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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 비유(에베소서 6:10-17)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십자가를 지게될 것을 생각하시면서 마지막 유월절을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지내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로서 그 고뇌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한 메시야 왕국에 대한 환상과 출세욕으로 여전히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하시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인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눅 22:36)라는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상하, 남녀노소, 의인도 죄인도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시던 그 예수님께서 이 시간에는 검을 사라는 엄하고도 냉혹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임전태세를 촉구하며 비상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 하나인 베드로는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며 저들이 가지고 있던 검 두 자루를 예수님께 보여드리게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족하다"하고 대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장하라는 뜻에서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검이 두 자루 있습니다하고 칼을 들고 나오고 있으니 이 정도의 제자밖에는 못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영적인 무장을 검을 준비하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인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는 중에 이미 앞서 14장 군인 됨의 비유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을 군인에 비유하여 군인 된 기본 자세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그 후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앞서의 기본 자세를 넘어 전쟁 직전에 있는 군인이 갖추어야 할 임전태세의 완전 무장을 재촉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전신갑주를 입어라" 혹은 "취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곧 완전 무장을 하라는 말입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완전 무장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 완전 무장이 안된 군인은 싸움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내에서 만나는 군인들을 보면 주름이 잘 잡힌 깨끗한 군복에 누구보다도 반짝이는 군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은 일선에서 만나는 군인은 그러한 군인이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옷이 깨끗하거나 더럽고 따위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대신 무엇보다도 편리하고 든든하게 무겁더라도 갖출 것을 갖춘 차림으로 나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맨 처음 군복을 입고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생각이란 첫째로, 군복이 왜 이렇게 너절한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왜 이렇게 주머니가 많은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옷이라는 것이 전체 사방에 주머니가 달렸는가하면 크기도 커서 무엇이든지 넣으면 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옷도 있다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이 최 일선으로 나갈 때 보니, 그 주머니가 모두 그렇게 편리한 것일 수 없었습니다. 건빵 조각에서부터 수류탄, 탄알 할 것 없이 아무 데나 집어넣으면 되는 것인지라 그때에는 이 많은 주머니가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머니들을 채우고 게다가 완전 무장까지 하게 되면 얼마나 무겁습니까? 무거운 철모에 몇십 킬로씩 나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소총도 무거운데, 엠원(M1) 총 같은 것을 메고 탄알을 두르고 나면 굉장히 무겁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군화 또한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완전 무장이란 준비할 것이 많고 따라서 그만큼 무거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보통 때에는 일어서기도 힘들만큼 무겁던 것이 일선에 나갈 때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탄을 배급받을 때에 보면,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지 무겁다고 안 가지거나 덜 가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잔뜩 짊어진 채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총 소리가 저 멀리에서 따쿵 따쿵하고 나면 이것들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총 소리가 팡하고 나면 이 군비가 얼마나 가벼운지 그렇게 무겁던 군화도 양말처럼 가벼워져서 바위 위를 마구 뛰면서도 거침없이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일선에 나가는 군인에게 있어서 완전 무장이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란 온 몸에 입혀지는 갑옷을 말합니다. 박물관에 가서 보면 쇠 조각을 많이 붙여서 만든 우리 나라의 갑옷도 대단합니다 만은 서양 사람들의 것을 보면 아예 철판으로 만들어 눈만 나오게 하고는 머리부터 발까지 전부 덮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것을 입고 나서면 어디 한 곳 찌르거나 때릴 곳이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말씀은 적으로부터 완전한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을 전신갑주를 입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군인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군인이란 전쟁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전쟁이란 보통 싸움이 아니라 결국은 내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명을 건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에게 있어서는 승리만이 목표가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이기면 사는 것이고, 지면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함에 있어서도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오직 승리만을 목표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나 사업 같은 것은 잘 안되거나 실패를 하게되면 뒤에 다시 할 수도 있지만 싸움터의 군인이란 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는 패전의 비보가 있기 전에 벌써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군인이란 오직 승리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리를 위해서 싸우는데 어떤 목적을 위한 승리냐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건 전쟁을 기어이 함에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싸우는 것입니다. 진정한 군인은 생명을 바칠만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군인이 무장을 한다는 것은 무기만으로 무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무장입니다. 따라서 군인은 오직 승리만은 생각하되 무엇을 위한 승리인가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6․25때에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분이 직접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이제는 죽는가 보다 하고 끌려갔는데 매질이나 구박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자기들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소를 잡는 등, 푸짐하게 음식을 대접하고 술까지 주면서 잘 대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한 다음 석방을 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돌아 가라고해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통에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을 포로로 붙잡혀 가서 고문도, 학대도 당하지 않고 잔칫상 받으며, 대접 잘 받고 있다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서 또 다시 국군에 편입이 되어 중공군과 싸우게 되었을 때, 상황이 어려워지자 옆에 있는 친구에게 당장에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마라, 포로가 되어가도 안 죽는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벌써 이와 같이 정신이 해이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 문제를 수습하느라고 많은 애를 써야만 했다는 것인데, 차라리 매를 맞고 돌아왔더라면 그렇지가 않을 것을 잘 얻어먹고 왔기 때문에 벌써 정신이 병든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무장입니다. 그러면 그 정신 무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목적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싸움을 무엇을 위해 왜 싸우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명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은 절대 순종하는 것이 기본 자세입니다. 