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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한복음 16장 16절~24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問議)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미국 뉴저지 주에 웨스트오렌지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에 토마스 에디슨의 실험실이 있었습니다. 1914년 12월 어느날, 이 실험실에 불이 나서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60년 동안이나 다루어온 연구 재료, 연구 결과, 그리고 당시로 2백만 달러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연구시설이 눈깜짝할 사이에 불꽃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려고 아버지에게 달려온 아들 찰스는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간신히 사실을 전한 아들에게 에디슨은 그러나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찰스야, 어서 네 어머니를 찾아오너라. 평생에 두번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을 함께 보러 가야 되겠다!" 67세의 노인 에디슨은 아내와 함께 불이 났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실험실이 다 타고 남은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재난에는 위대한 가치와 교훈이 있소. 우리의 모든 과오는 이렇게 다 불타버렸소.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장 1절의 이 말씀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일에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일에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일에 함께 분노하고, 다른 사람이 절망하는 일에 함께 절망하는 사람 ---- 이 정도로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체험하는 데에 신앙의 터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깊은 것을 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세계를 봅니다. 가식이나 물질이나 건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늘 미래를 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당하는 사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다음에 생길 일, 1년 후 2년 후 10년 후를 봅니다. 아니, 더 먼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봅니다. 바로 이런 시각을 지닐 때에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는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저는 이분의 책을 퍽 좋아하여 30여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성지를 무려 백 번이나 여행하였습니다. 확실한 근거와 역사적인 사실들을 들어서 성경을 자세히 해석하는 훌륭한 저술가로 평가되는 분입니다. 한번은 어떤 여행가가 바클레이를 찾아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귀한 책들을 그토록 많이 쓸 수 있었습니까?" 이에 바클레이는 빙그레 웃더니 귀에서 보청기를 꺼내 보입니다. "저는 이 보청기가 없으면 전화벨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귀가 어둡습니다. 이것을 빼놓고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덕분에 저는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성경을 더 자세히 읽을 수가 있고 집중적으로 연구에 임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꼭 저술을 합니다. 제가 출강하는 어느 대학 어느 강의 시간에도 지각이나 결석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불행한 일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은 그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압니다. 믿는 사람의 시각에는, 신앙인의 의식 속에는 불행이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을 뿐입니다. 나의 행복, 나의 불행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현재의 안일, 소득이나 지위의 고하(高下)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미래적인 약속, 저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비유합니다. 먼저 모든 사람은 다같이 하나의 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전제해놓고 시작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배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만족해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는 역시 관심이 없으나 주변 경치 구경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날씨가 화창하여 눈앞에 좋은 경치가 전개되면 좋아라 하다가도 날씨가 궂어 바람이 불고 배가 흔들리면 죽느니 사느니 원망이 가득해집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배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배가 가는 방향을 생각하고 최종 정착지를 생각합니다. 그 길로 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자기에게 맡겨진 데로 열심히 노를 젓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부류의 어느 편에 속하겠습니까? 역사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비관적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낙관적으로 이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불가사의라고 이해하여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평가합니다마는 신앙인은 신앙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역사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역사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생은 헛된 생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즐거움도 신앙적인 역사의식 안에서만 의미를 창출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특별합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결코 무의미한 시간의 윤회(輪廻)가 아닙니다. 돌고 도는 시간의 반복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에 대하여 길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요점만을 들어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역사는 자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이루어져 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역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의 투입입니다. 칼 바르트의 이론대로 말하자면 인브레이킹(inbreaking), 부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일직선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입
D뭆TXT部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엄격히 따져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어김없이 일직선상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일회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젊은 두 남녀가 연애를 한다고 칩시다. 서로 사랑을 하여 어느 순간 손을 잡게 됩니다. 그 때, 손을 만진 사람이나 만지게 한 사람이나 둘 다 뜨거운 체험을 합니다. 이것은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요 단 한 번 있는 일입니다.
며칠 후에 다시 손을 만지지만 이미 처음과는 다릅니다. 처음 만질 때만이 특별한 것이요 이후에 다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물리적인 반복일 뿐입니다. 그의 정신적 인격적 경험으로서는 이미 어제의 그 경험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단 한 번씩만 지나갑니다. 정월 초하루는 해마다 돌아옵니다. 그런데 해마다 다릅니다. 젊었을 때가 다르고 나이 들었을 때가 다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전개됩니다. 날마다가 새로운 경험입니다. 인간은 일생을 단 한 번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사를 이렇게 직선 상에 놓고 본다면 여기에는 분명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얼핏보기에 마구 굴러가는 것 같고 뒤바뀌는 것 같아도 역사는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어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에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미 계획한 종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final goa1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이 약속된 종말을 향하여 역사는 운영되어갑니다. 어떤 소설을 읽는다던가 영화를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결론이 있습니다.
