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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 선물(4장 14절~20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대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미 앞 장에서 말씀드린대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빌립보 교인들은 성금을 모아 자기네 교회의 교역자 편에 로마에 보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선물을 받자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목사가 기후가 다르고 긴 여행에서 온 피로 때문인지 로마에 와서 병을 얻어 사경(死境)을 헤매게 됩니다. 이미 2장에서본 것처럼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큰 걱정을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또 에바브로디도 자신도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죽고 사는 일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는 문제가 좀 복잡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에서 보면 자기를 돕기 위해 왔다가 여기서 죽고 말면 빌립보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미안한 노릇입니까? 또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도우려고 그를 보냈는데 거기서 죽고 말면 바울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편하게 해드리려 하다가 더 많은 근심과 걱정을 드린 것 같아 괴로워할 것입니다. 한편 에바브로디도 자신도죽는 것은 괜찮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바울 선생님과 빌립보교인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사방으로 걱정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삼자(三者)가 다같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한가지 공통된 특징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상대방을 염려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주셔서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바울은 건강해진 에바브로디도를 한시바삐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의 병이 나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그를 돌려보내면서 쓴 것이 이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시종일관 감사로 넘쳐 있습니다. 그 동기도 내용도 고맙다고 하는 일종의 감사장(感謝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마감하는 순간에 또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선물 받는데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물이란 크고 작은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에서는 상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주고받았을 때, 그것을 물질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것을 정신으로 마음으로, 정성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혹 선물을 받았을 때, 이것 얼마짜리다 하고 돈으로 계산하면 되겠습니까? 가끔 결혼식장에서 보면 어떤 하객은 답례품으로 받은 것을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는 "거 괜찮은 것인데?" 하고는 들고 나갑니다. 이것은 재미없는 태도입니다. 사랑으로 주고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선물로 해서 서로가 고마움을 느끼고 서로의 관계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어 더욱 돈독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얼마만한 선물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감옥에서 이 선물을 지극히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14절에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참예한다는 말을 '슁코이노네산테스'인데 이 말의 뜻이 참 중요합니다. '쉰'이란 '함께'라는 말이요 '코이노니아'는 '친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친교한다 참예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1장 7절에 "내 은혜에 참예했다"고 하였고, 4장 11절에는 "나의 괴로움에 참예했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다른 말로'기쁨'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기쁨과 괴로움에 참예한 것을 말하며, 그는 이것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세계적 대가인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저서에「Responsible Self」라는 책이 있습니다.「응답받는 자아」라고 번역되는데, 책임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수단과 방법이라도 다 쓰는 사람,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도 있고,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남이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나오는 강도와도 같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때려눕혀 돈 몇 푼이나 옷가지만 뺏어 가면 그만이요 그가 죽든지 살든지는 상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규범에 전적으로 예속된 사람입니다. 도한 자기 규범에 매인 사람입니다. 어떤 규례를 딱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것을 지키는, 요새말로 하면 지성인입니다. 이 역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할 것 없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이나 제사장 같은 사람입니다. 여기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이 사람 돌보다가 제사드릴 수 없다, 그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시체 만진 부정한 손으로도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사장으로 하나님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이 사람 죽고 사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사람입니다. 자기
규범에 매여 살고 또 어떤 공동체 규범을 철저하게 지키면, 그것으로 자기 할 일 다한 줄 압니다. 다시 말하면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았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 도와주지않은 것도 살인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책임적인 존재, 곧 responsible self입니다. 이타적(利他的)이며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잘못된 것도 나 때문이고, 다른 사람 가난한 것은 내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의 것까지 내가 책임을 느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회가 잘못된 것도 나의 책임이요 이 세상이 잘못된 것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고 느낄 줄 아는 올바른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너는 왜 공부를 못하느냐, 나는 할일 다 했는데"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 같다" "네가 공부 못하는데 대한 책임의 절반은 내게 있다"고 느낄 줄 아는 부모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람은 세 번째의 '책임적인 존재'로,함께 느끼고 함께 체험하고 함께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여, 바꾸어 생각해 볼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부자라면 가난한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내 아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잔치라도 열고 싶도록 기쁘지만 옆집 아이가 낙방을 했다면 자신의 그 기쁨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알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환산할 줄 압니다. 이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돈 몇 푼 집어 주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혹 사랑하는 자녀가 몸이 아파 열이 40도를 오르내리고 숨차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부모된 마음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창세기 21장에 보면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나 들을 헤매다가 물이 없어 아들이 목말라 죽게 됩니다. 하갈은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어 서 아이를 내버려둔 채 멀리 도망가 앉아서 웁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자가 물 있는 곳을 알려줌으로 그 아들을 살려냅니다. 여기서 죽어 가는 아들을 볼 때의 하갈은 자기 자신이 죽을 지경이 된 것보다도 더한 고통을 느낍니다.
