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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사야 56장 1절~8절)

by 【고동엽】 2024.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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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사야 56장 1절~8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鼓子)도 나는 마른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永永)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聖山)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屬)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교회 생일날입니다. 11명으로 시작하여 13년만에 2만 명이 넘는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토록 큰 교회로 성장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이를 위하여 수고해주신 모든 교우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외국에 있는 많은 교역자들과 신학자들, 특히 일본과 미국에 있는 목사님들이 찾아와 종종 교회 성장의 비결을 묻습니다. 대답할 적절한 말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비결이라는 게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하는 일이 너무도 적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오늘의 교회가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경륜 속에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으로 확실히 믿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피부로 느껴서 다 아시겠지만 우리 교회는 굳이 무슨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전도 운동이다, 기도 운동이다, 부흥회다 하며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책임지고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는 식의 운동 같은 것을 따로 해본 일이 없습니다. 거창한 마스터플랜(master plan)도 세운 적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들을 보면 예컨대 '금년의 목표'니 '5개년 계획'이니 '10개년 계획'이니 해서 '올해는 몇 명' '내년에는 몇 명' 하는 식으로 새 신자들을 인도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온 교인이 총동원해서 수고하는 것을 봅니다마는, 우리 교회는 그런 운동(movement)도 하지 않고 별스런 마스터플랜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이 무엇이냐? 굳이 질문을 한다면 제 마지막 대답은 이렇습니다. 먼저, 교회로 교회 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자연히 부흥됩니다.

현실을 볼 때 오늘의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모습의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생각하고 다시 개혁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 본래의 모습,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교회로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배제해야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로의 성장을 저해하는 불순한 것들과 잘못된 것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배제해나가야 교회는 순수한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교회 모습이 순수해지면 순수해지는 그만큼 성장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성장은 그 교회가 가지는 순수성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얼마나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느냐, 성경이 가르쳐주는 말씀 그대로를 전하느냐 ---- 교회의 성장은 이에 달려 있습니다. 순수하면 순수한 그만큼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순수한 만큼 교회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인본주의적인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합디다. "소망교회는 헌금이 많이 되어 교회가 성장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하게 애를 쓰지도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교인들이 그토록 헌금을 잘합니까?" 우리 교인들이 헌금 잘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번 우리 교회에서 공산권(특히 루마니아)에 성경을 보내기로 하여 6천만 원을 목표로 헌금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도하거나 운동하지도 않았는데 1억 9천만 원이 헌금되었습니다. 목표액의 3배가 넘는 금액입니다. 목회 생활 30년인 저로서도 처음 맞는 일입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한마디로 그 목적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뜻한 바가 선하고 깨끗하였기에 주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동기, 순수한 목적만 가지면 교회는 저절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집 팔아서 헌금할 사람 많습니다. 생명을 바칠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깨끗한 가치, 순수한 동기가 얼마만큼 작용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따름입니다. 교회에 교회된 본래의 모습이 완연할 때에 교회는 부흥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모델은 다섯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생명줄을 내려주셨습니다.

