 살았다면 그 시절에 먹던 험한 음식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입맛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들은 아이들한테 먹어라 먹어라 사정을 해서 먹지 않으면 얼른 다른 음식을 가져다 대령하는 형편이니, 그것은 자녀들의 입맛을 엉망으로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밥상 위에 메뉴를 네 가지 이상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머니 마음대로 네 가지 음식을 해놓고 아이들이 먹으면 다행이요 먹지 않으면 음식을 치워 버리고 그냥 굶긴다고 합니다. 이렇게 훈련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이기에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식탁에서 불평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살다가왔기 때문에 음식 메뉴가 매우 다양하고 많습니다. 맛은 별로 없으나 영양가가 높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머니가 주는 대로 먹다 보면 성장기에 필요한 영양을 골고루 얻게 되고 입맛도 저절로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입맛은 버릇들이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저는 블랙 커피를 마십니다만, 그걸 못 마시는 분들은 "아이구 그 쓴 것을 어떻게 마십니까?" 합니다. 사실 저도 블랙 커피를 마시게 된 동기가 그리 간단치는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때입니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오후가 되면 가물가물 졸음이 옵니다. 그래서 오후 강의실에 들어갈 때에는 교수나 학생이나 커피를 두어 잔씩 들고 들어갑니다. 그 커피를 마시면서 두세 시간씩 강의를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커피를 대여섯 잔은 마시게 되는데 여기에다 설탕 타고 크림 타고 했다가는 건강을 해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블랙 커피를 마셨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쓴맛이었지만 공부하기 위한 약이라 생각하고 마셨습니다. 이렇게 한 4개월을 먹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설탕 탄 커피는 아예 마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입맛이 달라 걱정이라지만 남편 좋아하는 것을 부인이 먹어 보세요. 일 년만 그렇게 남의 입맛에 맞추다 보면 입맛이 확 달라집니다. 부부간에 아직도 이것을 적용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신이 미성숙한 탓입니다. 일찍이 제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솥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다 먹어라.' 만일 안 먹으면 그 때는 큰 일이 났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먹는다 안 먹는다 하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입맛은 본래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요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찬 것을 먹이면 찬 것을 먹을 수 있고, 처음부터 더운 것만 먹이면 더워야만 먹습니다. 만사는 훈련입니다.

이제 생각해 봅시다. 기쁨에 조건이 있습니까? "기뻐하라!" 기뻐해 보십시오. "나는 기쁘다" 하고 말할 때에 기쁨의 이유가 생각합니다. 우는 것에 대해서도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먼저 울어 놓고 우는 이유를 만든다고 합니다. 왜 우느냐고 누가 물으면 그 때 가서 슬픈 이유를 조작합니다. 울적한 기분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 '내가 왜 울적하지?' 하다가 나는 혼자라서 외롭다고 합니다. 왜 이것을 외롭다고 합니까? 자유롭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인가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 오직 이것 하나만을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합니다. 오직 이것 하나만이 기쁨의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 -- 이 한 가지만 생각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기뻐할 때, 그 기쁨이 확산되어 극대화될 때에 시시한 문제들이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1)"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은 반복입니다. 진리는 반복되어야 합니다. 설교말씀도 귀한 말씀은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교훈은 암기가 먼저요, 실천이 둘째요, 깨달음이 셋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얼떨떨해하는 제자들에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복, 이것이 바로 현대의 중요한 교육 방법입니다. 아이들을 앞에 놓고 "이것 네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고 물어 봅니다. 이를테면 어떤 부모는 아이들한테 "우리 한국에서 살까, 미국에서 살까?" 하고 물어 봅니다. 도대체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위 세뇌(洗腦)라고 하는 것은 반복, 지속, 속도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텔레비전 약 광고를 보십시오. 기왕이면 가끔씩 프로를 바꾸면 좋을 성싶은데 늘 똑같은 내용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해야 머리 속에 쏙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에게도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예수님 잘 믿어라" "진실하게 살아라" 평생 이런 말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자녀의 머리 속에는 어머니의 믿음이, 아버지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교육은 반복이라는 훈련(discipline)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미국 세인트루이스를 여행 중이던 한 변호사가 주일날 아침에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개받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 도중에 몇 개의 교회가 더 있더랍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변호사는 교통순경에게 가까운 교회도 많던데 왜 굳이 그 교회를 소개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순경이 대답했습니다.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제가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한 것입니다." 교회부흥이 따로 없습니다. 예배 마치고 나오는 교인들의 얼굴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찬양이 있다면 교회도 가정도 은혜롭고, 그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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