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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춤추지 않는 아이(마태복음 11 : 16 - 1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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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지 않는 아이(마태복음 11 : 16 - 19)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고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본문은 앞장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당시 세례 요한의 말을 듣지 않은 무리와 백성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 절박한 세례 요한의 위엄 있는 외침을 듣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불신의 세대,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힐책하시는 내용이요, 비유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라는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완악하고 거짓된 세대! 회개치 않는 구제불능의 이 세대를 무엇으로, 어떻게 비유하여야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오늘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잠깐 지나가는 짧은 말씀이지만 신학적이면서도 깊은 의미를 주는 신비로운 말씀일 뿐만 아니라 이 세대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나 오늘이나 인간 세태에는 비슷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불신적이고 여전히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세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현대를 가리켜 단절의 세대라고들 합니다. 그 단절에는 먼저 언어의 단절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른의 말이 젊은 세대들에게 전해지지를 못하고, 또한 젊은이들의 말이 어른들에게 전해지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말이 여성에게, 여성의 말이 남성에게, 그리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고 하여 말은 많은데 대화는 없더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치관의 단절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는 옳다고 하는 일이 저 사람에게는 옳은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 사람은 애국적인 일이라며 열심히 한 일이 저쪽에서 볼 때에는 애국이 아닌 매국과 반역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 세대가 그래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편에서는 절대로 잘못 되었다는 데 저편에서는 절대로 옳은 것입니다. 이처럼 전혀 가치관이 다르고, 그러기에 판단 또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는 도덕의 단절입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옳고 그름에도 생각의 일치를 볼 수 없는 엄청난 괴리와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또 하나, 그것은 학문의 단절입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각 분야마다 세분화된 전문적인 시대가 됨으로 자기의 연구 분야 외에는 알 수가 없고 물론 관계할 수도 없습니다. 언젠가 한번 미국 병원 잡지에 실린 논문을 읽고는 혼자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라 할지라도 너무나 세분화된 영역, 즉 예를 들면 내과에서도 무슨 내과 무슨 내과 하는 식으로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환자가 와도 진찰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리 가시오" "저리 가시오"하다 보면 이제는 결국 환자 자신이 의사를 찾아가는 길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디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의사들에게 일반적인 의학을 보다 많이 가르쳐야 되겠다는 자성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인체를 다루는 의학의 세계가 그렇다면 다른 세계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즈음 "공부를 하나 안하나 무식하기는 매일반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차피 무식하기는 마찬가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공부 좀 많이 했다고 하여 특별히 유식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분야 외에는 모르는 세대! 이러한 문제의 세대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흡수되지 않을 때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답답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누구든지 그런 경우가 되면 "미치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왜 이렇게 통하지 않느냐며 밖을 향해 이해를 촉구하고 있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생각은 없고 이해해 달라고만 하니 이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나를 이해 못한다면 내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듣고, 자식으로부터 들으며, 스승으로부터 듣고, 제자로부터 들으며, 젊은이로부터, 어른으로부터 듣는 그런 마음, 그런 자세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듣고 받아들이는 바가 전혀 없는 답답한 저들 세대를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매우 장난기 섞인 비유를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없는 어린애들의 노는 모습 그대로를 옮겨 진리 앞에 무감각한 세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저희들끼리 놀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피리를 불면 너희들은 춤을 추어야 하는데도 왜 춤을 추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애곡을 하면 너희들은 가슴을 치며 따라 울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며 답답해하는 것과 같은 너희들, 이 세대가 마치 그와 같으니라! 여러분, 아이들의 놀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른들을 모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곧 어른을 알 수가 있고, 나아가 그 세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는 맹모삼천지교의 이야기가 두고두고 자녀 교육을 위한 귀감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은 어른을 보며 자라고 어른을 모방하기 마련입니다. 