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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주기도문7(마 6:9~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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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7(6:915)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알게 하옵시고"

 

일반적으로 시험이라고 하면, 흔히 어려움을 당했거나 악에 빠질 지경이 되어서 신령상 곤란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어떤 올무에 걸려들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선의로 생각하기보다는 악의 쪽으로,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축복의 반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이 들었거나 실패했을 경우에는 시험에 들었다고 말하며, 돈을 벌었거나 출세했을 경우에는 축복 받았다고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때에 따라서는 성공이 더 큰 시험일 수 있고 칭찬이 더 큰 함정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나간 세월에서 이것을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에게 시험 들었다고 말해 본적이 있습니까? 아무튼 시험의 개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이 기회에 수정하고 올바른 뜻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시험이란 어떤 뜻입니까? 신약에 나타난 시험은 원어로 '페이라스모스'인데, 이 말은 영어의 템트(tempt)보다 테스트(test)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템트는 넘어뜨리기 위한 올가미의 시험이고, 테스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을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험은 우리말로 실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 뜻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힘이 있나 없나, 또는 충성심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고 싶다든지, 선한 일에 대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 한번 그 사람을 흔들어 보는 것이 시험인 것입니다. 물건을 살 때도 그 물건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것인지 아닌지를 실험해 보고 사는 것이 안전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에게도 한번 시험을 걸어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데 퍽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테스트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필요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남녀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번씩 짖궂은 시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시험하셨다고 창세기 22:1에서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당시,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이삭의 나이가 27세 정도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 나이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결혼도 해야 하고 자식을 낳아 아버지께 손자의 기쁨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주문을 하시니 얼마나 어려운 시험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시험을 넘어 섰습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22:16-17)고 큰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허락하셨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복을 주셨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은 시험 후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은 왜 주시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앞으로 내리실 복을 잘 감당할 자격을 준비시키느라고, 즉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을 미리 준비하게 하기 위하여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잘 치루기만 하면 큰복을 듬뿍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넘어뜨리게 하기 위한 악의는 전혀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악의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4 : 1 이하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시험은 억지로 당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받으러 일부러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에 이끌리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말입니다. 오히려 성령 받은 다음에는 더 큰 시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시고 천사의 수종을 받았으며 곧이어 전도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전도전략(Strategy for mission)을 세우신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전도할 것인가가 바로 이 시험에서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마귀와 더불어 싸우시면서 예수님은 중요한 전도 목표를 세우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시험은 언제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병든 것은 시험이고 건강한 것은 축복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죠지 팍스는 "악마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악한 사람도 일단 병이 나서 누우면 더 이상 악을 행할 수 없으므로 착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건강하고 돈 벌고 성공하는 것이 더 큰 화를 초래하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습니까? 그가 성공했다는 그 사실은 성공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공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죄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에게도 시험은 있습니다. 의인에게 있는 시험의 대표적인 예로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시험은 약한 자나 강한 자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으리라 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 만 예수님도 시험 당하셨습니다. 더우기 40일을 금식기도 하신 직후에,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적으로 가장 절정에 이르는 그 시간에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일주일 정도 금식기도 하고 나서, "이제 이만큼 기도했으니 나는 어떤 시험도 문제없다"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시험은 항상 누구에게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교회에도 시험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에도 있습니다. 시험이 없는 곳이라고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지만 그 곳에도 시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없는 곳으로 피해 다닐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필자는 절에 갈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좌하고 계시는 부처님의 눈이 감았는지 떴는지가 구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명상을 할 때에는 눈을 완전히 감으면 잡념이 생겨서 눈을 감지 않고 전방 2m 정도에 눈길을 두어,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의 곱슬머리였습니다. 그분은 인도사람인데 왜 아프리카 사람처럼 곱슬머리인가 하고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알고 보니 곱슬머리가 아니라 머리에 있는 것이 모두 달팽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명상을 해도 머리 위에는 달팽이가 우글거린다는 것입니다. , 시험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시험은 언제나(whenever), 누구에게나(whoever), 어디서나(wherever)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악마의 시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또한 시험은 여러 곳에서 옵니다. 첫째, 외부로부터 오는 것으로 나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원치 않는 악이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화려한 물질 문명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향락적이며 감각적인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정말 물질이란 과거나 오늘이나 누구에게나 큰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이나 부유함이나 둘 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부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교만할까 걱정이며 가난해서 도둑질할까 걱정입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인간들은 부해도 걱정이고 가난해도 걱정인 나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릇이 달라, 부자로 살아서 좋을 사람이 있고 가난하게 살아서 좋을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경제적인 그릇을 알아내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십일조 생활로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만원을 벌었을 때 천원을 잘 바치고, 십만원을 벌었어도 만원은 잘 바쳤습니다. 그러나, 백만원을 벌자 십만원이 아까와 조 금 떼어내고 바치고, 드디어 천만원을 벌자 백만원은 도저히 낼 수 없어 아예 포기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그릇은 얼마짜리 입니까? 십만원 이상은 벌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다 바치지 않는 변명을 그럴 듯하게 말합니다. 이 돈을 모두 내면 교회에서 남용할까 걱정이고, 또는 우리 교회 보다 더 가난한 교회에 주고 싶고, 기타 더 많이 필요한 곳에 자신이 직접 쓰겠다고 그럴싸하게 말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일단 내 손에서는 떠나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주관해서 쓰는 돈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오는 시험 중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시험에 빠지게 되며, 또한 내가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판단력이 흐려져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네 원수가 네 집안 식구이니라"고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시험이 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시험이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 내적으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시험보다 더 어렵고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에 청산하지 못한 죄는 마치 갚지 못한 빚과 같아서 어두운 그림자로 나를 따라 다닙니다. 또한 허물이라는 것이 타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 회개하고 용서되었지만 타성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상처가 생겼다가 아물어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처럼 과거의 좋지 못한 흔적을 깨끗이 지우기란 어렵습니다. 전과자들이 새롭게 결심하고 새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아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죄와 허물은 큰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맺어진 친구 관계 물질 관계 등 모든 관계들이 계속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의심과 나약성, 고치지 못하는 교만한 성격, 게으름 등이 시험이 됩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상당히 부지런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과거에 내가 가졌던 세계관, 타성이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 중에 가장 큰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입니다.

