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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참새와 머리털(마태복음 10 : 24 - 3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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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와 머리털(마태복음 10 : 24 - 33)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의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앞장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끝까지 양으로서의 승리를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그 내용의 주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양으로 하여금 이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요, 용기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하나씩 하나씩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예고된 고난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양이요 세상은 이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너희들은 핍박과 고난은 물론 죽음까지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된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경험했거나 아는 대로 그럴 것이라고 예고된 일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대체로 보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갑자기 당했을 때 그 놀라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저 있을 것이 있어진 것일 뿐 특별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시는 의도는 환란이 있겠고, 핍박이 있겠으면 너희들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니 미리 그것을 알고 준비하라는 예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미리 예고된 사건인 어떤 환난을 당하게 되거든 그것을 당연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슨 일이 닥칠 때마다 주님께서 예고하신 그대로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할 것이 없어야 하고 따라서 의례히 그럴 줄 알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가 다시 논할 것이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이는 주님께서 있으리라고 하셨기에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 뒤에는 지금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선교 신학상으로 보면 환란과 핍박 없이 선교가 되어진 일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혹 어쩌다가 되어져도 그것은 믿을 것이 못되고 따라서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믿음은 핍박 속에서 진실하며, 핍박 속에서 선교가 가능하고, 핍박 속에서 질적으로 성장합니다. 교회는 핍박없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핍박없이 세워진 교회, 핍박을 모르는 믿음은 선교상으로 보면 훗날 핍박이 오면 다 무너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핍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야 그 복음의 내용이 순수하며 따라서 끝까지 인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8장을 보면 핍박 속에 쫓겨다니는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서 참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전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쫓겨다니는 몸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저들은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을 하였겠습니까? 만약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였다면 아마도 "당신이나 복 많이 받으시오"라며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쫓겨다니는 신세에 누가 누구를 보고 복을 받으라는 것이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언제나 순수하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런 핍박도 없이 좋은 여건에서 편안히 전해지게 되면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순수하지 못한, 소위 혼합주의에 빠져 그 신학 사상 자체가 잡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상에 나타난 복음 전파의 과정이나 선교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내려질 수 있는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는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우며 많은 희생을 치른다 하여도 별다른 도리가 없는 일이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선 동구라파와 서 구라파를 두고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제 자유가 있고 교회 건물이 많은 서 구라파에는 오히려 교회에 나오는 교인이 적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나이 많은 노년층의 교인이요, 질적인 면에서는 다 타락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핍박이 심한 동구라파의 경우에는 오히려 더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모이며 그리고 거의가 젊은이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 항가리(Hungary)의 목사님께 들은 바로는 1년에 약 300명씩의 교인들이 순교를 당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거기에는 교회가 많으면 특별히 체코슬로바키아나 항가리 같은 데의 교회에는 거의가 젊은이들로 꽉꽉 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기 좋은 나라 덴마아크의 코펜하겐보다 모스크바 교회의 주일 예배 참석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교회는 핍박 속에 자라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핍박은 예수님께서 이미 있으리라고 하신 것이기에 두려워할 것이 없는 핍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다면," 다시 말하면 "선생이요 주인격인 나를 바알세불이라고 하였다면, 너희들을 보고야 무슨 소린들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귀신의 왕자를 힘입었다는 것인데 이는 나쁜 뜻 그대로를 직역하면 미쳐도 크게 미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고도 이렇게 미친 사람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너희를 보고야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 그러니 처음부터 박해를 각오하고 출발할 것이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새삼스럽게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생각할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유는 비밀, 곧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지금 내가 조용하게 귓속말처럼 전하고 있지마는 언젠가는 온 세계에 전파되리라고 말씀입니다.