'네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라, 그리고 그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살아남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도덕적 수준은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형편이나 사회적 죄악에 대해서도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주십니다. 방주를 예비하시고 그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은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 방주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약속을 주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낙원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가,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보는가, 얼마나 선한 행위를 하는가 ---- 해보았댔자 오십보백보입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대수로운 일이 못됩니다. 문제는 얼마나 열심히 교회에 나오느냐 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나오는 사람은 턱걸이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은 그 정도의 사람입니다. 한편 한 주일에 세 번 이상, 매일 아침 나오는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나올 때마다 깨닫고 나올 때마다 은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왔다가 공치는 날도 있습니다. 졸다 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온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꾸준하면 언제고 은혜를 받게 마련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보십시오.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의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을 지으라. 그 성전에서 회개하고 거기에서 희생 제물을 바칠 때에 내가 그 죄를 사하리라. 거기에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응답하리라'하고 장소를 정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전에는 많은 의식이 있고 행사가 있습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로서 죄 사함을 받는 것, 사죄의 은총을 힘입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힘입고 구원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셋째는 회당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다음에 바벨론 포로가 된 사람들로 시작하여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모여 마을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하여 회당을 자원해서 세우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현장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넷째는 광야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동안을 광야에 머무릅니다.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애굽적인 성향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직도 남아 있는 옛 모습--옛 생활, 옛 풍속, 옛 종교, 옛 타락성을 깨끗이 털어 버리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 교회입니다. 수련장입니다. 여기에서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와서 "아무개는 예배드리고 나올 때는 천사 같은데 집에서 혈기를 부릴 때는 악마 같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즉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다 거쳐야 할 과정(Process) 이 있습니다. 너무 급한 변화를 기도하지 마십시오. 중심은 하나님께 있지만 생활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인 중에는 꾸중듣는 재미로 교회에 나온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죄를 책망 받는 재미가 괜찮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꾸중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섯째는 초대교회입니다. 오순절로 인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은 교회, 선교적인 교회입니다. 오직 선교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말씀을 오해하여 증인이 되라고 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구석구석 찾아보아도 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거기에 명령이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는 말씀이 나오며, 누가복음 24장 49절에도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 한마디로 교회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 명령입니다. 또한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 이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전도만이 우선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자꾸만 '전도하라'고 했더니, 한 교인이 나서서 "나도 간신히 나오는데 누구를 전도하라는 것이냐?"하고 반발을 하더랍니다. 나도 비실대면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고 전도하라니 전도가 됩니까? 이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는 분은 전도라는 말 자체가 인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하여 은혜를 받고 나면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절로 전도가 됩니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안 먹겠느냐는 옛 속담처럼, 복음을 들었으면 나가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생각하지 않고 전도하라고만 하면 복음의 능력에 대한 모독입니다. 복음 자체는 이미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모여 기도하라, 성령을 받으라 ---- 여기까지가 명령이요, 성령을 받으면 권능의 사람이 되어 선교하게 되리라 ---- 이것이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됩니까? 대체로 현대인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니 괴롭고 안나가자니 꺼림칙하고, 그래서 만부득이 나오다보니 항상 지각입니다. 교회생활이 시원치 않습니다. 아예 안나오는 사람은 차치하고라도 변두리 교인이 참 안됐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 깊숙이 들어가서 해야지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며 세월을 다 보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어떤 분은 간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교회에 나가라는 아내와 친구들의 권유가 성화같았답니다. 한 주일이라도 안 나가면 왜 안나왔느냐고 전화가 득달같이 오고 아내도 한 주일 내내 징징거립니다. 그러다가 한번 나가면 한 주일 내내 기분이 좋고 서비스가 좋습니다. 그 재미에, 그저 무사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다보니 어느 날 은혜를 받게 되어서 참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원적인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동기에서 꾸준히 나오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에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만 12세가 되는 해에 성인식을 합니다. 비로소 유대사람으로 서약을 하고 신앙적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12세가 되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토론하고 제사 드리고 찬송하는 것이 좋아서 그만 배고픈 것도 잊고 어머니 아버지가 기다리는 것도 잊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도 다 잊어버립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사흘 후에 다시 만날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계셨습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하고 마리아가 책망할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하고 대답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한 마음이 평안합니다. 영적으로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있는 여직원들이 저녁에 퇴근하면서 "목사님, 저 집에 갑니다"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로 말을 고쳐 하라고 했습니다. 어디가 본부입니까? 잠깐 나와 있는 것 같아도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교회가 고향입니다. 교회가 내 고향이요 집은 잠깐 다녀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내 본업이요 직업은 부업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낍니까? 이 집에 들어설 때마다 감격하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행복의 극치감을 경험합니까?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분들은 한번만이라도 교회에 나가 찬송을 부를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간절한 마음이 매시간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예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에 성전이 매우 더럽혀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답시고 제물을 사고 팔고 돈을 바꾸고 하는 가운데 그만 성전 뜨락이 시장바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매매하는 자들을 채찍을 들어 몰아내시면서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17절)"하고 책망하십니다. 결국 40년 후, 그 성전은 완전히 망하여 폐허가 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더러워진 성전 ----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중에 언급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7절)"은 교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일본에서 오신 서른세 분의 목사님께서 거듭하여 교회 성장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설명을 자세히 해 드릴 수가 없어 이튿날 새벽기도회에 나와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새벽 5시 30분에 이분들이 오셨습니다. 새벽기도회 하는 광경을 사진으로 찍고는 했습니다. 끝난 다음에 제 방으로 오신 나이많은 목사님께서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막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번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문제입니다. 어쩌다 한번이라도 나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새벽기도회를 시작할 당시에는 그리 많이 모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지 않으면 몇 사람이 같이하게 되겠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1,700명에서 1,900명까지 모입니다. 아래층이 가득 찹니다.

한번 나와보십시오.

