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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모르는 자(요 6 : 14~21)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중요한 사건이기에 사 복음서에서 다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성서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기는) 마태․마가․누가복음을 다 읽고난 후에 이들 복음서에서 빠진 것이나, 특히 보충해야 할 의미가 있는 것을 대체로 기록하고 있음은 처음 서론에서 누누히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있는 이적들은 대부분이 다른 복음서에 없는 사건들입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나,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공관복음의 세 기자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것들을 사도 요한은 추려서 의도적으로 기록했고, 또한 동일한 사건일 경우는 보충적인 의미로 요한 자신의 해설을 많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오천 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인 사건은 요한복음외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놀랍다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6장 전체를 통하여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 복음서에서 이미 있는 이적이지만 요한복음에서 다시 취급하고 있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사건은 놀랐습니다. 아마 요즘 이런 일이 있었다면 TV로 위성 중계하며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목격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오천 명으로, 모두가 놀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적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때로는 능력이다라고 표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말한 곳도 있습니다. 이적이란 초자연적인 것이요, 능력이란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계시되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좀더 깊은 뜻으로 기적을 표적(sign)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 사건이고, 둘째는 사건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사건이고 그 사건 속에 계시된 의미, 즉 상징적 언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셋째는 그 사건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것이 더 중요하며 그것이 바로 본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은 굉장하기는 하지만 배는 다시 고파질 것이므로, 그것으로써 경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사건으로 정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한 번 굉장한 것뿐이지, 그것이 일생동안 먹을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적을 행한 분이 누구이며 우리가 그 분을 바로 알고 믿게 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나타나는 말씀으로, 보는 말씀이요 먹는 말씀이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말씀으로 직접 경험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표적이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말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우리가 누구에게 선물을 보낼 때 선물을 잘 포장해서 정성을 들여 보냅니다. 그러면, 여기에 말은 없어도 선물 자체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고, 받는 자는 그 선물을 통하여 보내는 자의 말을 듣게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색깔로써 가끔 의사 전달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노란 종이에다 글을 쓰면 교제가 끝났다는 뜻이고 빨간 종이는 또는 파란 종이는 무엇을 의미한다는 상징적인 것으로 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징은 그것을 알아보는 자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노란 색이든 빨간 색이든 의미를 모르는 자에게는 수십 번의 싸인을 해도 상관이 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상징이 통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필자는 옛날 어른들의 하신 말씀 중에서 늘 기억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리가 있는데,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내용의 부적을 많이 붙였어도 도깨비가 무식해서 그 뜻을 알지 못하면 그 부적은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큰 죄는 무식이라고 합니다. 더우기 무식한 고집은 곤란합니다. 역시 사람은 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고,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필자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무식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무식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보는 말씀, 듣는 말씀, 만지는 말씀, 경험하는 모든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선물을 보냈는데 받는 사람은 그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질을 하는데 매의 의미를 모르는 자식에게는 아무리 때려 봐야 무효입니다. 싸인이 서로 통해야 하고, 말씀이 통해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였다는 이 놀라운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식해서 의사 소통이 안 되면 기적이 표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먼저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수용성과 겸손함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교만한 자에게 신령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렵다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면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귀한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겸손한 자, 순종하는 자, 믿음을 가진 자로 순수한 마음 밭이라야 이 거창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우선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였으니 놀랬다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먼저 감탄을 하고 나서 다음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요즘 사람 같으면, 예수님을 재무부 장관으로 모셔서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이적으로 인해 먹고 배부르니, 아! 굉장하다, 놀랍다 하는 생각은 동물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겨우 생각한다는 것이 "이 분을 왕으로 삼아야겠다" 하는 어리석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표적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요 6:14).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8:15절의 모세의 말 가운데서도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듯이, 이스라엘 사람의 메시야 대망사상(Messiah expectation)은 아주 생명과 같은 신앙으로 그들의 혼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상징적으로 예표적으로 말 할 때는 모세와 같은 분, 엘리야와 같은 분, 다윗과 같은 분, 선지자, 또는 유대 나라를 회복시킬 왕으로서 표현했고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대망사상은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그들의 메시야관, 즉 대망사상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정치적 메시야로 믿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억울하게 눌린 식민지 상태였기에 민족적인 소망이 정치적인 독립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그들이 독립되리라고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기대를 걸고 혹시나 하며 바라보다가 십자가를 지시자 실망했고, 다시 부활하시자 붙들고 물어 봅니다. "나라에 임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 끈질긴 소원이었습니다. 둘째, 협소한 민족주의적 견해입니다. 보다 세계적이고 우주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로 생각지 못하고 협소하게 우리 민족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메시야로 민족주의적 메시야관으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선민사상입니다. 반드시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오실 것이고 유대나라 왕으로 오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민족의 우월성을 믿어주시고 후원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선민사상을 확고하게 고정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메시야로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십자가 없는 영광의 메시야만 생각했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께서도 여러 번 지적하신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간다고 예언되어 있지 않느냐"고 엠마오로 실망하며 가는 제자들에게 설득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생각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특별한 기적이나 마술적 능력에 의해서 기적과 기쁨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메시야관입니다. 다섯째, 혁명입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메시야니즘이라고 합니다. 메시야주의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한 메시야에 의해서, 즉 한 분인 메시야가 오심으로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메시야의 세대로서 이제부터는 아주 영광스러운 태평세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쟁도, 기근도, 환란도, 질병도 없는 유토피아적인 세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야와 메시야의 세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항상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오천 명을 먹이시는 그 사건을 보고 사람들은 "이제 메시야가 왔다.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선지자다"라고 생각해서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요 6:14-15).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렇게 왕으로 삼겠다고 야단하던 사람들이 불과 며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군중들입니다. 정말 마음 아픈 일들이 바로 며칠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으며 믿었고 그 분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신앙을 정치화했다는 문제입니다. 신앙을 정치화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정치를 신앙적으로 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나 신앙을 정치화하면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교회들을 정치로 이용하려는 극소수가 있지만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항상 홀로 서 있어야 합니다. 야당도 여당도 이용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큰 함정이었습니다.