대개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그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 한마디를 위하여 모든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 아닙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을 읽어 가느라면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결국 모두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데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한마디합니다. "내일 아침에도 태양은 떠오를 것인가?" ---- 이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이 한마디가 이 소설의 결론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바라봅니다. 역사의 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철학이요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역사의 종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역사 운영의 방향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속사(救贖史)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우연이란 없습니다. 흔히들 '우연한 일'이라는 소리를 많이 하지만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혹 배신을 당했거나 손해를 보았거나 병들었습니까? 사건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어쩌다가 귓가를 스쳐 가는 한마디의 말이라도 깊이 생각해보면 헛된 말이 없습니다. 다 나를 깨우치는 말씀이요 나로 하여금 바로 서게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건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봅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알고, 예수님만이 듣고, 예수님만이 생각하는 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못 알아듣습니다. 자꾸만 '무슨 말씀이요, 무슨 말씀이요'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멀리 내다보시면서 뜻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9절)." '조금 있으면'의 '미크론'이라는 헬라어는 마이크로(micro)라는 말입니다. 아주 작다, 잠깐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십자가를 뜻하는 것이요 다시 보리라 하신 말씀은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다가올 사건 앞에서 초연하십니다.
여기에는 상징적이요 계시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현재와 재림을 가르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으나 그것은 잠깐이고 이제 곧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건을 잠깐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통은 사실입니다. 고통은 실제입니다. 그러나 미래적인 약속이 이 고난의 의미를 흡수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이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부정 부패가 있다고 떠들어대도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철저하게 모순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제사장 가야바가 갖은 음모를 다 꾸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또 빌라도의 재판은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그런가하면 간사한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심한 제자들,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버렸습니다.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3년 동안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입니다. 나사로의 집은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단 한사람도 나타나 예수님을 변호하고 편든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말로 한다면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못 죽습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연하십니다. "나의 원(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하십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베드로에게 이르십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다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십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시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2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의 마음은 벌써 저 부활의 아침에 가 계십니다. 오늘의 모든 현실을 잠깐으로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하신 말씀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그 아침을 바라보시기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역사의식이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유하여 여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맏형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동생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1, 22절)." 요즈음의 어머니들은 옛날 어머니들에 비해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덜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열성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정말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옛날만 못하다고들 합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무통(無痛) 분만 때문입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낳아야 귀한 가치를 아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분만했으니 그만큼 모릅니다. 다른 하나는 우유를 먹이기 때문입니다. 모유를 먹이면서 사랑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어야 하는데 송아지처럼 우유를 먹여 키웠으니 진정한 사랑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다니는 어느 여집사님은 결혼을 하고서 몇 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아이가 없었습니다. 제게도 기도를 부탁하였고 본인도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결혼 후 7년만에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늦게 하였던 터이라 30이 훨씬 넘은 나이였습니다. 서른 넘어서 초산을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수술을 권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니 개복수술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낳겠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생명이므로 어떤 고통을 치르더라도 제 힘으로 낳고 싶습니다." 굉장한 분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사양하십니까? 그렇다면 참기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고난 뒤에는 해피 엔드(happy end)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종말은 아름답습니다.
또한 우리는 위의 비유에서 생명 중심의 이해를 봅니다. 사람 낳은 기쁨, 이 생명이라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저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먼저 주보를 펼칩니다. 맨마지막에 새로 등록하신 분들이 기록되어 있는 난을 읽는 것이 제일 즐겁습니다. 한 영혼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치르더라도 인도해야 합니다. 여집사님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봉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은 다 해줍니다. 해달라는 것은 다 해줍니다. 시쳇말로 '서비스'를 잘해주었더니 결국은 남편이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은 다음에도 남편이 계속 자기만을 위해 달라고 해서 골치라고 합니다. 아주 못된 버릇이 들어버렸다고 불평하면서도 남편이 예수를 믿고, 또 잘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희생인들 마다하겠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생명 하나가 이렇게 소중합니다. 생명 중심입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밖의 것들은 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송하지만 제 집사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아이를 낳을 때에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고생하는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는데 정말 말할 수 없이 힘들게 아이를 낳았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이렇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첫마디가 "다시는 안 낳을 거예요!"입니다. 워낙 고생하는 모습을 저도 보았기에 이로써 만족하자고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 않겠다던 이 어머니가 연이어 두 번이나 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통은 쉽게 잊습니다. 그 귀한 생명을 품에 안는 순간에 다 잊어버립니다.