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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역(사도행전 19:8~12)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오늘은 사도행전 78회 강해입니다. 이미 읽으신 바와 같이 본문은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의 단면을 말해줍니다. 간단한 말씀입니다만 이 속에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사역과 능력, 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선교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는 고린도 전도 초기에 유약했었습니다. 용기를 잃어버리고, 대중적인 전도를 못하고 개인적인 전도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강하게 말씀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전파하라"―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이 성 중에 구원받을 백성이 많이 있다,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용기를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용기 백배, 고린도에 일 년 반 동안을 유하면서 마침내 고린도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에베소로 갑니다. 본문은 이 에베소에서 있어진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더 이상 고린도에서와 같이 나약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이제는 회당에 들어가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에서 복음 전하는 모습을 간단하게 특징지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고린도에서처럼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나약해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뒤늦게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절)" 그러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생각지도 아니하기로, 전하지도 아니하기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나니 다시금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담력, 이 신앙적 용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게 용기입니다. 그런데 이 용기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물질에 의거하는 것입니까, 지식에 의거하는 것입니까, 자기 의지에 의거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바울이 가진 용기는 그런 따위의 용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담력은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이렇듯 담대한 사람이 왜 나약해졌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지식에 의지했기 때문이고 자기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의지하던가, 물질에 의지하던가, 세상에 의지하는 사람은 나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남편도 중요하고, 자식도 중요하고, 아내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에 의지해 가지고는 담력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오직 십자가, 오직 십자가의 능력에만 의지할 때에 사도 바울, 그가 강력한 사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씀하는 담력은 성령이 주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여러분도 이미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도 나약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짐으로써 용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형편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은 용기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미 예수님을 만나 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 뵈었지마는 용기는 없었습니다. 담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할 때,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나와의 관계가 확실해지면서 예수의 사건을 통하여 과거가 완전히 해결됩니다. 과거에 죄인이었건, 실패했건, 예수를 모른다고 도망을 갔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건 간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십자가와 함께 과거의 문제가 다 해결되니까 용기가 있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 미래가 보장이 됩니다. 이젠 죽어도 좋고, 맞아도 좋고, 순교해도 좋고, 끝나도 좋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정말로 죽음의 세계를 넘어서 십자가를 통하여 저 먼 미래, 확실한 미래, 결정적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담력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지요.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통해 역사 하십니다. 요한 웨슬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남았는데 내가 왜 죽을 것이냐 입니다. 대단한 얘기가 아닙니까? 반대로 말하면 어느 때에 죽더라도 죽는 시간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용기를 얻고 담력을 얻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말입니다.
둘째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복음의 주제가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바뀝니다. 확실해집니다. 이는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던 말씀과 같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하나님의 나라, 즉 내가 복음 전하는 이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와를 관계 맺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를 알리는 것입니다.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 속에서 선교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교회를 위해서 섬기는 것…… 이게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가 모이는 교회, 우리가 전하는 복음,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를 통해서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는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늘날에도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또 그가 예수를 믿을 때,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개념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 사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바로 그런 차원에서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재미있는 말씀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얼핏 지나치기 쉽습니다마는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에"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8절)"―전파한다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어느 사이에 전파(proclamation, 케루세인)라고 하는 말이 강론이라고 하는 말로 바뀌었어요. 좀더 나아가서는 권면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파할 때에 그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그저 '예수를 믿어라'하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왔다'하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것은 선포입니다. 선포적 의미가 있습니다.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해요. 전파하고, 그 다음에는 믿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이 없다, 하고 도외시할 수는 없지요. 