싸움에 관한 작전계획은 대장만이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싸움에 임하는 군인은 대장이 쏘라고 할 때 쏘고, 가라고 할 때 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절대 순종하는 이것이 군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고민은 사느냐? 죽느냐? 혹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고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라면 처음 나갈 때에 이미 죽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나간 것이지, 반드시 살아온다는 보장을 받고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 누구를 위한 싸움이냐고 하는 그 목적에 있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은 국민들의 안일을 위해서, 그리고 나라가 빼앗기고 짓밟히면 안되겠기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6․25때에 제 자신도 친히 겪은 일입니다 만은 군인들은 최 일선에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우고 있는데, 어쩌다 잠시 휴가라도 받아서 후방에 나와서 보면 사치하고 방탕하면서 놀아나는 꼴이 정말 눈에서 불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이면 이렇게 부패한 사회, 저렇게 타락한 인간들이 잘 살라고 내가 그렇게 싸웠나하는 회의가 생기면서 다시 나가서 싸울 마음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군인은 누구를 위하여, 왜 싸우는가 하는 그 목적이 분명해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인에게는 진정 목숨을 바쳐서 싸울 수 있는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예나 출세 따위가 군인이 싸워야하는 명분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진리와 자유를 위하여 싸운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목적의식이 분명할 때 비로소 강한 군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완전한 정신 무장인 것입니다.
또 한가지 군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대장이 분명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가 믿을 만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명령하는 자가 있어서 그 명령에 따라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령하는 자가 존경을 받는 분으로 전적으로 신임을 할 수 있을 때에 그 휘하에 있는 군인들의 사기는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명령권자가 부도덕하고 잘못되어 내 마음에 희미하게 보이면, 사기저하는 물론 아예 싸울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한 영적 싸움에 참여하고 있는 군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싸워야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와 싸운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만은 그 말의 바른 뜻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라는 존재 자체와 싸운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죄와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신령한 싸움, 영적인 싸움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군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 사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시험에 들고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바 그 모든 싸움이 궁극적으로는 마귀와의 싸움인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언제나 마귀와 더불어 싸운다고 하는 자세가 분명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서재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의심이 생기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잠깐 뜨고 보니 저 만큼 바람벽에 마귀가 나타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터는 앞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그 벽을 향해 던졌다고 하는 것인데, 그만큼 루터는 마귀와 더불어 싸운다고 하는 자세가 든든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죄와 싸우고 악령과 싸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언제든지 악령의 역사가 계속 흥행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잠깐 실수한 사이에 악령의 시험에 빠져 허덕거리고 있는 불쌍한 심령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큼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위해서는 전신갑주, 곧 온 몸을 갑옷으로 덮는 완전무장을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신갑주란 방어용 무기입니다. 싸움을 함에 있어서는 물론 공격도 잘해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방어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권투 시합을 놓고 생각해 보면, 권투 선수들이란 때리라고만 하면 무섭게 때릴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막상 시합에 임해서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부진한 것은 바로 이 방어에 신경을 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치겠다고 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조금만 틈이 새기면 그대로 팍하고 들어오는 것이므로 철저히 막아가면서 공격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인으로 말하자면 적을 향해 총을 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총을 맞지 않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총을 맞는 군인이란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아무 데고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인은 살아 남아야 군인이지 죽은 다음에는 군인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승리자는 마지막에 살아남은 자가 곧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를 정신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방어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군인들은 언제나 아군의 은신처를 먼저 찾아놓은 후에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란 약한 부분을 감싸서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그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용감한 군인이라 하더라도 그 육체는 약한 것이어서 총칼 앞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세워 철판으로 싸든지 요즈음 말하는 방탄 조끼라도 입어야만 비로소 강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악의 영들과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금도 인간 자기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군인으로 말하면, 나약한 육체의 부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의 깊은 뜻을 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은 모든 부분을 공격합니다. 따라서 어디에고 허점만 보이면 여지없이 그곳을 공격해 옵니다. 우리가 흔히 권투 시합에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은 허점만 보였다하면 불과 몇 십 초에 끝내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낳게 합니다.
여기서 적은 모든 부분을 공격한다고 하였을 때 그 모든 부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물론 머리든, 가승미든, 배든, 등이든, 몸의 어느 부분이든 간에 허점만 보이면 공격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생각을 해본다면 내 몸, 내 재산, 내 정신, 내 영혼도 공격을 해 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는 어떤 때에 내가 돈을 좀 벌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벌어라며 욕심을 부리게 합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그것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도 더 벌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것이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결과인 것입니다. 어쩌다 돈 버는 재주가 있어 보이자 그것 가지고야 되겠느냐? 좀더 벌어 재벌이 되라! 기왕이면 갑부가 되라며, 자꾸만 이렇게 하자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은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명예심이 가한 사람은 자기의 명예를 내세우기 위해 거짓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 자기 기분을 너무 소중히 여겨 만사를 감정 주도적으로 행합니다. 그 때문에 가만히 보면 이런 사람들은 그 마지막을 혈기로 끝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방종하기가 쉬운 반면 병에 걸리게 되면 절망합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교만하고, 실패하면 낙심하는 이모든 것들이 다 시험입니다.