이 시험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시험입니다.

가령,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고 하고, 자기 생각 밖으로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사랑을 이해할 때는 언제나 두 가지 경우를 다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 입장에서 사랑을 이해하고 또 하나는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사랑인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각자의 세계관 문제입니다. 많은 여자들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곧 관심이라고 믿기 때문에 남편의 사회 생활까지 꼬치꼬치 알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직장에서 피곤한 남편을 편안하게 쉬게 해 주기보다는 그날 하루의 행동 반경을 일일이 물으며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직장에서 있었던 일, 더욱이 유쾌하지 못했던 일은 정말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자기 입장에서 사랑하지 말고, 남편의 입장에서 사랑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조용하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들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베풀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약을 해서, 하나님 입장에서 한번 사랑을 이해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너무 자주 자기 입장만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주 안에 있어야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 않으면 안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들여다보는 구멍으로 보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사랑 의 하나님이고, 아니면 사랑이 없는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시험입니다. 이제 나의 방식으로 보는 그 터널 (tunnel)을 뛰어 넘어, 하나님 편에서 그 사랑을 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이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 : 41) 기도만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이기지 못해 기도하다가 쓰러지고 기도하다가 또 쓰러졌습니다. 이 것을 본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고 타이르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베드로는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에게 칼을 휘두르는 만용을 저지르게 됩니다. 무력으로 문제가 해결됩니까? 기도없이 자기 힘과 의지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싸움이란 적을 알고 자신을 바로 알아야 이기지 않습니까? 이것을 아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져서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여러가지 변명과 이유를 나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되어진 일은 성공한 것 같아도 실패입니다. 오직 기도하고 이루어진 일만이 승리요 축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개선입니다. 시험은 물질에도 있고 사랑에도 있고 명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횡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에서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시험에서 먼저 승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이 의미를 바로 찾기 전에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심이란 말이 나오면 인도의 유명한 살인 호랑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산 속에서 살고 있는 살인 호랑이는 으슥한 골목길에 숨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습격해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인도 정부에서 포수 네 사람을 동원하여 살인 호랑이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호랑이가 잘 나타나는 으슥한 골목길에 차를 세워놓고 네 사람을 배치했습니다. 자동차 앞뒤로 한 사람씩 서고 자동차 위에도 한 사람, 그리고 차안에 한 사람, 이렇게 네 사람이 밤을 새우며 호랑이를 기다렸습니다. 사람만 보면 나타난다는 호랑이가 웬일인지 밤이 다가도록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의 새벽녘이 되어 포기하고 자동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여니,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웬일입니까? 네 사람이 함께 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고 차안에 있던 사람은 다소 마음을 놓아 졸았기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위험은 방심할 때 그 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표본(example)을 따라야 합니다. 남이 실패한 것을 보았으면 왜 실패했는지, 넘어졌으면 왜 넘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겼다면 이긴 자의 그 표본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례를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안에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다윗, 솔로몬등 그 많은 인물들을 보면서 왜 실패했고 왜 승리했는지를 이해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실 때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첫째 시험에서는 말씀으로 이기셨고, 천하를 다 주겠다는 둘째 시험에서는 충성으로 이기셨으며, 셋째 시험은 믿음으로 이기셨습니다. 이 시험을 잘 이해하면 우리들도 사탄의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묻지 맙시다. 마귀로부터냐 사탄으로부터냐고 묻지 말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험은 자기 정욕으로부터 옵니다. 내게 정욕이 없고 욕심이 없다면 시험이 시험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만약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입맛이 없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에게 음식이 시험될 리가 있습니까?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이 시험될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시험의 요인은 우리들의 정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도 "모든 시험은 우리들의 정욕으로부터 온다"(1 : 14)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치루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므로 그 분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시험 후에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중간에 마귀가 개입되었다 하더라도 욥기에서처럼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므로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사탄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기기만 하면 어떤 시험이든 다 이로운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 때문이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시험을 시련으로 받으면, 머지 않아 축복으로 전환되는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면 천사가 시중 들고 더 많은 축복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사실 시험이 없는 인생은 허수아비입니다. 사람이란 시험을 통해서 믿음이 강해지고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게 오는 시험이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늘 기도로서 무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문7(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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