그 다음으로는 좀더 신학적으로 정리가 되는데,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강론하고 권면했습니다. '강론'은 '디아레고마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요샛말로 하자면 강의한다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강의하듯 뜻을 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뜻을 풀어 설명하는 것, 이것은 선포보다는 훨씬 더 친근한 얘기가 됩니다. 그 다음에 '권면'은'페이소'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영어로 persuade입니다. 좀더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선포하고, 듣거나 말거나 내 책임은 다했다,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알아듣도록, 감동되도록, 권면을 받아들이도록. 그렇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누구에게 전도할 때에 "예수 믿으세요." "안 믿어요." "관두세요." 그러면 안됩니다. 그것이 선포는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학에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설교하는 것은 선포적 의미도 있고, 강론적 의미도 있고, 설득적 의미도 있어요. 그래서 설교입니다. 선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선포가 없어도 안돼요. 그러면서도 잘 설득할 책임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눈을 다 똑똑히 뜨고 쳐다봅니다 마는 가령 그렇지 않고 졸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설교를 잘 못해 가지고 자꾸 존다면, 비록 천사의 방언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설교 잘못한 것입니다. 틀림이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은혜란 비몽사몽간에 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 졸지 않도록 얘기해야지요. 이거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 우리 교회 예배가 1부, 2부, 3부, 4부가 있는데, 1부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이 왔으니 졸지 않거든요. 그래서 1부에 하는 말이 좀 다르고, 4부에는 제가 좀더 설득력 있게 말하려고 쉽게 풀어서 얘기도하고 예화도 몇 개 더 하고 합니다. 왜요? 졸까봐 그렇습니다. 점심 먹고 난 2시경이니 가물가물 졸릴 때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설교 조금 잘못하면 여지없이 좁니다. 아마 절반이 졸 것입니다. 그러니 졸리지 않도록 말할 책임이 제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에게 있는 책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알아들어야지요. 알아듣도록 말을 해야지요. 그뿐입니까? 감동되도록 말해야지요. 참 이상한 것이, 주일날 제가 네 번을 설교해보면 똑같은 설교를 하는데도 어떤 부에서는 사람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고 어떤 부에서는 눈물을 한 방울도 안 흘립니다. 똑같은 얘기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그래서 제가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이 모임에는 우리 교인이 많고, 이 모임에는 손님이 많구나.' 어떤 부는 잘 안 통하니까 감동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강론하며 권면하되"―우리가 전도할 때에 선포도해야 되고, 강론도 해야 되고, 이치에 맞도록 논리적으로 설명도 해야되고, 그런가하면 설득도 해야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꼭 이렇게 해야합니다. 여러분, 무슨 재주를 다 써서라도 설득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는 선포적이고, 강론적이고, 권면적인 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강론도 하고, 설득도 하고,설명도 하고, 알아듣도록 최선을 다해서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3개월 동안을 회당에서 애를 썼어요. 얼마간의 사람은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마음이 굳어서 순종치 않고(9절)"합니다. 알아들을 만큼 얘기하고 설득도 했는데 안 듣는 사람은 안 듣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낙심할 것 없어요. 원래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요. 마치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듯이, 안 듣는 사람은 안 들어요. 안 듣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어요. 설교하는 중에는 대개 다 듣는 것 같아 보이는데, 보아하니 우리 교회 분들 중에 절대로 찬송을 부르지 않는 분이 있어요.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 양반은 절대로 찬송을 안 부르네. 그 시간만은 언제나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이 양반한테는 듣는 은혜가 있는가봐'싶어요. 설교에까지 귀를 닫고 있다면 큰일이지요. 하기야 정말 그렇다면 나와 앉지도 않았겠지만요. 어쨌든 안 들어요. 마음이 굳었어요. 이렇게 굳은 사람이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은 도리가 없어요.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못하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게 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하시지 못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벌하시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약하셔서 회개만 하면 아무 때에나 벌을 내리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이 3개월 동안을 회당에서 선포하고, 권면하고, 설득하고, 노력하고 애를 썼는데도 마음이 굳어서 안 듣는 사람은 안 듣더라고 합니다. 안 듣는 것만이 아니예요. 순종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9절)"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안 믿을 뿐만 아니라 남도 못 믿게 하는 것입니다. 비방을 해요. 요샛말로 하면 악질적이지요. 이런 사람이 어디에나 꼭 있어요. 자기도 안 듣고 남도 못 듣게 해요. 이렇게 저뿐 아니라 남을 방해하는, 비방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이런 사람이 반드시 있어요. 또 한 가지는 닫힌 것입니다. 심판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누구에게나 들려지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고로 여러분, 뭐니뭐니해도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그저 믿어지고, 마음이 열리고, 깨달아지고 하거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이게 바로 성령의 역사요, 내게 주신 특별한 은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똑같은 말씀을 한자리에서 같이 들어도 안들을 사람은 안 듣습니다. 비방하는 사람―이는 심판 받은 심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주받은 심령입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닫힌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제 보세요. 그러면 얼마간은 믿고 얼마간은 안 믿더라 하는 문제 앞에서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이런 상황 앞에서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보세요. 본문을 보면 "바울이 그들을 떠나(9절)"―그들에게서 떠났어요. 안 믿는 사람, 마음 굳은 사람, 비방하는 사람들과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저 사람 믿을 때까지 안 떠나겠습니다, 하고 고집부리지도 않고, 내가 저 사람 믿을 때까지 철야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도 않아요. 닫힌 문에 대해서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겼어요. 석 달 동안 최선을 다하고는 떠났어요. 먼지를 털고 돌아섰어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서 배척하거든 발의 먼지를 털고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것은 심판입니다. 또, 전도는 내가 하되, 구원까지 내가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할뿐입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열고 안 열고,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저 내가 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돌아서야지요. 그런 것을 붙들고 온 시간, 일평생을 다 보낸대서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닫힌 문 두드리면서 한평생을 다 보내서는 안됩니다.