사실 그러한 때가 지금 왔어요. 이제 여기에서 이렇게 한번 설교를 하게 되면 이 설교가 녹음이 되고 이것을 방송국에서 전파로 띄우게 되면 전 세계에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못 가는 곳에도 소리는 전해질 수가 있어서 중공 같은 공산권 국가에서도 이 방송을 들은 후 곧잘 편지를 해 오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조용하게 전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사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이렇게 놀랍도록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이를 위해 한두 사람 희생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으며 비록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복음의 그 위대한 사역! 이것을 너희가 알고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로서는 인간들의 재주부림따위, 곧 권모술수 같은 것들이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는 것인데, 이미 드러나 있음은 물론 앞으로도 드러날 것이요, 최종 승리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적인 계책으로도 진리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번째 이유로서는 거룩한 두려움이기 때문에 속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진정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자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가만히 보면, 진정 두려워해야 할 자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에게만 두려워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 중요함을 모르는 채 시시한 것 가지고는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전적으로 가치 판단이 잘못된 그러한 생각과 현상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로 중요한 문제란 어떤 것입니까? 이는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매양 "공부하라, 공부하라"고만 하다가 어느 날 병이라도 덜컥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그 때에는 "이제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다오"라며 애원을 하게 되는 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실은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먼저요, 또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우선 되어야 함이 당연한 것인데도 진정 중요한 것들을 다 끊어버리고 시시한 것을 문제 삼아 마음을 쏟다가 뒤늦게 그 잘못을 뉘우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진정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입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여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결코 인간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인간이 나를 해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겠습니까? 나의 재산을 빼앗고, 명예를 짓밟으며, 마지막에는 나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까지는 괴롭힐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육체의 범위 내일 뿐 그 이상의 것에는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옛날부터 들어 온 이야기 중에 자기의 원수를 갚겠다고 찾아다니던 사람이 뒤늦게는 그 원수가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되자 마침내 그 무덤을 파헤쳐 썩어 냄새나는 시체에게라도 보복을 하고자 매질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하여도 결국 사람은 죽는 것으로 다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목숨이 다함으로 끝나는 인생!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볼 때에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 몸은 죽여도 영은 죽이지 못한다! 이제 죽인다고 하여도 육신까지 일 뿐 그 이상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요, 그렇다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할 때에 그것은 죄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영까지 죽이는 자! 여기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지옥의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몸도 죽이고 영혼도 지옥으로 보내시는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정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게 되면 작고 시시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제 손해를 좀 본들 어떻게 핍박을 당한들, 무슨 걱정이냔 것입니다. 다만 참으로 두려워할 분만 두려워하게 되면 모든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큰 걱정을 하게 되면 작은 걱정은 없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도 우리에게 걱정거리가 많은 것은 그만큼 시시한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인류의 존망(存亡) 위기에 대한 실로 엄청난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모습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워하게 된다면, 이제는 누가 나에게 관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나 남편의 귀가 시간이 이르거나 늦는 것 따위는 신경쓸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문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보면서, 그 앞에서 나를 세우고 생각하노라면, 도대체 지금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또한 ''라는 것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만성이 되어서 그렇지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한다면 결코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두려워할 자인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그것을 곧 경건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보면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느냐 하는 이것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내 앞에 닥치는 물질적인 손해나, 명예 훼손, 그리고 소원의 성취 여부 같은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두려워할 자를 한번 두려워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연세가 많으신 한 부인이 오셔서 자기의 처지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이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아 오셨는데 얼마 남지 않은 이제 와서 무얼 그러시느냐?"고 했더니 그 부인의 대답이 아주 재미있게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 동안이라도 제대로 살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 고생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요"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제가 한 마디 해보았습니다. "가령 부인께서 지금 헤어지겠다는 그 남편이 오늘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본 결과 6개월밖에 못 산다는 진단이 나왔다면 그래도 이혼을 하시겠습니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그러면 불쌍해서라도 살아줘야겠지요 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6개월만 같이 산다고 생각하시고 우선 6개월만 살아 보시라고 하였더니 그러고 가서는 지금까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문제들을 좀 더 종말론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삶을 얼마나 살겠다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까지 하는 것이냐 말입니다. 이제 곧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주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에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면 그 외에 무엇이 더 그렇게 중요할 게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가장 두려워해야 할 자를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문제 삼아야 할 것을 문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핍박이나 환란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내가 예수님을 배반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름 아닌 이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고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란 하나님의 경륜적인 보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보호하시고 저들을 위해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안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비둘기가 아니고 구태여 참새냐는 의문을 갖게도 합니다마는 이는 참새가 가장 싸구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한 앗사리온이라는 것은 낮은 단위의 동전 한 닢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 126절에서는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며 그 값어치의 하찮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계산상의 차이는 조금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그 뜻은 가장 천하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며, 그런 하나님께서 하물며 인간을 그것도 그리스도인을 보호하시지 않겠느냐! 