현대의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장난감에다 텔레비전이다 뭐다하여 보고 노는 것도 복잡합니다만, 그 옛날 2천여 년 전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보고 놀만한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시에 있어서 저들이 볼 수 있고 흥미 있는 가장 큰 구경거리는 장례식과 결혼식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 두 가지 예가 오늘 여기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어린이들은 밤낮 권총만 차고 다니면서 전쟁놀이만 하고 있으니 생각해 볼 문제요 그러자니 장난감의 종류도 총이나 탱크, 비행기 등 전부가 그런 것들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현상을 관심 있게 보아 두셨다가 다 아는 사실인 그것을 내어놓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놀면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춤을 추라며 피리를 불었으면 너희들은 춤을 줘 주어야 되지 않아? 그리고 장례식 흉내를 내자고 울면 너희들도 가슴을 치며 따라 울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러고만 있느냐?"며 정말 답답해 하더니 이 세대가 꼭 그와 같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곧 진지함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마음이 열리지 않는 데에는 자기 자신의 기준이 되는 자기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경험이나 지식을 절대화하여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열려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특별히 세례 요한의 말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 이유는 먼저 자기 공로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나오면 "당신들은 참으로 훌륭하오, 정말 대표적인 종교인들이오, 하늘 나라야말로 바로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오."라고 일단 인정해 놓은 다음, 일반 사람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든지 속물이라고 하든지 했으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기분이 좋았겠는데 그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같이 죄인 취급을 하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며 마구 호령을 쳐대니 이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저들이 생각할 때에는 나는 저 사람들, 저 속물들하고는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닌데 왜 같이 취급하느냐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을 훌륭하게 보면서도 훌륭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나는 저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교회에 나오면서도 특별 대우를 받기 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 : 9-14)를 비유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오늘날에도 나를 저들과는 달리 특별 취급을 해준다면 예수를 믿고 그렇지 않으면 안 믿겠다는 태도가 있습니다만 세례 요한은 그가 누구든 그의 종교적인 신분도, 그의 의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다 독사의 자식이라며 같은 죄인으로 취급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저들은 세례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저들의 외식주의입니다. 저들의 위선과 그 외식주의에 세례 요한이 동참해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화려한 옷을 길게 입고는 점잖은 걸음걸이로 다녔으며, 길거리의 한복판에서도 "오 하나님"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할만큼 눈에 띄는 굉장한 종교적인 생활을 하였던 것에 비해 세례 요한의 생활이란 약대털옷에 허리에는 가죽띠의 험상궂은 모습에 막대기 하나를 들고는 광야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이것은 자기들의 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고약해서 이렇게 되면 곧잘 상대방을 고발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가만히 보면 사치한 사람은 검소한 사람을 비난하고,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을 비난합니다. 이는 왜냐 하면 나의 이 게으름도 다 같이 게으르고 보면 그대로 괜찮은데 부지런한 몇 사람이 있음으로 이제는 별수 없이 나의 게으름이 노출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감추어지기도 어렵고 받아들여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면 나 또한 함께 거짓되어야 저들이 받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 위선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례 요한 앞에서 그 위선과 거짓이 다 노출된 채 꼼짝을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러자니 못마땅한 것은 물론이요,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그 순서를 조금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으니라! 내가 이렇게 "아이고 아이고"하며 애곡을 하면 너희들도 따라 울어야 무엇이 좀 될 것이 아니냐? 그런데 같이 놀면서 나는 우는데 너희들은 왜 울지 않느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곧 세례 요한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종교의 두 형태 중의 하나인 금욕적인 종교를 내어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적어도 종교적인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먹을 것, 입을 것 등 제반 생활에 있어서 절제하고 극기하는 금욕적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자신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했던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라! 회개하라!"고 계속 외치면서 저들의 통곡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진정으로 회개해 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 자신이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다음으로는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하는 것으로 이는 잔칫집을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례 요한의 생활은 상갓집 같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잔칫집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주된 메시지는 언제나 기쁨과 평화, 그리고 잔치로 일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잃은 양을 찾은 잔치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까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도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9 : 15)며 메시야인 당신이 함께 하고 계심을 혼인집 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매우 대조적인 체격의 동기 동창인 목사님 두 분이 앉아 농담을 하시는데 그 내용이 우습기도 하고 둘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은 아마도 90kg은 쉽게 나가 보일 정도로 몸집이 크고 굉장한 분입니다. 그래서는 목이 굵고 배가 앞으로 나왔는가 하면 그야말로 기름이 번들번들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 분은 또 너무 여위어서 조금만 더 살이 빠지게 되면 정말 문제가 될 정도로 빈약하게 생긴 분입니다. 