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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주 앞에서 낮추라(야고보서 4:8-1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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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앞에서 낮추라(야고보서 4:8-10)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운 분이시며,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시고자 오늘도 준비하고 계시며, 또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겸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인 줄 알게 됩니다. 겸손할 때에 그 은혜를 보전할 수가 있습니다. 겸손할 때에 은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해서 은혜를 받았다가도 어쩌다 교만해지면 그 순간에 은혜는 송두리째 쏟아져버리고 맙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모름지기 겸손이다-이것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는 귀한 말씀이 10절에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마는 표현을 조금 달리해서 몇 가지를 말씀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고 했습니다. 역시 겸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같은 뜻의 말씀인 줄 알지만 뉘앙스를 약간씩 달리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교만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교만이란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모르는 마음입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과의 바름 관계가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웃의 도움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형제의 우애도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나보다 어린 사람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다"라도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런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 한다면 그보다 더한 교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귀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왜 겸손한 마음입니까? 나는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가 나를 도와주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모든 것을 의존합니다. 나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일에 부모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저분들이 없이는 나는 하루도 살지 못한다, 한순간도 나는 존재할 수 없다-전적으로 그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떠난다면, 그들의 도움을 저버린다면, 그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자기만족에 빠져버립니다. 스스로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과장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나한테는 아버지도 필요없고 어머니도 필요없다"라고 큰소리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떻게 오늘까지 자라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런 자녀들을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을 둔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이 있습니다. 그 딸은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엄마, 나 수학여행 갈래."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날짜도 아직 며칠 남았으니 되도록이면 갈 수 있도록 해보자꾸나."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딸은 수학여행을 꼭 가게 될 줄로 믿고 친구한테서 카메라를 빌려온다 뭐 한다 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드디어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숨을 쉽니다. "얘야, 수학여행은 포기해야 되겠다. 우리 형편에 무슨 돈이 있겠니?" 그 당장 딸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인즉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세상에 남의 도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죽을 때에도 남에게 신세를 져야 합니다. 내 장례식을 내가 치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수고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입을 수의(壽衣)도 남이 입혀주어야 합니다. 그렇거늘 스스로를 독립된 존재로 생각하여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는 둥 하나님도 필요 없다는 둥 교만을 피우는 것입니다.

교만 중에서 가장 큰 교만은 스스로 죄인됨을 부정하는 교만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강변합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죄인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 죄를 모릅니다. 내 죄를 변명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이란 겸손하게 되면 자신의 좌표를 압니다. 하나님의 공의(公醫)를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실패를 만나건 성공을 만나건, 잘됐건 못됐건, 내가 처하게 된 처지를 전부 하나님의 공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질을 감사합니다'-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전적으로 수용합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왜 때립니까? 왜 저 사람은 안 때리고 나만 때립니까?"-이렇게 반발하면서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맞아야 된다고 믿으면서 맞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나는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 있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다-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줄 압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모든 것이 은혜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하면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말씀에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8)." 지난 시간에는 겸손하라 하였고,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순복(順服)하라 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당신께 전적으로 나를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휘포타게테-하나님께 의존한다는 뜻의 헬라말입니다. 하나님께 예속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사는 자세를 뜻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릅니다.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내 마음의 기쁨보다도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이런 자세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의견을 나의 의견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순종은 굴종이 아닙니다. 억지로 따르는 것, 불평하며 원망하며 따라가는 것,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이란 그의 뜻을 내가 기꺼워하는 것입니다. 가라 하시면 왜 가라 하시는 건지, 어디로 가라 하시는 건지 모르지만 그의 말씀이니 의미가 있을 것이요, 그러므로 나는 군말 없이 가는 것입니다. 버려라 하시면 왜 그러시는지 모르는 대로, 그 말씀을 날 위해 하시는 말씀인 줄 믿고 서슴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법을 즐겨 따르는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굴종하는 사람은 많아도 순종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모름지기 기쁜 마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과 기쁜 마음으로 하는 일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서 듣고, 그리고 그 뜻을 따르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합니다. 내가 기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당신께 가까이 가는 것보다도 더 가깝게 나한테로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은 모르지만 일단 믿고 따르고 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까이 갈수록 점점 분명히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더욱더 가까이 오셔서 그 뜻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보고 가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너더러 참으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이렇게 밝혀주십니다. 우리가 때로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참습니다. 참아도 기쁜 마음으로 참고 보면 왜 참아야 했는지를, 참음의 결과를, 그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까이해주심입니다. 나에게 계시의 영을 주심입니다. 새로운 영적 통찰력을 주심으로 인내의 이유를 알게 하시고 인내의 결과를 보여주시고, 그에 따라 주시는 은혜를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한 것이 그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까이해주심으로 신령한 것까지 다 통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마귀를 대적하라(7)" 함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마귀하고 친하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세상과 가까이하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세상과 멀어져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이치입니다. 겸손은 결코 나약함이 아닙니다. 겸손에서 우러나는 신앙과 그 신앙에서 비롯되는 용기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겸손하다고 마귀한테까지 굽실거려서는 못씁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마음이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 세상과 짝하는 마음, 세상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마음이요, 하나님께로서 멀어지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 당하실 때에 친히 하신 말씀은 그 당장에 "사단아 물러가라." 하심이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심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 지시지 말라고 충언(?)했을 때에도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엄하게 꾸짖으시면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고 냉정하게 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마귀를 유혹을 그토록 강하게 끊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토록 냉정하게 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끊어버리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나에게 가까이하심을 분명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장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통쾌한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만 마귀의 유혹에 어물쩡 끌려 들어가게 된다면 하나님께로서 멀어지는 것을 아프게 실감할 것입니다. 불안하게 됩니다. 떨립니다. 두려움에 쫓깁니다. 마음이 밝음을 잃고 어두워집니다. 하나님께로서 멀어진 탓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니라."