이와 같이 시험은 어떤 경우, 어떤 나이에도 계속 있습니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건강할 때에도 병들었을 때에도 언제나 시험은 있습니다. 이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예수님까지도 시험을 했습니다. 그것도 보통 때에 시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이나 기도하신 바로 그 자리에까지 따라가서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같이 나약한 사람들을 시험하는 일쯤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만큼 시험이 없는 때는 없는 것이며, 마귀의 공격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허점만 보이면 당장에 화살이 날아들고 칼이 들어와 쓰러뜨리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전신갑주를 입은 완전 무장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14절 이하의 말씀에 가서보면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적극적인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14절 말씀을 보면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서있으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앉아 있는 시간도 잠을 자는 시간도 아닙니다. 지금은 오직 완전 무장을 하고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곧 명령만 떨어지면 즉각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여기에 비추어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앉아 있는가 하면 누워있고, 조는 것도 부족하여 아예 푹 자고 있는 실정이라면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싸움에 임할 수가 있으며, 자신에 대한 방어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피곤하다고 해서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몸이라는 것도 웬만하면 바싹 조여서 열심히 일을 해야 건강한 것이지 조금 피곤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쉬고 눕게 되면 오히려 건강을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항상 깨어서 공격자세로 서서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해 한 젊은 재상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젊은 재상인지라 아마도 시험이 많았던지 하루는 임금께 "어떻게 하면 시험에 들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임금님이 옆에 놓여있는 잔에다 기름을 가득 붓게 하고는 내가 지금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겠으니 그것을 쏟아지지 않도록 들고 내 뒤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이 젊은 재상은 그 기름 든 잔을 조심스레 들고는 임금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가는 대로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다닌 후에 궁으로 돌아온 임금님은 이 젊은 재상에게 "×× 그 골목을 지나갈 때 방아간이 있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못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그러면 "그 다음 골목에 있는 쌀가게를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이번에도 "못 보았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 다시 묻기를 "그 ××쯤 갔을 때에 예쁜 여자가 있는 것을 보았느냐?"고 합니다. "못 보았습니다." "구두 가게를 보았느냐?" "못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임금은 젊은 재상을 향해 "바로 그것일세, 요것 쏟아 뜨리지 않으려고 꼭 붙들고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보여, 그래야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일세, 무엇을 그렇게 한눈을 파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 구경을 많이 합니다. 보나마나한 것을 보노라고 정말 집중해야 할 것에는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완전 무장을 한 자세로서 주님의 말씀만을 순종해 나가노라면 한눈을 팔 것도 없거니와 새삼스레"시험을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하고 물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시험이란 보고 듣는 것에서 오는 것이고 보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시험에 들겠습니까? 그런데 자꾸만 쓸데없는 것이 보이고 쓸데없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모두가 다 무엇인가 텅 비어 있는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정말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남의 일에 참견을 하며 말썽만 부리고 다니는 한 아주머니에게 어떤 지혜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집에 가서 반짇고리에 바늘이 제대로 꽂혀 있는가를 보라고 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려는 사람은 남의 일에 참견은 물론 남의 말은 들려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남의 말 정말 안 들리는 사람으로는 고3 학생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자나깨나 오직 자신의 합격만을 위해 준비하는 그런 마음으로 일생을 살아간다면 정말 성공적인, 그리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자세로 살아가지 못함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튼 악령과 싸움을 전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서서 깨어있는 임전의 태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 말씀은 자세한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말합니다. 허리띠란 모든 의복을 결속시켜 활동을 민첩하게 해주므로 힘의 근원이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그냥 천을 두른 것처럼 너풀거리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보다는 싸움을 할 수 있도록 허리띠를 단단히 띠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생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가슴에는 의를 담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발에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언제나 복음으로 향하고, 복음 전파를 향하여 행동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한 것인데 이는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언제나 믿음이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에 어떠한 사탄의 공격도 능히 막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언제나 자기의 영광된 신분을 분명히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투구란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것임과 동시에 일종의 면류관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그 영광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요 약속된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승리는 보장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무장 중 유일한 공격용 무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이 신령한 군인입니다. 이 군인 된 몫을 다하기 위해서 먼저는 방어를 해야하고, 둘째는 공격을 해야 합니다. 싸움에 있어서는 공격이 방어요, 방어가 곧 공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하는 전쟁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싸울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만 온 몸을 감싸게 하여 자신의 추함이나 나약함의 허점을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느 순간이고 그와 같은 허점이 노출된다면 그 전쟁은 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승리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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