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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농부 비유(마태복음 20:1-16)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기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니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을 포도원 농부들에 비유한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이 비유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계시는가에 마음을 모으고 그 근본 뜻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언제나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좀 잘사는 때가 왔으면 좋겠는데 그 잘사는 때의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질병도 없고 눈물, 근심 이별, 멸시, 가난이 없는 그러한 나라, 곧 유토피아(utopia)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 보기 싫은 로마 군인들은 다 물러갈 것이며, 간사한 헤롯왕은 죽여버리고 그 옛날의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치세에서처럼 태평성대가 왔으면 하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적이요, 정치적이요, 물량적입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나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내가 편안하게 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만약 이를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에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평등,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와 같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상태나 구조를 하나님의 나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항상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겁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현재 또 하나는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로 구분하여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놓고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미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이정표를 옮기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을 믿지 아니하고 언제나 저 먼 미래의 것으로 쫓아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무지개를 바라보며 신기루를 잡듯 앞으로 쫓아가면 또 다시 먼 앞으로 가버리며, 그래도 계속 앞으로만 가야하는 비현실적이고 비구체적인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저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현대의 유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의 소망의 신학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마는 그가 지칭하는 소망의 대상이 어디이냐? 하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있는 것입니다. 소망하며 잡으려 쫓아가는 그것이 무한히 멀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소망이란 구체적인 염원과 소망과 그 소망으로 향하는 원인이 함께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이 구체성을 갖지 못하므로 구체적인 종말도 생각하지 못한 채 하나의 이념이 되어 앞으로 앞으로 끌어만가는 신기루 같은 소망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 바라다 보이는 소망이 있기에 오늘을 참고, 그 미래 때문에 오늘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기만 하다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기다려온 그 최후 소망의 날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와 같이 미래적이고 먼 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이기보다는 영적이요, 그러면서도 멀리 있기보다는 현재에 있습니다. 정치적인 것이 아닌 신령한 것이면서도 그 신령한 세계가 온 물질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는 그러한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와있다는 구체성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종말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심과 동시에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현재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저 영원한 세계의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므로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이 땅에 지점으로 임하였음을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을 받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일단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그의 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것이라면 이는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 하고 이어지는 설명을 추상적으로 하지 않고, "품군을 들이는 집주인과 같다"는 현실적인 사건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 실제 임하여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있음이 오늘 본문의 특징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대단히 심판적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회계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일을 다 끝낸 후 한 데나리온씩 주고받는 마지막 그 순간에 중점을 두고 이 예화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고 혹은 게을렀는지, 아니면 일한 능률의 많고 적음, 그 태도 따위는 전혀 거론되거나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리하면 일이 끝난 저녁 때에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는 두 가지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일하는 태도와 능률, 그리고 근무 시간의 길고 짧음 같은 것은 고려될만도 한데 이 모두가 알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평소에 비디오 시설을 해놓고 일하는 태도를 필름에 담아두었다가 사업이 잘 안되어 감원을 해야할 경우에 그 자료를 활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원을 불평하다가도 필름에 나타난 자신의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러니 당신이 먼저 감원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면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일하는 자의 어떠한 자태에 대해서도 일체 말이 없습니다. 다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리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한 후 그대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부름에 한 데나리온의 삯을 약속하고, 일한 후 그 약속한 삯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평범한 이야기 같으나 대단히 종말론적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게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산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때에 가서 무엇을 가지고 결산을 할 수 있겠느냐?