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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으로서의 양식(요 6 : 22~3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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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으로서의 양식(6 : 2231)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상에 없는 기상천외의 기적입니다.

가끔 주변에서 기적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그것은 둘이서 혹은 서너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으므로 때로는 의심도 받고 오해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은 오천 명을 앞에 놓고 행한 일이요, 오천 명이 다 같이 경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에는 오해나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깜짝 놀랐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놀람에 대한 반응이 문제입니다.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말이 아닙니다. 가령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 찌르면 그는 '아얏' 하고 반사작용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반사 또는 반응으로써 누구나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응답이란 찌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쳐다보고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빙그레 웃는 것으로써, 깊이 생각해서 행동하는 응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사란 반사신경에 의해 동물적으로 즉각 나타내는 것이고, 응답은 일단 깊이 생각을 하고 그리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몇 가지로 나누어서 앞장에서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처음 반응은 아주 단순한 어린이 같은 반사적인 반응으로 깜짝 놀랐고, 그리고 나서는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 응답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으로 깊이 생각한 응답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의 민족적인 소원이 독립이기에 언젠가는 솔로몬과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나타나 로마를 대항해서 소위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찾아 줄 지배자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이 메시야관은 성서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 나름대로의 메시야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고난의 메시야로 오셨는데 그들은 이적을 보고 영광의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영광의 메시야 됨에 대한 확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셋째 반응은 가장 유치한 생각으로써 물질적인 해결에다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앞으로 빵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라고 가장 현실적으로 나타난 반응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다음 날 많은 사람들이 어제 기적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모입니다(6:22).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6:24-25). 어느 때에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오셨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를 꿰뚫어 보시고 비판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사람들은 무지함을 지적해 주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물론 그들의 배고픔을 아셔서 채워 주셨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들이 왜 떡을 먹었는지 의미를 모르고 있음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떡을 먹고 배부른 일로 예수를 따른다면 얼마나 섭섭한 이야기입니까? 만일에 오늘 우리도 먹을 것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원문에 보면 '오크 호티 에이데테 세메이아'인데 세메이아는 표적이고, 에이데테는 본다는 뜻입니다.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의 단어는 같은 것으로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오"라는 말의 뜻은, 표적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보기는 보았지만 표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사건을 보았지만 단순히 떡으로만 생각했을 뿐, 말씀으로 표적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보았지만 못 본 것이 되고, 먹었지만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깊고 오묘한 말씀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동기가 기도로써 병이 나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표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변입니다. 병이 나았다고 해서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또 병에 걸리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병이 나았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만이 아니라 표적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신다면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들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병이 나았기 때문이구나" 병이 낫든지 떡을 먹든지 내가 처하는 사건 하나 하나가 모두 표적으로서,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현재적인 것 속에 영원한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떡을 먹었어도 병이 나았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뜻도 바로 이것입니다.