여러분,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장소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정해주시고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안식일이요, 장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으로 살고 평생을 하나님께 충성하여 복받은 사람이 다윗 왕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다윗이라고 하여 허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결정적인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주의 궁정(宮庭)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하고 고백합니다. 또한 성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할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복받은 사람의 표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정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바른 응답(right response) 이 바로 교회에 대한 신앙이요 충성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이 시간, 이 장소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를 통하여 모든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런 부탁을 합니다. 'I love you.'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배드리는 일만 계속하면 두 사람은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됩니다. 여러분들도 세상을 떠날 때, 자식들에게 이런저런 유언을 복잡하게 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겨라"----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양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권고로 시계 수리를 배웠습니다. 시계방에 한 달 동안 있으면서 기술을 익혀 고장난 시계 몇 개를 수리해본 다음, 교회에 걸려 있는 먼지 낀 시계를 수리하려고 벽에서 뜯어냈습니다. 그런데 뜯어낸 시계 뒷면에 '곽선희 생일 기념'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여쭈어봤더니, 제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너무 기뻐서 제일 좋은 시계를 사다가 교회에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시계를 만지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옛날 시계는 수십 년을 쓸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 시계는 저하고 나이가 같습니다. 그 시계를 쳐다볼 때마다 저는 큰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 손자를 하나님께 바칩니다'하는 뜻으로 시계를 사다가 교회 벽에 걸으셨던 것입니다.

본문의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란 중보(仲保)의 기도를 뜻합니다. 히브리말로는 '터필라'입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백성이 복을 받고 내가 복을 받으며 그 민족이 다함께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중보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처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본문에서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방인도 선민이 되고 그도 영원히 이름을 전하리라, 누구든 기도하여 복을 받으리.' 한 학자가 인류 역사를 비교 분석하여 교회가 부흥될 때에 나라도 부흥되고 안정되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도 교회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이 정비례한다는 이치를 증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될 때에 나라도 경제도 부흥됩니다. 교회 성장이 침체되면 경제도 무너지고, 교회를 헐어버리면 그 나라도 망하고 맙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그들은 맨먼저 교회부터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른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교회 중심,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말씀 중심, 성령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말씀이 나를 보우하고 교회가 나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이 나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교회를 섬기고 사랑할 때에 교회가 나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우리에게 더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사야 56장 1절~8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鼓子)도 나는 마른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永永)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聖山)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屬)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교회 생일날입니다. 11명으로 시작하여 13년만에 2만 명이 넘는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토록 큰 교회로 성장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이를 위하여 수고해주신 모든 교우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외국에 있는 많은 교역자들과 신학자들, 특히 일본과 미국에 있는 목사님들이 찾아와 종종 교회 성장의 비결을 묻습니다. 대답할 적절한 말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비결이라는 게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하는 일이 너무도 적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오늘의 교회가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경륜 속에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으로 확실히 믿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피부로 느껴서 다 아시겠지만 우리 교회는 굳이 무슨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전도 운동이다, 기도 운동이다, 부흥회다 하며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책임지고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는 식의 운동 같은 것을 따로 해본 일이 없습니다. 거창한 마스터플랜(master plan)도 세운 적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들을 보면 예컨대 '금년의 목표'니 '5개년 계획'이니 '10개년 계획'이니 해서 '올해는 몇 명' '내년에는 몇 명' 하는 식으로 새 신자들을 인도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온 교인이 총동원해서 수고하는 것을 봅니다마는, 우리 교회는 그런 운동(movement)도 하지 않고 별스런 마스터플랜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이 무엇이냐? 굳이 질문을 한다면 제 마지막 대답은 이렇습니다. 먼저, 교회로 교회 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자연히 부흥됩니다.

현실을 볼 때 오늘의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모습의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생각하고 다시 개혁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 본래의 모습,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교회로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배제해야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로의 성장을 저해하는 불순한 것들과 잘못된 것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배제해나가야 교회는 순수한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교회 모습이 순수해지면 순수해지는 그만큼 성장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성장은 그 교회가 가지는 순수성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얼마나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느냐, 성경이 가르쳐주는 말씀 그대로를 전하느냐 ---- 교회의 성장은 이에 달려 있습니다. 순수하면 순수한 그만큼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순수한 만큼 교회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인본주의적인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합디다. "소망교회는 헌금이 많이 되어 교회가 성장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하게 애를 쓰지도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교인들이 그토록 헌금을 잘합니까?" 우리 교인들이 헌금 잘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번 우리 교회에서 공산권(특히 루마니아)에 성경을 보내기로 하여 6천만 원을 목표로 헌금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도하거나 운동하지도 않았는데 1억 9천만 원이 헌금되었습니다. 목표액의 3배가 넘는 금액입니다. 목회 생활 30년인 저로서도 처음 맞는 일입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한마디로 그 목적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뜻한 바가 선하고 깨끗하였기에 주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동기, 순수한 목적만 가지면 교회는 저절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집 팔아서 헌금할 사람 많습니다. 생명을 바칠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깨끗한 가치, 순수한 동기가 얼마만큼 작용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따름입니다. 교회에 교회된 본래의 모습이 완연할 때에 교회는 부흥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모델은 다섯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생명줄을 내려주셨습니다.