우리는 남의 아픔과 기쁨을 나의 아픔과 기쁨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의 아픔은 이해하나 기쁨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게 괴로운 일이 있을 때에도 상대방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할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서 당하는 고통을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도 바울이 감옥에서 받은 신령한 기쁨에도 함께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에 동참했고, 고난에 동참한 것,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구체적으로 이런 일에 참예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요새 젊은이들의 말대로 텔레파시가 통합니다. 그 마음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꿈으로도 전달됩니다. 그 쪽에서 괴로움을 당할 때에 이쪽에도 그 괴로움이 전달됩니다. 가끔 꿈에 아버지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문안하고 갔는데 바로 그 시각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기도하든지 진심으로 기도하면 그의 기쁨과 고통이 전부 나 자신에게 전달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 안에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둘째,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참으로 사랑하면 나는 작아지고 상대방은 커집니다. 나는 중요하지 않고 그 쪽만 중요합니다. 옛날에 우리가 가난하게 살 때에 흉년이 들면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배가 터져 죽고 어른들은 배가 고파 죽는다." 부모들이 배가 고프니 아이들 배고플까봐 자꾸 먹이는 바람에 아이들이 과식을 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만 먹이느라고 굶어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부모 자신은 못 먹더라도 자녀들이 먹는 것을 보면 기쁜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로 참예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을 보냈습니다. 저들은 보내는 만큼 물질의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물질이 오고감으로 구체적인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 할 때에도 실제로는 물질만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마음도 함께 갑니다.
선물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선물이 가면서 마음도 함께 갑니다. 이래서 동참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잘한 것이라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5절에는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은혜를 아는 교회이나, 다른 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런 일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니요 전에도 한두 번 도운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역시 선행은 우연이 아닙니다. 은혜도 역시 순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빌립보교회가 평소에 늘 사도 바울을 도와 오다가 이제도 돕게 된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도세오스 카이 렘프세오스'로 영어로는 'giving and receiving'의 뜻입니다.
주는 일 받는 일에 참예했다는 것은 바로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세상은 주고 받으며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만 주기만 하고 사는 것처럼 생각하며 "나는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는 받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은 주고받는 일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인격으로 말한다면 "나는 많은 것을 받았고 그리고 주기도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주기만 한다"거나 "나는 받기만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give and take'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인격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주기만 하면 교만해지고 폭군이 되고 왕이 됩니다. "나는 주기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남에게 신세진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워낙 가난해서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받을 자격이 있다" 또는 "내가 주기는 무엇을 주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언제나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꼭 물질로 주고 물질로 받아야만 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물질을 받으면서 "정말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할 때, 그 인사말 한 마디도 역시 '주는 일'이 됩니다.