배고픔에는 육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배고픔이란 부정할 수 없는 절실한 문제입니다. 배가 많이 고프면 창자가 뒤틀리고 정신까지 흐려지며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떡으로만 보일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이 배고프면 물리적 현상으로 배가 고픈 것으로 끝나야지 배고프다고 슬퍼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고픈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팔자 타령하면 슬퍼하고 고독을 새삼 상기시킵니다. 배고플 때는 배만 고픈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몹시 주리게 되면 신령한 생각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기도할 마음도 없어져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흐려집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을 물질로 보고 모든 고난이 물질 때문이라고 속단을 하게 됩니다. 모든 심리적인 현상, 정신적인 현상까지도 물질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유물사관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자 헉슬레이는 사랑도 생식 본능의 발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보고 물질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사랑까지도 이렇게 비하시키는 것입니다. 소위 동물의 사랑과 인간이 가진 사랑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정면으로 말씀하셨습니다. 40일간 금식기도 하신 후에 그렇게도 주리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 인간이 주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주릴 수 없는 극한 지점에서 하신 말씀이었기에 더욱 귀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주렸어도 돌을 떡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떡을 위해서거나 사는 목적이 떡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것은 끝까지 신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계속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서는 배가 고플 때 눈앞에 있는 팥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장자 자리를 서슴없이 내 놓았습니다. 사실 팥죽 한 그릇 먹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며, 또한 조금 기다렸다가 먹어도 될 테인데 급하고 경솔하게 먹는 데 급급하여 장자의 자리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에서와 야곱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주렸다 해도 물질은 물질이요 영은 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이 배부르다 하여 영적인 기갈까지 해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밥먹는 것은 밥먹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따로 먹어야 합니다. 아니 육신적인 배고픔보다 더 민감하게 영적인 배고픔에 대한 갈구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한 굶주림과 기갈을 먼저 생각할 줄 알고 거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상징을 알고 표적을 아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영은 영으로 분별하며 영은 영으로 배부릅니다. 물질로 영을 배부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심령적으로는 계속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의에 추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5:3, 5:5) 이 말씀도 항상 신령한 것에 대한 가난을 알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명상의 시간을 가져서 하나님과 깊이 사귀어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희극배우 메리 류라는 사람은 세계를 두루다니며 공연을 하여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대단한 재주를 가진 분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매우 우울하고 마음이 아파서 견디다 못해 어느 정신과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그를 여러 방향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자 세계 여행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세 번씩이나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왔으므로 여행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함을 말하자, 의사는 마지막 처방으로 런던에 가서 유명한 희극배우 메리 류의 연기를 일주일 동안만 보고 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조금 있다가 "그 배우가 바로 []입니다"라고 씁쓸하게 자기 신분을 밝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기갈은 신령한 것으로 채워야지 이 세상의 어느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때로 술이나 오락으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6:2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태반의 수고가 사실은 썩을 양식을 위한 일입니다. 썩고 부질없는 일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뛰고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 보면 어차피 썩고, 버려두고 갈 것인데 그렇게 탐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음식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했으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많이 먹고 맛있게 먹으면 행복한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컷 먹고 나면 정말 괴롭습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께서 우리 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의 위암 발생률을 비교했는데, 우리가 40% 인데 비해 일본은 5% 라고 합니다. 우리들과 일본의 음식도 거의 비슷한데 왜 이렇게 차이가 많습니까?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첫째가 과식이라고 합니다. 위병을 치료하려고 보면 거의가 위하수로 위가 축 늘어졌다는 것입니다. 미련하게도 숨을 못 쉴 때까지 채우니 그럴 법도 합니다. 위는 70% 이상 채워서는 안 됩니다. 음식을 탐하는 자는 누구나 인간답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구절에 주를 하나 달면 "어차피 먹을 양식이니 적게 먹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결국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뜻입니다. 사실 어떤 음식이든 처음 몇 술이 맛이 있고 절반쯤 넘어가면 그저 그렇습니다. 배속에서는 그만 먹으라는데 욕심을 내어 자꾸 먹는 미련한 짓은 이제 그만했으면 합니다.

믿는 사람은 식사도 신앙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건강에 이로울 때까지만 먹어야지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나만 그렇게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몸에 이롭게 적당히 먹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열심히 일하자는 것입니다.

세계의 영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날 때 유언을 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관에 두 구멍을 내어 손을 내어놓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구멍을 뚫어 손을 내놓으니, 관을 메고 가는데 두 손이 양쪽에서 털렁털렁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설교로써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말하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 살아 생전에 세계를 흔드는 왕이었지만 결국 이렇게 빈손으로 가니 너무 욕심들을 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귀한 말씀에 다시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6:28)라고 공로적이거나 종교적 행사 혹은 의식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거창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야단스럽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도 바리새 교인도 아닌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혹시 우리도 목사나 전도사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필자는 신학대학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의 면접에서 왜 신학교를 택했느냐고 물어봅니다. 많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본문에서 군중들이 이 질문을 하는 의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종교의식을 본업으로 하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 즉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답변입니다. "보내신 자""믿는 자"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내신 자"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써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오늘 구체화되어서 여기에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구원 사역의 구체적인 역사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음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루터는 "신앙이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지금 내가 사는 생활 전부가 은혜요 기적이요 표적임을 알게 되고, 살아있는 말씀에 바른 응답(right response)을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에게 재주가 있습니까? 그 재주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줄 알고 그 재주로 열심히 일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재주가 없으면 없는 대로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찬양하고, 청소하는 일에 자신이 있으면 열심히 청소하고, 심방 하는 일에 소질이 있으면 심방하고, 얼굴이 예쁘면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분위기를 줄 수 있으니 밝게 웃으며, 무엇을 하든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다시 종합하면, 보내신 자, 즉 하나님의 구속 현재성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오늘 내게 여기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열심히 가르치되 목적은 하나님께 두고, 배우는 자도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내 현실 속에 구현하는 일에 가담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또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6:30 상반절). 표적을 지금까지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표적을 묻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하는 사람, 즉 표적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찾아도 안 됩니다. 교만한 사람,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표적으로써 표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생활 전부가 표적이요 기적이며 은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며, 이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표적을 알고 그것으로 감격해서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왔다고 칭찬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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