더우기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보호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지만 아무렇게나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친히 함께 하시고, 말씀이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저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지키시거늘 하물며 너희를 지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위로의 말씀이요,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나 위험한 지경에서도 고물에 누워 평안히 주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놀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구원을 청하자 저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시며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8 : 23 - 26).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도대체 무슨 걱정이냐? 풍랑이 일어났다고 하여 빠져 죽을 것으로만 생각하느냐? 절대로 그럴 것이 아닌데 왜들 이 모양이냐며 저들의 적은 믿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 본문의 30절 말씀을 보면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참새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은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이요, 이 머리털이라는 것은 그 생명의 부분을 말하면서도 가장 작은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체 부분 가운데에서 가장 소홀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발가락을 다쳐도 아프고 손톱을 뽑아도 아프며 몸의 그 어디를 다쳐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머리카락 하나쯤은 뽑을 때 조금 따끔한 순간이 있기야 하지만 그것은 고통이라 할 것도 없고 또한 몇십 개쯤 없어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실은 다 없어진다고 하여도 생명 자체의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 이 머리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 몸의 그 수많은 부분 중에서 가장 작고 하찮은 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헤아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사방 1인치 내에 600-700개가 되므로 이를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보통 한 사람의 머리카락은 3-5만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루에 30개 정도 빠지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빠진다고 걱정하거나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빠지면 그만큼 또 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는 이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몸의 어느 작은 부분 하나가 상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 밖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서든 핍박을 받아 매를 맞으며 팔다리가 부러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가 빠져 없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헤아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니 몸이 다칠까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 소유와 몸에 관계된 모든 지체의 가장 작은 부분에까지 주관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에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의 가장 중요한 의도는 전도자의 걱정 제 1호가 되는 죽음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양으로서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겠으니 이제 비참하게 죽을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됩니다마는 정말 해야 할 걱정은 내가 핍박과 환란 속에서 예수님을 모른다며 배교를 할 것이나 아닌지, 그리고 복음을 본질 그대로 바로 전하여야 되겠는데 혹시라도 잘못 전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하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 하면 이는 참새 한 마리까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의도는 육체적인 고통, 즉 상처가 나고, 사지백체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나 아닌지, 또한 나와 관계된 가족과 재산 등은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되겠는바 거기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이 곧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할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지키시고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신 하나님께서 너희도 지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계속 전개되어 나가면서 전도자의 처지는 이런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에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여 자고 있는 베드로 곁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는 베드로를 깨워 쇠사슬을 벗겨진 상태로 감옥 문을 나오게 하는 기적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바울과 실라도 모진 매를 맞은 후에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도하며 찬송을 부르는 중에 옥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어지는 기적이 나타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16:19-26).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게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하였고, 집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참새의 생명도 주관하시고 머리털 하나까지도 새신 바 되셨다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호하시지 않아서 그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순교를 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그 점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 무엇 때문에 매를 맞아야 하고, 목베임을 당해야 하며,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데도 매를 맞았다고 하는 것인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충분히 보호하셨으며 또한 그 모두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의 여정에서도 보면 어떤 때에는 감옥이 열리기도 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일이 자꾸만 꼬여서는 로마에서까지 호송을 당하는가 하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6 : 7)고 하는 그의 고백은 아마도 그의 몸 어딘가에 큰 상처 자국이 남아 있음을 상상케 하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것들을 허락하신 것이겠습니까? 죄송한 말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상처는 하늘 나라에 가서의 훈장이겠기에, 그래서 허락하셨는지도 모른 일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로 오셔서 오랫동안 수고하시던 마포 삼열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그렇게 말재주가 좋으신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미국 각지를 다니면서 모금을 할 때이면은 놀랍게도 어디를 가든지 강당에 서기만 하면 선 그것만으로도 모금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목사님의 얼굴에 큰 상처 자국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왜 생겼느냐 하면 평양에서 전도를 할 때 어떤 불량배가 유리병을 깨어서는 목사님의 얼굴을 마구 찔러 깊은 상처를 내게 된 것으로 아무리 수술을 해도 그 자국이 그대로 깊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포 삼열 목사님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상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국에 가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그랬다는데"하고서는 그 상처 자국을 한번 쳐다보고 나면 헌금이 잘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분명 그분에게 준 훈장입니다. 이를 두고 만약 하나님을 향하여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다고 하셨는데 하필이면 왜 이렇게 얼굴에다 상처를 내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내가 훈장으로 준 것이 아니냐?"며 대답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복음을 전하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매를 맞고 재산을 몰수당하며 상처를 입어 몸에 흔적을 남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나, 몸의 지체, 그 전부를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고서는 가장 작은 것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돌보심!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하나님의 충분하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요한 웨슬레(John Wesley)"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기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어느 시각에 내가 죽었다면 그것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구원받을 때도 있고, 구원받지 못할 때도 있으며, 보호받을 때도 있고, 보호받지 못하는 때도 있으며, 어느 때에는 기도의 응답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생명, 우리 몸의 그 많은 지체의 가장 작은 부분과 그리고 재산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며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경륜과 그 사랑을 믿으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분명하신 주님의 음성은 두려워하지 말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마는,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부탁의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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