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의 기쁨, 이 어머니의 기쁨이란 천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요 바로 그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과 4절에서도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합니다. 더 물을 말이 없을 것입니다. 만족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근심이 있으나 기쁨이 있고, 고통이 있으나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저 앞, 저 깊은 곳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한복음 16장 16절~24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問議)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미국 뉴저지 주에 웨스트오렌지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에 토마스 에디슨의 실험실이 있었습니다. 1914년 12월 어느날, 이 실험실에 불이 나서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60년 동안이나 다루어온 연구 재료, 연구 결과, 그리고 당시로 2백만 달러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연구시설이 눈깜짝할 사이에 불꽃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려고 아버지에게 달려온 아들 찰스는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간신히 사실을 전한 아들에게 에디슨은 그러나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찰스야, 어서 네 어머니를 찾아오너라. 평생에 두번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을 함께 보러 가야 되겠다!" 67세의 노인 에디슨은 아내와 함께 불이 났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실험실이 다 타고 남은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재난에는 위대한 가치와 교훈이 있소. 우리의 모든 과오는 이렇게 다 불타버렸소.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장 1절의 이 말씀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일에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일에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일에 함께 분노하고, 다른 사람이 절망하는 일에 함께 절망하는 사람 ---- 이 정도로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체험하는 데에 신앙의 터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깊은 것을 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세계를 봅니다. 가식이나 물질이나 건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늘 미래를 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당하는 사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다음에 생길 일, 1년 후 2년 후 10년 후를 봅니다. 아니, 더 먼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봅니다. 바로 이런 시각을 지닐 때에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는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저는 이분의 책을 퍽 좋아하여 30여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성지를 무려 백 번이나 여행하였습니다. 확실한 근거와 역사적인 사실들을 들어서 성경을 자세히 해석하는 훌륭한 저술가로 평가되는 분입니다. 한번은 어떤 여행가가 바클레이를 찾아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귀한 책들을 그토록 많이 쓸 수 있었습니까?" 이에 바클레이는 빙그레 웃더니 귀에서 보청기를 꺼내 보입니다. "저는 이 보청기가 없으면 전화벨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귀가 어둡습니다. 이것을 빼놓고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덕분에 저는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성경을 더 자세히 읽을 수가 있고 집중적으로 연구에 임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꼭 저술을 합니다. 제가 출강하는 어느 대학 어느 강의 시간에도 지각이나 결석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불행한 일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은 그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압니다. 믿는 사람의 시각에는, 신앙인의 의식 속에는 불행이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을 뿐입니다. 나의 행복, 나의 불행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현재의 안일, 소득이나 지위의 고하(高下)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미래적인 약속, 저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비유합니다. 먼저 모든 사람은 다같이 하나의 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전제해놓고 시작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배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만족해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는 역시 관심이 없으나 주변 경치 구경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날씨가 화창하여 눈앞에 좋은 경치가 전개되면 좋아라 하다가도 날씨가 궂어 바람이 불고 배가 흔들리면 죽느니 사느니 원망이 가득해집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배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배가 가는 방향을 생각하고 최종 정착지를 생각합니다. 그 길로 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자기에게 맡겨진 데로 열심히 노를 젓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부류의 어느 편에 속하겠습니까? 역사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비관적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낙관적으로 이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불가사의라고 이해하여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평가합니다마는 신앙인은 신앙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역사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역사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생은 헛된 생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즐거움도 신앙적인 역사의식 안에서만 의미를 창출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특별합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결코 무의미한 시간의 윤회(輪廻)가 아닙니다. 돌고 도는 시간의 반복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에 대하여 길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요점만을 들어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역사는 자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이루어져 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역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의 투입입니다. 칼 바르트의 이론대로 말하자면 인브레이킹(inbreaking), 부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일직선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입
D뭆TXT部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엄격히 따져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어김없이 일직선상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일회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젊은 두 남녀가 연애를 한다고 칩시다. 서로 사랑을 하여 어느 순간 손을 잡게 됩니다. 그 때, 손을 만진 사람이나 만지게 한 사람이나 둘 다 뜨거운 체험을 합니다. 이것은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요 단 한 번 있는 일입니다.
며칠 후에 다시 손을 만지지만 이미 처음과는 다릅니다. 처음 만질 때만이 특별한 것이요 이후에 다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물리적인 반복일 뿐입니다. 그의 정신적 인격적 경험으로서는 이미 어제의 그 경험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단 한 번씩만 지나갑니다. 정월 초하루는 해마다 돌아옵니다. 그런데 해마다 다릅니다. 젊었을 때가 다르고 나이 들었을 때가 다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전개됩니다. 날마다가 새로운 경험입니다. 인간은 일생을 단 한 번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사를 이렇게 직선 상에 놓고 본다면 여기에는 분명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얼핏보기에 마구 굴러가는 것 같고 뒤바뀌는 것 같아도 역사는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어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에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미 계획한 종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final goa1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이 약속된 종말을 향하여 역사는 운영되어갑니다. 어떤 소설을 읽는다던가 영화를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결론이 있습니다.