에 있습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본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9월말쯤 되면 포도를 딸 때인데 이 때에는 얼마나 일손이 바쁜지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생명체로부터 비롯된 결실을 따내는 작업이란 시각을 다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언젠가 미국에서 보니 노동조합이 공장의 근로자들에게는 있으나 농민들에게는 없으므로 그 조합을 만들겠다고 하여 토론을 하는데, 한편에서는 농민들의 노동조합은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이제 포도를 따야하고, 적어도 내일까지는 다 따야 하는데 다 따야하는 그 시간에 가서 파업을 하여 정지하게되면 이는 망하는 것이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장은 쉬었다가 다시 하면 되지만 이것은 1년의 농사가 시간을 다투는 그 시각에 파업을 하게되면 완전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잘사는 나라에서 한가한 이야기를 하고 앉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추수기 뒤에 바로 우기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를 다 따지 못하면 1년 농사지은 것을 다 망치게 됩니다. 이 때쯤되면 정말 부지깽이라도 함께 뛰어야할 형편입니다. 그래서 이 포도원 주인은 안타깝게 품군을 구하며 거리에 나가 보았더니 놀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는 겁니다. 주인은 제 3시, 제 6시, 제 9시, 제 11시 등 수차에 걸쳐 그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며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합니다.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표시는 해뜰 때를 1시로 하고 해질 때를 12시로 합니다. 그러므로 제 6시 하면 대략 12시가 되는데 그렇게 계산하면 오늘 본문의 주인은 9시 이전,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6시로 계속하여 일군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한 데나리온씩 줄 터이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포도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포도원도 아니고 그 누구의 포도원도 아닌 "하나님의 포도원"을 말하는 여기에 청지기적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이 모든 것도 알고 보면 나의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나의 것이 아니며 건강도, 지식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포도원 주인은 일군들을 급히 일하라고 들여보내면서 시간의 차이에 관계없이 그 전부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오전 9시에 들어가는 일군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면 12시에 들어갈 때에는 반 데나리온, 그리고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맨 마지막에 들여보낼 때는 1/10 아니면 몇 분의 1을 주겠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주인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일찍 왔거나 늦게 왔거나를 관계치 않고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케 하는 것은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5시에 사람을 들여보내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추측한다면, 아마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에 포도원 주인은 "어찌하여 종일 길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만 있느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들어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이미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을 들은 그 시간에서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게되는 그 시간이 문제입니다. 누구에게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 가담하기 이전의 과거는 전혀 묻지를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헌신한 그 시간부터, 말씀에 응답한 바로 그 순간부터 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회의 공평성이 있고 절대적 관계가 있습니다. "누구나 일하라. 한 시간 남았더라도 일하라. 지난날을 후회하지 말고 일하라."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너도 일하라. 지난날에 많이 놀았구나. 그러나 과거는 묻지 않겠다. 이제부터 너의 남은 생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것이 천국 백성입니다.
지난날의 못한 것을 후회할 필요가 없고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남은 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분명히 끝은 다가오는데 이제부터 남은 생,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문제가 달렸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일을 굉장히 크게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저 일하라 하면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으냐 적으냐 이것도 묻지를 않습니다. 다만 충성만을 원하시고 진실한 응답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듣고싶은 말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할 때에 "예" 하는 이 말입니다. "예" 외의 다른 말은 필요치가 않습니다. 질문도 변명도 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 잘못된 것이나 내 기술, 내 지난날의 헛된 생이나 경험, 그 무엇도 징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의 모습 이 대로를 가지고 주님의 포도원으로 뛰어들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다음 일할 시간이 끝나게되면 그 품삯을 받게되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일이 끝난 최후의 순간에 청지기를 통하여 삯을 지불하는데 맨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많은 일을 했으니 아무래도 좀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이제 자기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자 주인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원망의 원인은 솔직히 말해 자기의 받을 것을 받지 못해서 하는 원망이 아닙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배아파하는 원망인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지금 내가 못살아서 배 아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잘 사는 것이 보기 싫어서 안달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 기분, 이 자존심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데 크게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죽으라면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기분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많은 것입니다. 기분, 자존심, 이것은 인권 문제에 속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어찌하여 한 데나리온만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약속한 조건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가지고 가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 밑천은 모두가 똑같습니다. 누구나 혼자요, 한 생명뿐인 동일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진정한 평등이 있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1대 1의 관계가 수립되는 것이며, 이는 곧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가하면 또 하나 상대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게됩니다. 