이제 이 두 분이 앉아서 하시는 농담으로 좀 비대한 목사님이 여윈 목사님을 향하여 "목사가 저렇게 말라서야 무슨 은혜가 있겠나! 목사가 자기 마음에도 은혜가 없어서 저렇게 삐삐 말랐으니 어떻게 되겠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윈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세상에 이렇게 죄악된 것을 알면서도 살이 피둥피둥 찌다니 어디 저게 목사인가!"하고 나오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둘 다 옳은 말입니다. 사실 이 험한 세상을 보노라면 우리가 이렇게 안일하게 살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정말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만을 일삼아도 부족할 것이겠지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에 육체의 살도 풍성한 모습으로 찌워져야지 염려될 정도로 마르고 빈약해서도 안될 것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의 말씀입니다. 분명 세례 요한은 금욕적인가 하면 예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심지어는 금식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도 혼인집 잔치임을 말씀하실 정도로 기쁨과 잔치의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기쁨! 죄인 하나가 돌아옴으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돌아온 탕자의 집이요, 나아가 잔칫집입니다. 따라서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황홀한 감격으로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계속적인 잔치의 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문제는 당시 저들이 이 둘 모두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떡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금욕 생활을 하였더니 마침내는 "귀신이 들렸다"며 미치광이 취급을 하였고, 이제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죄인들과 친하다 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며 아주 세속주의자로 몰아버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중공에도 교회의 문이 열렸기 때문에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 목사님들도 자주 출입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에게 중공 현지의 교인들이 솔직히 하는 말이 "미국 목사님들 이제 그만 왔으면 좋겠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이유인즉 미국에서 오는 목사들을 보니 하나같이 왜 그렇게 배가 나왔는지 도대체가 뚱뚱하고 번들번들한 게 보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친 모습으로 삐삐 말라 있는 처지인데 살이 피둥피둥한 사람들이 좋은 옷에 여유 있는 모습으로 왔다갔다하니 그것을 보는 마음이 좋을 수가 없지요. 게다가 그 사람이 목사님이라니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은 반가웠으나 이제는 그렇지를 못하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여! 금욕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종교 생활이 저 모양이며 무슨 메시야의 생활이 저러느냐는 것이지요. 게다가 좀 구별되고 깨끗하게 지내야지 세리와 창기,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지낸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법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들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이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욕적인 것도 신앙 생활에 귀한 것이요, 또한 먹고 마시는 것도 기쁨에 동참해 주시는 것이니 영광스럽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이 보는 사람에게는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쁘니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불가능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저들의 그 오해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금욕적이라 비난이요, 저렇게 하면 세속적이라 비난이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래도 저래도 오해는 오해대로 따르고 있었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다 귀한 것이 되지만 믿음 없이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언제나 오해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도 보면 교회를 짓는다거나 값나가는 물품을 마련하게 되는 경우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다 교회를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되기 마련인데 그렇지를 못하고 나쁘게만 보는 사람은 교회가 어쩌자고 그렇게 큰돈을 낭비하느냐며 당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매사를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귀한 것을 보고, 은혜로 내려진 것을 대하여도 이를 소화할 길이 없으며 중용을 취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러한 무반응과 불신의 세대를 역력히 비판하시면서 동시에 심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역시 지혜 있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들으면서 회개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면서 세리들과 함께 그 잔치에 참여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둘 다가 마음에 걸려서는 이리 하여도, 저리 하여도 거치는 것으로만 다가오게 됩니다.

지혜는 바른 응답에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며 회개와 금욕을 촉구하거든 거기에 따른 바른 응답으로 하나님 앞에 재를 무릅쓰는 회개가 있어야 하겠지요. 또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영광을 돌릴 때에는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어둡고 괴로운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생각하며 감사와 찬양을 마음껏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른 응답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응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응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한 지금 어떻게 응답되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향하여 자기의 의를 완전히 버린 진정한 회개가 있어지기를 바라시면서 피리를 부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지난날 지었던 자신의 죄나 오늘의 근심 걱정은 다 잊어버리고 어린 양 잔치에 초대받은 기쁨으로 춤을 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는 이것이 곧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른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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