대개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그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 한마디를 위하여 모든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 아닙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을 읽어 가느라면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결국 모두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데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한마디합니다. "내일 아침에도 태양은 떠오를 것인가?" ---- 이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이 한마디가 이 소설의 결론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바라봅니다. 역사의 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철학이요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역사의 종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역사 운영의 방향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속사(救贖史)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우연이란 없습니다. 흔히들 '우연한 일'이라는 소리를 많이 하지만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혹 배신을 당했거나 손해를 보았거나 병들었습니까? 사건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어쩌다가 귓가를 스쳐 가는 한마디의 말이라도 깊이 생각해보면 헛된 말이 없습니다. 다 나를 깨우치는 말씀이요 나로 하여금 바로 서게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건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봅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알고, 예수님만이 듣고, 예수님만이 생각하는 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못 알아듣습니다. 자꾸만 '무슨 말씀이요, 무슨 말씀이요'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멀리 내다보시면서 뜻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9절)." '조금 있으면'의 '미크론'이라는 헬라어는 마이크로(micro)라는 말입니다. 아주 작다, 잠깐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십자가를 뜻하는 것이요 다시 보리라 하신 말씀은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다가올 사건 앞에서 초연하십니다.
여기에는 상징적이요 계시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현재와 재림을 가르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으나 그것은 잠깐이고 이제 곧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건을 잠깐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통은 사실입니다. 고통은 실제입니다. 그러나 미래적인 약속이 이 고난의 의미를 흡수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이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부정 부패가 있다고 떠들어대도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철저하게 모순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제사장 가야바가 갖은 음모를 다 꾸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또 빌라도의 재판은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그런가하면 간사한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심한 제자들,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버렸습니다.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3년 동안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입니다. 나사로의 집은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단 한사람도 나타나 예수님을 변호하고 편든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말로 한다면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못 죽습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연하십니다. "나의 원(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하십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베드로에게 이르십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다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십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시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2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의 마음은 벌써 저 부활의 아침에 가 계십니다. 오늘의 모든 현실을 잠깐으로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하신 말씀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그 아침을 바라보시기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역사의식이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유하여 여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맏형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동생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1, 22절)." 요즈음의 어머니들은 옛날 어머니들에 비해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덜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열성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정말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옛날만 못하다고들 합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무통(無痛) 분만 때문입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낳아야 귀한 가치를 아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분만했으니 그만큼 모릅니다. 다른 하나는 우유를 먹이기 때문입니다. 모유를 먹이면서 사랑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어야 하는데 송아지처럼 우유를 먹여 키웠으니 진정한 사랑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다니는 어느 여집사님은 결혼을 하고서 몇 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아이가 없었습니다. 제게도 기도를 부탁하였고 본인도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결혼 후 7년만에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늦게 하였던 터이라 30이 훨씬 넘은 나이였습니다. 서른 넘어서 초산을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수술을 권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니 개복수술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낳겠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생명이므로 어떤 고통을 치르더라도 제 힘으로 낳고 싶습니다." 굉장한 분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사양하십니까? 그렇다면 참기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고난 뒤에는 해피 엔드(happy end)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종말은 아름답습니다.
또한 우리는 위의 비유에서 생명 중심의 이해를 봅니다. 사람 낳은 기쁨, 이 생명이라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저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먼저 주보를 펼칩니다. 맨마지막에 새로 등록하신 분들이 기록되어 있는 난을 읽는 것이 제일 즐겁습니다. 한 영혼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치르더라도 인도해야 합니다. 여집사님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봉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은 다 해줍니다. 해달라는 것은 다 해줍니다. 시쳇말로 '서비스'를 잘해주었더니 결국은 남편이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은 다음에도 남편이 계속 자기만을 위해 달라고 해서 골치라고 합니다. 아주 못된 버릇이 들어버렸다고 불평하면서도 남편이 예수를 믿고, 또 잘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희생인들 마다하겠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생명 하나가 이렇게 소중합니다. 생명 중심입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밖의 것들은 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송하지만 제 집사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아이를 낳을 때에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고생하는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는데 정말 말할 수 없이 힘들게 아이를 낳았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이렇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첫마디가 "다시는 안 낳을 거예요!"입니다. 워낙 고생하는 모습을 저도 보았기에 이로써 만족하자고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 않겠다던 이 어머니가 연이어 두 번이나 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통은 쉽게 잊습니다. 그 귀한 생명을 품에 안는 순간에 다 잊어버립니다.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의 기쁨, 이 어머니의 기쁨이란 천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요 바로 그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과 4절에서도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합니다. 더 물을 말이 없을 것입니다. 만족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근심이 있으나 기쁨이 있고, 고통이 있으나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저 앞, 저 깊은 곳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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