절대적 관계는 주인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로 인하여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포도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마 여기 나타난 모든 일군들이 처음에는 다들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이 변해서 돈 받을 때 와서는 그 처음 마음을 잊어버리고 원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직장을 갖지 못하고 노는 이에게서 그저 월급은 주든 말든 일할 직장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일단 취직을 하게되면 처음 이야기와는 달라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언젠가 남대문 터널을 지나다가 두 아가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아가씨가 하는 말이 "나는 이 다리만 절지 않는다면 아무 소원도 없겠다, 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크게 지껄이기에 그 소리를 듣고 자세히 보니 조금 절기는 하는데 그냥 지나치면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처녀는 이것이 인생 일대의 불만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하고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원도 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다리가 완전해진다면 그 때에도 아무 소원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그 감사의 마음, 그 기쁘고 아름다운 마음이 며칠이나 가겠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일을 한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써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다음에 베풀어지는 한 데나리온씩의 약속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요, 다같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보수를 주시는 데 있어서 일한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일했다고 하는 것으로 주십니다. 포도를 얼마만큼이나 땄느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이러한 것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일했다는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충성 되이 일했으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량적이 아닌 질적인 것을 묻습니다. 흔히들 대단한 일, 큰 일, 굉장한 일에 관심이 많은데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라." 그 작은 일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큰 일을 한답시고 작은 일을 무시할 때가 있는가하면, 작은 일은 일답지가 않아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큰 일은 할 수 없어서 못하고 작은 일은 시시해서 못하니 결국은 아무 일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다는 자체 외에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예"하고 나서서 불과 몇 분이 남았더라도, 지식이 있든 없든, 경험이 있든 없든간에 그대로 충성만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숨겨진 뜻은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할 사람은 그 얼마나 고마왔겠습니까? 오늘 하루 공치는 줄 알았는데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일해주기를 부탁 받았으니 그 한 시간 동안 참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감사와 충성, 그것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 세월을 놓치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에게 기대하시는 그 은총의 부르심 앞에 감사하고 충성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깊은 뜻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내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시간이 아니라 30분만 남았더라도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일을 주시는 것에서부터 출발되는 이 감사는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면 되는 것을 옆에 있는 사람을 봄으로써 처음 마음이 헝클어지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원망하게되고 감사와 불평으로 변하게되는 상대적 관계를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했느냐는 충성만을 묻는 것이지, 일의 분량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몇 시간 더 일한 것으로 무엇이나 된 줄 알고있으니 이것이 주인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어떠한 업적도 공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 일을 했다고 하여 그것이 인정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티켓 (tic-ket) 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고하고도 아쉽고, 죄송하며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추호라도 내가 수고했으며 남보다 더 많이 일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것이 바로 율법이요, 율법주의이며 율법적 관계에서 공로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갖는가하면 남을 판단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어느 쪽이 더 충성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누가 더 많은 일을 했고 더 열심히, 더 잘 믿었는지는 사람의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의 일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 아닙니다. 언제이고 내가 하여야할 본분과 충성을 하나님 앞에서 다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들은 주인과의 직선적인 은혜의 관계를 생각지 못하고, 은혜 아닌 인간의 공로를 들추며 다른 사람에 대한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왜 저 사람에게는 저런 은혜를 베푸시는가!" 혹은 "이 사람에게 왜 복을 주시지 않는가!" 하고 신경을 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요, 잘못된 것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복되고 불행한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저 사람 복 받았다고 할 것도 아니며 가난하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저 사람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억울하게 재산 다 빼앗기고 순교당한 사람은 무엇이라고 해야되겠습니까? 이는 복 받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저주받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적인 속단으로 상대적인 평가를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 관계만이 중요하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다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보다 직선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본문 말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대단히 가혹한 주인의 대답을 듣게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무엇이냐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조반을 잡수신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재삼 하시고, 장차 그가 당할 고난과 죽음을 이야기하시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갔던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쩌면 그렇게도 박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냉담하게 잘라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절대 관계에 서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 신경을 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며 누구 때문에 되고 안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내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이 말씀 자체가 은혜요 여기에 절대적 은혜가 있습니다.
이제 주신 말씀의 결론을 내리면, 천국 백성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감사하며 일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일시킨 것도 감사하고, 일하면서도 감사하며, 일이 끝난 후에 품삯을 받는 것은 덤으로 받는 것처럼 고마워하는 그 사람, 이것이 천국이요 여기에 천국의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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