셋째는, 손을 깨끗이 하라 함입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8)"-손을 깨끗이하는 것은 예배자의 마음이요 자세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먼저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이는 출애굽이 3019절로 21절과 레위기 164절 이하의 말씀에도 잘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목욕을 합니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손을 씻은 다음에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본디부터 '결례(潔禮)'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마음을 씻는다는 뜻입니다. 곧 예배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도 먼저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한 연후에야 주님 앞에 나오라 하심입니다. 과거의 일, 지난날에 가졌던 이해와 오해, 섭섭했던 마음, 교만했던 마음, 실패로 말미암은 좌절, 실의-과거에 속한 것으로 이렇게 저렇게 더러워지고 때묻은 것들은 다 씻어 버리라 하심입니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임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발만 씻어도 깨끗하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저는 문자그대로 경험하고 삽니다. 밤에 깨끗한 물 속에다 발을 담그고 정성스레 한번 씻어보십시오.

온몸을 씻은 듯이 쾌적한 느낌을 맛봅니다. 60년대초,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에는 그곳 사람들이 화장실을 드나들 때마다 손을 씻고 종이타월로 닦고 하는 것을 보고 색다른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이토록 깨끗하고 기분이 좋은 것을 우리는 왜 못하고 사나 했는데, 요즈음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하고 사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손 씻는 문화가 생겨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네 사람들이야 언제 손 씻고 살았나요? 그냥 살았습니다. 잘해야 저녁에나 한번 씻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왔다갔다하면서 곧잘 손을 씻을 줄 압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손을 씻을 때마다 몸과 마음이 얼마나 상쾌해집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8)."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마음-예배자의 마음은 손을 씻는 마음이라 함입니다. 요새 보면 도둑질이나 강도질 같은 못된 짓 하던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 이제는 새 출발을 하겠다는 뜻으로 '손 씻었다'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손을 씻는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손을 씻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부지런히 씻어야 합니다.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어도 깨끗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몸은 목욕을 해서 깨끗하지만, 발은 더러워졌으니 씻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우리에게는 씻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상 실수를 합니다.

하루 전에도 실수했고, 한 시간 전에도 실수했고, 방금도 실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씻고 또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저는 '가까이 더 가까이'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열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새벽기도는 하나의 순례의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나오는 분들은 하나님께로서 조금 멀리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나오는 분들은 그보다 조금 더 가까이 있으며, 새벽마다 나오시는 분들은 그보다도 더 가까이 나아간 것이 됩니다. 가까이 나아갈 수록 우리는 손을 좀더 자주 씻어야 합니다.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스스로 손을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교회에 나올까말까 한 사람들을 보면 보기에 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죄가 그리도 많다고 그렇게 뻔질나게 다니면서 회개하는 것이 일이란 말인가-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더 자주 나아가는 사람은 이것도 죄요 저것도 죄요, 죄투성이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말, 나의 행동, 나의 생각, 어느 것 하나도 죄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죄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간 사람의 느낌에는 죄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다고 하는 행위의 구체적인 표현은 손을 씻는 것입니다. 아까도 씻었지만 지금도 씻어야 합니다. 이미 회개를 했지만 지금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못된 마음을 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미워했습니다. 신앙적으로 삐끗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손을 씻었어도 또다시 씻을 수밖에 없습니다. 씻어야만 하나님께서 가까이 우리를 맞아주십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함은 마음을 성결(聖潔)케 하라 함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8)"-'두 마음' '두 혼'을 의미합니다. '두 마음'은 헬라말로 '디프쉬코이', 영어로는 'double mind'가 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을 성결케 하여 한 마음이 되게 하라고 함입니다. 한 마음이란 곧 단순한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두 마음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더니 어느 결에 또 세상을 사랑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두 마음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본문의 가르침대로 한 마음을 가지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한 마음'이라는 말에는 '변함없는'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라고 하는 의심이 없이 변함없는 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결혼하려고 하는 남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서로가 그리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둘이 결혼을 해도 괜찮을까? 결혼해서 행복할 자신이 있는지, 행복하게 살아갈 설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랬더니 대답하는 것이 맹랑합니다. "살아보는 거죠 뭐. 살아보고 시원찮으면 치워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결혼이란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네 옛 어른들은 시집가는 딸을 앉혀놓고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결혼이란 마땅히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한번 해보지 뭐. 재미없으면 치워버리고 위자료나 챙기면 되니까.' 이것이 '두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주셔서 일이 잘되면 교회에 나가주고, 그렇지 않으면 때려치우는 거지 뭐.' 이것이 잘못된 마음, 두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공하게 하시건 실패를 안기시건 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만 섬길 것입니다. 이 마음이 한 마음이요, 성결한 마음입니다.