둘째, 신앙의 세속화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그 믿는 목적을 물질의 번영에다 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어 돈 벌고, 건강하고, 병 고치고, 사업 잘되고 출세하는 것으로 세속화 현상으로 빠지는 대단히 위험한 신앙입니다.
셋째, 신앙의 인간화입니다. 가끔 신앙과 인도주의를 혼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불쌍한 사람을 돕는 구제기관 정도로 잘못 생각해서 오늘날 교회가 무엇들 하느냐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교회란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돕고 장례식이나 하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화라는 것입니다. 인도주의와 신앙은 구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인도주의를 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좀더 높은 수준에서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획을 그어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교회는 갈 지(之)자 걸음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왕으로 삼으려는 것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세속화적인 측면에서 이용하려는 것이며 신앙을 인간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말을 듣고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십자가를 부정할 때 주님은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사탄이라고 가차없이 불렀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생각하는 제자는 사탄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에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돌로 떡을 만들라, 나한테 한 번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 하는 사탄의 이야기가 바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속에 그 순간 들어있던 사탄이 바로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과 같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해야 바른 기도입니까? "주여,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를 이루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주여, 내가 원하는 소원 이루도록 힘을 주세요, 믿습니다"라고 아무리 해도 이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내 뜻은 죽여도 좋으니 하나님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해주세요", 좀더 나아가서는 나는 병들어도 좋고 건강해도 좋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아름다운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기도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아시고 피하셔서 군중들을 흩어놓고 다시 홀로 산으로 올라가셔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요 6 : 15). 이 때에 홀로 기도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욕을 먹으면 억울하다고 기도하고, 실패하면 그때서야 기도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인기 있고 칭찬 받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적인 인기로 말하면 최고 정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순간에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출세했습니까? 친지들과 더불어 즐기기 전에 기도하십시오.
출세했을 때, 칭찬들을 때, 영광을 누릴 때, 그 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본입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 40일간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도 밤이 새도록 변화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시고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 모시고자 영광을 돌릴 때 홀로 산으로 올라가시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칭찬받고 영광누릴 그 때가 위험한 것입니다. 인기가 절정에 올라갔을 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업이 순탄하고 최고로 잘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다음, 제자들과 헤어진 예수님은 홀로 육로로 걸어서 가버나움으로 오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 : 45에 보면 제자들을 내세워 먼저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필자 생각에는 베드로 한 사람쯤은 예수님 곁에 남아서 함께 기도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홀로 남으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오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갑자기 큰바람이 불어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편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 때 제자들은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요 6 : 16-19). 불과 몇 시간 전에 오천 명을 먹인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주님께서 지금 함께 하시기 위해 물위를 걸어오고 계시는데 그들은 풍랑 때문에 죽을까 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한 사건에 나타났음을 믿는다면 다른 사건에도 나타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천 명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믿으면서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역사는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또한 지난 수십년 동안 내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믿으면서 지금 현재 당하고 있는 이 사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 16 : 5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시자 그들은 떡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실망하시며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떡이 얼마였느냐고 믿음이 적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몰랐습니다. 한 번 보았으면 그것으로 모든 사건을 이해하고, 어제 역사 하신 하나님이면 오늘도 역사 하시는 분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2천년 전에 계시던 하나님은 오늘 여기 나에게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두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진리를 객관화하는 것처럼 잘못된 신앙은 없습니다. 최소한 제자들만은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았으면 이제는 빵 걱정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목격했으면 이제는 죽음에 대한 걱정에서는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놀라운 역사를 계속 경험하면서도 오늘 당하는 사건 속에서는 무서워하고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위해 오늘도 물위로 걸어오고 계십니다. 이 본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복음 14 : 26에 보면 어이없게도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무서워했습니다. 아무리 무섭고 정신이 없어도 자기들의 선생님께 유령이라고 말하는 제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좀 어려운 형편에 있다고 이렇게 잘못 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상관치 않으시고 "두려워 말라, 나다(Don't be afraid, it is I)"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필자는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어머님의 다정한 음성이 들여오는 듯 합니다. 가령 아이들만 두고 멀리 외출하셨다가 밤늦게 돌아오신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나다"라고 말씀하시면 아이들은 기뻐 뛰며 지금까지 무서웠던 것이 일시에 사라지고 맙니다. "바로 나다" 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을 확인할 때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순간은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순간 풍랑에 대한 두려움은 다 사라졌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좀더 일찍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아예 두려워하거나 떨 필요가 없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은 여전하십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나의 생활 속에서 현재 이대로가 축복이며 이대로가 기적입니다. 이것이 표적을 아는 사람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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