닫힌 문은 닫힌 대로 두고, 열린 문으로 가야지요. 불가능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이젠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야지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생동안 닫힌 문만 두드리다가 목이 터져서 죽어요. 이게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러한 일이 있거든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세요. 하나님께 맡기고, 나의 할 일을 하세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떠났습니다. 일단은 회당에서 떠났어요. 그리고 본문을 보니 두란노로 갑니다. 거기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사람들에게서 떠나 이방사람들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9절)"―제자라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놓아두고, 믿는 사람을 따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같이 섞어 놓아두면 이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달립니다. 계속 시달리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쉬어요. 그래서 믿는 사람은 따로 떼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장소와 시간을 달리해서 따로 떼어놓았어요. 다시 말하면 분리에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의 이 완악한 사람들하고 순진하게 새로 믿기 시작한 사람들을 섞어놓고, 이들을 다 구원하려고 애쓰면 안됩니다.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유약한 심령들이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또 많은 유혹에 빠지게도 되고, 비교육적입니다. 그래서 따로 떼어놓았어요. 제자들을 분리시켰다는 것―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분리와 격리의 선교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을 다시 한번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완악한 사람들, 비방하는 사람들을 사귀지 마세요. 알아보겠다느니, 혹은 내가 저 사람을 꼭 구원해야겠다느니, 이런 소리하면서 자꾸 만나다가는 저도 마지막에 빠져들어 갑니다. 좋지 않아요. 그래서 요한2서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오면 문간에 들이지 말아라, 인사도 하지 말아라, 했습니다. 괜히 가까이하고, 알아보고 하다가 자기도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도 바울은 여기서 믿는 사람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분리시켰어요. 분리시키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2년 동안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중요한 특징이 또 하나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0절)"―'바울의 말을 듣더라'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맥락입니다. 바울이, 분명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지금도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바른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예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곽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입니다. 사람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예배적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순서야 어떻게 되었든, 어떤 말로 들렸든 간에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주의 말씀으로 듣고, 주의 말씀으로 믿고, 주의 말씀으로 받는, 그런 자세로 저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주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듣더라―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11절)"―이 한 절이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능력을 행했어요. 희한한 능력을 행했어요. 많은 병자를 고쳤어요.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심지어는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환자에게 올려놓아도 낫더라 합니다. 희한하지요? 또, 마귀도 나가더라 합니다. 바울이 손수 안수한 것도 아니고, 붙들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바울의 손수건만 갖다 얹어도 낫더라는 것입니다.