두 마음은 더러운 마음입니다. 복선을 깔고 있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해보고 안되면 저렇게 하겠다, 여기로 때리면 저리로 도망하겠다, 이렇게 치면 저렇게 피하겠다, 이런 식으로 뒷거래까지 다 해놓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출애굽이 13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에 그 홍해의 광야길로 돌려 인도해 가지고 홍해를 건너가게 한 다음에 홍해로 그들의 길을 차단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가다가 전쟁을 만나든가 하면 되돌아올까 봐 그리하셨다고 합니다. 되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홍해로 막아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거나 다시 하나님께로서 멀어지려는 생각은 추호도 가지지 말 것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나의 온 운명을 맡기는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마음입니다. 나아가 마태복음 5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위로를 받을 것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심입니다. 세상 웃음, 세상 즐거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애통의 마음으로 돌아서라 하심입니다. 세상을 즐거워할 것이 아니요 세상을 근심하는 자가 되라 하심입니다. 세속의 향락, 세속의 기쁨을 포기하라 하심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즐거움만을 즐거워합니다. 신령한 즐거움만이 즐거움인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맛봅니까? 아직도 세상 즐거움이 달갑습니까? 세상의 향락이 부럽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 말고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으뜸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제 시시해 보이고 하잘것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절대가치를 두었다면 애통하여 복을 받을 것입니다. 지식에 변화가 오고 느낌에 변화가 오고 결단에 변화가 옵니다. 이것이 전적인 회개입니다. 이젠 나의 지식도 그 중심과 기초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이젠 옛날과 다릅니다. 우리의 감성은 오로지 주께서 주시는 은혜에 의존하게 됩니다. 슬퍼한다, 애통하다-세상을 향한 긍휼입니다.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 죄의 길로 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불쌍히 여깁니다. 그 사랑과 애정에서 슬픔이 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통곡하듯 술회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13)." 동족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고 있음을 애통함입니다. 마땅히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 내 사랑하는 식구들, 사랑하는 그 누구들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로 해서 나는 마음놓고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습니다. 그에 대한 슬픔이 언제나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곧 그런 마음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주 앞에서 낮추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가치함을 인정하라 함입니다. 다윗이 그의 시()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 말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이덴티티 곧 자기 정체감(正體感)입니다. "인자가 무엇이관대"-바로 이 말입니다. 내가 누굽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이것이 다윗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사무엘하 98절에 보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는 다윗을 보고 므비보셋이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죽은 개 같은 나를 어찌하여'-저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되새겨보곤 합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입니다. 꼽추요 병신입니다. 사울의 하나 남은 혈육, 세상의 눈에는 실로 보잘것없는 이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사울이 가졌었던 모든 재산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너는 왕자와 같이 내 곁에 있어 먹고 마시리라'고 엄청난 은혜를 입힙니다. 오직 옛친구 요나단을 보아서였습니다. 요나단의 일점혈육이 므비보셋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만큼 값어치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을 크게 평가하는 사람은 불평이 끊일 날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은 개 같은 존재입니다'하기까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라면 누가 나에게 참을 뱉는다 해도 꿋꿋하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저력을 지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낮춥니까?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내가 은혜를 입었다'라고 술회합니다. 그 몸에 있는 가지()도 그는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세 가지의 명령이 있고 세 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His part and Our part'-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낮춥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이십니다. 아무쪼록 잊지 말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높이고 또 높이십니다. 지금 낮추면 장차 높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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