요즘은 월급이 온라인으로도 오니까 재미가 덜하지만, 월급 봉투 가지고 오는 날, 주부는 하다못해 동태찌개라도 끓여 놓고 기다렸다가 남편이 봉투를 내놓으면 "당신 우리 벌어 먹이느라 한 달 동안 고생이 많았어요"하고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또 "무슨 소리! 내가 뭘 대단한 일 했나? 봉투가 얄팍해서 미안하구만." 이래야 주고 받는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월급을 내놓으면서 "나는 죽으라고 고생해서 벌어오는데……"하고 받는 쪽에서는 "나는 밤낮 얻어먹기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양쪽이 다 잘못된 것입니다. 잘 버는 것도 버는 것이요 잘 쓰는 것도 잘 버는 것입니다. 아껴서 살림 잘하는 것도 버는 것이니까
비굴해질 것 없습니다. 어쨌건 부부간에도, 아이들 사이에도 주고받는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 부모가 해주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받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작은 심부름이라도 기꺼이 합니다. 또 어머니 생일이라고 돼지 저금통을 깨뜨려 선물 한가지라도 사오면 어머니가 여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그 돈이 다 누구의 돈입니까? 그렇지만 그런 일이 어머니를 기쁘게 합니다. 이 주고받는 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학적인 견지는 고린도전서 9장 11절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것을 주고 물질적인 것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영생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큰 것을 전해 주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 고생할새라 다소간의 물질을 모아서 "우리는 너무나 귀한 것을 받았습니다. 약소하나마 다음 마을에 전도할 때에 쓰십시오." 하고 전도 비용으로 드리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그런데 주고받는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교회는다 받기만 하고 그만입니다. 받았으면 주는 마음도 있어야 하나,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지금 누구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빌립보교회를 칭찬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다 인사가 없었으나 이 교회는 처음부터 받은 바에 대하여 보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주고받는 일이 없는 생활은 메마른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에는 영적인것 이외의 생활에도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항상 받으려고만 하고, 받기만 할 뿐 자꾸만 더 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유인의 인간관계란 주고받는 일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는 매우 주의 깊은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고맙다 잘했다 칭찬하고 보니 마치 더 달라고 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오해를 무릅씁니다.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좋은 일을 계속하는 것이 체질이 되고 생활화되어 한두 번에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제 칭찬하는 것은 이 일을 지속함으로써 "너희의 생활에 윤택함이 있고 은혜가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어서 18절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라고 준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받았고 빌립보 교인들은 주었는데 그 성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준 것으로 풍족하다 했습니다. 이것은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준 사람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받는 마음이 좋아야 합니다. 비록 적은 것을 받았지만 소중히 여기며 '고맙고 풍성하다' '이것이면 넉넉하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받은 바에 대해 언제나 '족합니다' '넘칩니다' 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풍족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빌립보교회가 보내온 것이 그런 형편에 뭐 그리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바울의 은혜로운 마음은 만족하고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둘째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라고칭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마 10:40)" 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영접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니 주님이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그에게 보낸 성금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향기로운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렸기에 하나님 앞에 그 제물이 상달되었습니다. 둘째,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낙헌제(樂獻祭)입니다. 하나님이 드리라고 해서 드리는 것과 내가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자원적으로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드려 복을 받겠다는 마음으로나 다른 사람들이 얼마 드리는지 보아서 나도 드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미국에 유학간 한 소령이 친구를 따라 주일날 처음 교회에 갔습니다.
헌금 시간에 은쟁반으로 된 헌금대가 자기 앞으로 옵니다. 남들이 넣으니 부득불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1불짜리가 없어 할 수 없이 5불넣고는 옆의 미국 친구가 얼마 넣는지 몰래 살펴보았습니다. 그 사람도5불을 내기에 "아 5불이 평균이면 내가 실수한 것은 아니구나"하고 있는데 5불을 넣은 이 친구가 4불을 거슬러 갑니다. "아차, 그것을 몰랐구나"하고 소령은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 이 사람은 헌금을 한 것입니까, 하지 않은 것입니까?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치는 마음 그 자체를 감사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런 제물이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드린 것을 가리켜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신학적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채우시리라' '프레로세이'는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바친 일은 절대로 손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경험해서 아는 사람은 절대로 인색하지 않습니다. 많은 재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이 반드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또 "그의 풍성한 대로(according to God s riches)"채워 주십니다. 자, 사람의 손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크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한다고 해야 그거 다 시시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그 풍성한 손으로 채워 주십니다. 채워 주시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 넘치는 사랑 안에서, 구속적인 엄청난 사랑 안에서 채워 주십니다. 영광 가운데서 말입니다. 땅에서만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통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한 선한 일이요 사도 바울에게 한 선물인데, 땅에서 풍성하게 채워 주시고 또 하늘에서까지 채워 주실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선물 받은 것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20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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