굉장합니다. 바울, 그는 정말로 굉장하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적에 대해서 의심하지 마세요. 요새는 과학자들도 굉장한 이적을 행하고 그럽니다 마는,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선에서 이적이 있느니 없느니 하지 마세요. 성경에 있으니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적은 있어요. 기적은 있어요. 죽을 사람도 살고, 살 사람도 죽고…… 이적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내가 아는 상식에서, 지식으로만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적은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 증거로, 그 표적으로 이적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계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이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사도 바울이 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이적을 나타내시고 계심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적이 없다면 예수를 믿지 아니하여도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대단히 심각한 말입니다. 이적이 있어요. 그런고로 핑계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적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이적이 확실해요. 그런고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적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하십시다. 여기에 계시성이 있고, 말씀의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고용해서 역사 하십니다. 특별한 사람 아닌 누구를 통해서든지 역사 하십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 일이 있습니다. 한 6년 전의 일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성경을 몰라요. 우리는 그저 예수 믿으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나요?" "물론 들어주시지요." "우리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이적이 나타날까요?" "물론 나타나지요." "어떤 일을 봐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성경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문둥병자가 깨끗해졌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중국사람들의 마을에 어쩌다가 전에 없던 문둥병자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마을에서 내쫓기게 되었는데 교인들이 이 사람을 붙들어놓고, "성경에 문둥병자가 깨끗해졌다는 말씀이 있잖아? 그러니 기도하자"하고는 주욱 둘러앉아서 한 사람은 이쪽 손, 저 사람은 저쪽 손, 이렇게 돌아가면서 문둥병자의 몸 한쪽씩을 잡고 간절하게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정말 문둥병이 나았어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병이 나은 것은 분명한데, 우리같이 성경도 모르고, 목사도 아니고, 직분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인가?―이런 의문이 생겼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 일로 인해서 그 마을은 전부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심지어는 공산당원까지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보았으니까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뿐입니다. 사도 바울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용해서 쓰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여러분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다른 누구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능력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적 행하는 사람을 특별하게 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충성된 일꾼이요, 겸손한 일꾼이요,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 행하는 사람을 너무 높이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또, 내가 어떤 때에 기도응답 받아 가지고 이적을 행했다고 교만하지도 마십시오. 그렇다면 크게 잘못하는 것이예요.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하나님께서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루셨다'하는 마음을 꼭 가져야 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병에 걸렸다가 나아도 그래요. 의사를 통해서 수술도 받고 약도 먹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믿어요.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 내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이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의사에게 고맙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희한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바울은 단지 고용인일 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적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능력 앞에 새롭게 무릎을 꿇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고용된 사람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캐더린 쿨만이라는 할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돌아 가셨습니다마는 이 분이 생전에 이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여러 번 보고, 실제로도 한 번 보았습니다. 한번에 몇천 명에게 능력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생동안 수만 명의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한 일 중에서 무엇보다도 정말로 마음에 드는 점은 그 이적이 자기가 행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환자들을 불러다 주욱 세워놓고, "여러분, 이 사람을 위해서 다같이 기도합시다"하고는 사람들에게 손 한 번씩을 댑니다. 그럴 때에 어느 사람이 나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세요"하고 안 나으면 "그냥 가세요"합니다. 안 나았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다던가, 내가 약하고 네가 믿음이 없다든가, 하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고쳐지는 것이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생각이 깨끗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저 분의 능력 행하는 것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쓴 유명한 책도 있습니다. 「나는 기적을 믿는다」―그녀는 평생동안 수만 명의 병을 고쳤고, 한꺼번에 수천 명도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했어요. 그러나 한번도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지 않고 어떻게든지 그 공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돌리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책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어떤 기적도 행한 일이 없으며, 어떤 사람의 병고 고친 일이 없다. 나는 병을 고치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할 수 잇는 일은 다만 여러분을 위대한 의사에게로 인도할 수 있고, 그 길을 여러분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뿐이다. 나머지 일은 여러분과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얼마나 깨끗한 말입니까? 나는 예수께로 당신들을 인도할 뿐이지,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캐더린 쿨만 여사가 고친 것으로 모두가 아는데도, 그러나 그녀는 아니라고 합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합니다. 그녀는'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뿐이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자세가 분명합니다. 요새 보면 변변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내가 했다느니 누가 했다느니, 분분합니다. 그러나 누가 했다는 말도, 내가 했다고도 하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신 것일 뿐입니다. 이 관계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 겸손하게 이적을 수용하고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씀을 통해 역사 하시고, 이적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고용해서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으로 받는 자에게 역사 하십니다. 오늘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이적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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