'네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라, 그리고 그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살아남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도덕적 수준은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형편이나 사회적 죄악에 대해서도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주십니다. 방주를 예비하시고 그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은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 방주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약속을 주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낙원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가,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보는가, 얼마나 선한 행위를 하는가 ---- 해보았댔자 오십보백보입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대수로운 일이 못됩니다. 문제는 얼마나 열심히 교회에 나오느냐 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나오는 사람은 턱걸이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은 그 정도의 사람입니다. 한편 한 주일에 세 번 이상, 매일 아침 나오는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나올 때마다 깨닫고 나올 때마다 은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왔다가 공치는 날도 있습니다. 졸다 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온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꾸준하면 언제고 은혜를 받게 마련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보십시오.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의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을 지으라. 그 성전에서 회개하고 거기에서 희생 제물을 바칠 때에 내가 그 죄를 사하리라. 거기에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응답하리라'하고 장소를 정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전에는 많은 의식이 있고 행사가 있습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로서 죄 사함을 받는 것, 사죄의 은총을 힘입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힘입고 구원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셋째는 회당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다음에 바벨론 포로가 된 사람들로 시작하여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모여 마을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하여 회당을 자원해서 세우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현장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넷째는 광야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동안을 광야에 머무릅니다.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애굽적인 성향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직도 남아 있는 옛 모습--옛 생활, 옛 풍속, 옛 종교, 옛 타락성을 깨끗이 털어 버리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 교회입니다. 수련장입니다. 여기에서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와서 "아무개는 예배드리고 나올 때는 천사 같은데 집에서 혈기를 부릴 때는 악마 같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즉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다 거쳐야 할 과정(Process) 이 있습니다. 너무 급한 변화를 기도하지 마십시오. 중심은 하나님께 있지만 생활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인 중에는 꾸중듣는 재미로 교회에 나온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죄를 책망 받는 재미가 괜찮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꾸중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섯째는 초대교회입니다. 오순절로 인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은 교회, 선교적인 교회입니다. 오직 선교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말씀을 오해하여 증인이 되라고 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구석구석 찾아보아도 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거기에 명령이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는 말씀이 나오며, 누가복음 24장 49절에도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 한마디로 교회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 명령입니다. 또한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 이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전도만이 우선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자꾸만 '전도하라'고 했더니, 한 교인이 나서서 "나도 간신히 나오는데 누구를 전도하라는 것이냐?"하고 반발을 하더랍니다. 나도 비실대면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고 전도하라니 전도가 됩니까? 이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는 분은 전도라는 말 자체가 인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하여 은혜를 받고 나면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절로 전도가 됩니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안 먹겠느냐는 옛 속담처럼, 복음을 들었으면 나가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생각하지 않고 전도하라고만 하면 복음의 능력에 대한 모독입니다. 복음 자체는 이미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모여 기도하라, 성령을 받으라 ---- 여기까지가 명령이요, 성령을 받으면 권능의 사람이 되어 선교하게 되리라 ---- 이것이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됩니까? 대체로 현대인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니 괴롭고 안나가자니 꺼림칙하고, 그래서 만부득이 나오다보니 항상 지각입니다. 교회생활이 시원치 않습니다. 아예 안나오는 사람은 차치하고라도 변두리 교인이 참 안됐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 깊숙이 들어가서 해야지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며 세월을 다 보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어떤 분은 간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교회에 나가라는 아내와 친구들의 권유가 성화같았답니다. 한 주일이라도 안 나가면 왜 안나왔느냐고 전화가 득달같이 오고 아내도 한 주일 내내 징징거립니다. 그러다가 한번 나가면 한 주일 내내 기분이 좋고 서비스가 좋습니다. 그 재미에, 그저 무사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다보니 어느 날 은혜를 받게 되어서 참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원적인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동기에서 꾸준히 나오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에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만 12세가 되는 해에 성인식을 합니다. 비로소 유대사람으로 서약을 하고 신앙적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12세가 되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토론하고 제사 드리고 찬송하는 것이 좋아서 그만 배고픈 것도 잊고 어머니 아버지가 기다리는 것도 잊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도 다 잊어버립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사흘 후에 다시 만날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계셨습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하고 마리아가 책망할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하고 대답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한 마음이 평안합니다. 영적으로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있는 여직원들이 저녁에 퇴근하면서 "목사님, 저 집에 갑니다"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로 말을 고쳐 하라고 했습니다. 어디가 본부입니까? 잠깐 나와 있는 것 같아도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교회가 고향입니다. 교회가 내 고향이요 집은 잠깐 다녀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내 본업이요 직업은 부업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낍니까? 이 집에 들어설 때마다 감격하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행복의 극치감을 경험합니까?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분들은 한번만이라도 교회에 나가 찬송을 부를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간절한 마음이 매시간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예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에 성전이 매우 더럽혀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답시고 제물을 사고 팔고 돈을 바꾸고 하는 가운데 그만 성전 뜨락이 시장바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매매하는 자들을 채찍을 들어 몰아내시면서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17절)"하고 책망하십니다. 결국 40년 후, 그 성전은 완전히 망하여 폐허가 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더러워진 성전 ----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중에 언급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7절)"은 교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일본에서 오신 서른세 분의 목사님께서 거듭하여 교회 성장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설명을 자세히 해 드릴 수가 없어 이튿날 새벽기도회에 나와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새벽 5시 30분에 이분들이 오셨습니다. 새벽기도회 하는 광경을 사진으로 찍고는 했습니다. 끝난 다음에 제 방으로 오신 나이많은 목사님께서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막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번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문제입니다. 어쩌다 한번이라도 나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새벽기도회를 시작할 당시에는 그리 많이 모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지 않으면 몇 사람이 같이하게 되겠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1,700명에서 1,900명까지 모입니다. 아래층이 가득 찹니다.

한번 나와보십시오.

여러분,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장소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정해주시고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안식일이요, 장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으로 살고 평생을 하나님께 충성하여 복받은 사람이 다윗 왕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다윗이라고 하여 허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결정적인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주의 궁정(宮庭)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하고 고백합니다. 또한 성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할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복받은 사람의 표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정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바른 응답(right response) 이 바로 교회에 대한 신앙이요 충성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이 시간, 이 장소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를 통하여 모든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런 부탁을 합니다. 'I love you.'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배드리는 일만 계속하면 두 사람은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됩니다. 여러분들도 세상을 떠날 때, 자식들에게 이런저런 유언을 복잡하게 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겨라"----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양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권고로 시계 수리를 배웠습니다. 시계방에 한 달 동안 있으면서 기술을 익혀 고장난 시계 몇 개를 수리해본 다음, 교회에 걸려 있는 먼지 낀 시계를 수리하려고 벽에서 뜯어냈습니다. 그런데 뜯어낸 시계 뒷면에 '곽선희 생일 기념'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여쭈어봤더니, 제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너무 기뻐서 제일 좋은 시계를 사다가 교회에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시계를 만지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옛날 시계는 수십 년을 쓸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 시계는 저하고 나이가 같습니다. 그 시계를 쳐다볼 때마다 저는 큰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 손자를 하나님께 바칩니다'하는 뜻으로 시계를 사다가 교회 벽에 걸으셨던 것입니다.

본문의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란 중보(仲保)의 기도를 뜻합니다. 히브리말로는 '터필라'입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백성이 복을 받고 내가 복을 받으며 그 민족이 다함께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중보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처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본문에서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방인도 선민이 되고 그도 영원히 이름을 전하리라, 누구든 기도하여 복을 받으리.' 한 학자가 인류 역사를 비교 분석하여 교회가 부흥될 때에 나라도 부흥되고 안정되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도 교회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이 정비례한다는 이치를 증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될 때에 나라도 경제도 부흥됩니다. 교회 성장이 침체되면 경제도 무너지고, 교회를 헐어버리면 그 나라도 망하고 맙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그들은 맨먼저 교회부터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른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교회 중심,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말씀 중심, 성령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말씀이 나를 보우하고 교회가 나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이 나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교회를 섬기고 사랑할 때에 교회가 나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우리에게 더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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