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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에 대한 신앙적 이해 (히브리서 12장 5절~13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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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에 대한 신앙적 이해 (히브리서 12513)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 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어린아이들은 늘 스스로가 사랑 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놀다가도 먹다가도, 심지어는 자다가도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울기도 하고 사고를 내기도 합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늘 부모님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싶어하고,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크고 작은 선물을 받고 싶어합니다. '나는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순간에라도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라고 하는 문제에 의심이 생기면 참을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생각은 흑백논리에만 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스스로의 생각 밖에서 이루어지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어쩌다 한번 책망이라도 들으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중을 듣고 매를 맞으면 나는 필요 없는 존재라고까지 믿어버립니다. 나는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부모님이 해주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고 내 의견이나 생각을 꺾으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받는 것은 사랑이요 빼앗기는 것은 미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흑백으로 나누어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해지면 그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됩니다. 칭찬도 사랑이요 책망도 사랑이요, 때로는 매맞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꽤 나이가 먹고도 아직도 유아적인, 흑백 논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내 뜻대로 되어야만 사랑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좀더 자라서 성숙한 인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면 오히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속에 더 큰사랑이 있었음을 깨닫고 감격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참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생자에 빗대어 참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자녀란 무엇입니까? 간단하고 명백합니다. 권면이 있고 꾸지람이 있고 징계가 있고 채찍질이 있으면 참 자녀인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꾸지람도 없고 징계도 없고 채찍질도 없다면 버려진 자식인 것입니다. 프랑스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는 벌할 줄도 안다.' 징계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아들'이라는 말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헬라어로는 '아들''휘오스'라고 합니다. '휘오스'는 어린아이 티를 벗어나 웬만큼 자란 성숙한 자녀를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테크나'입니다. 부모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성숙한 자녀를 일컬을 때에는 '휘오스'라고 합니다.

본문말씀은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지 귀가 닳도록 권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전파하라, 가르쳐라, 권면하라----강하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군중 앞에서, 선상에서, 혹은 법정에서, 심지어 감옥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말씀 전함을 그는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강하게 명령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곧 기회를 얻었으면 전할 것이요, 기회를 얻지 못했으면 기회를 만들어서 전하라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을 문안간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분인데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일반병실에 입원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특실에 계셔도 될 형편인데 왜 사서 고생이냐고 물었더니 몇 가지 속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저는 건강할 때, 전도라는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비로소 같이 입원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괴롭지만 병든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특실에 있으면 혼자 감옥에 갇힌 양 지내야 할 텐데 일반병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지내며 그들에게 전도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원하십니까? 어떤 생활을 해나가야 되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조그마한 선교모임에 참석을 해보았습니다. '직업과 전도'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데, 참석한 사람 가운데 은행에 근무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월급은 적어도 텔러(teller), 창구에 앉아서 금전을 출납하는 일을 고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줄곧 그 일만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급을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주임도 지점장도 필요 없다, 나에게는 이 일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창구에 앉아서 돈을 받고 내주고 하면서 손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돈을 좀 찾을 일이 있어서 은행에를 갔더니 창구 여직원이 돈을 내주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어디어디에 쓸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이 아가씨 하는 말이 '교회에 가는 것 잊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목사한테 교회 나가는 것 잊지 말라고 합디다. 그래서 꼭 나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마는 이런 분들에게는 돈이 문제가 안됩니다. 부자가 무슨 대숩니까?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서 한마디씩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출세해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세도 부려보았자 허무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생을 질적으로 살아가 보십시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부지런히 전도하십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혜가 있든지 없든지, 상대방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에서 명령합니다. "네 직무를 다하라." 파수꾼의 직무입니다. 사람들이 깨든 안 깨든 기상나팔은 불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묻지 마십시다. 기다리지도 마십시다. 좋은 대답이 있기를 바라지도 마십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내하며, 고난을 받으며 --- 복음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하고서 욕을 당하면 그 욕은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지런히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서 말씀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에게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내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엄한 명령입니다. 종말론적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203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우리의 마지막 운명은 이 말씀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우리가 성경을 사랑합니다. 마침내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우리의 운명을 책임집니다. 말씀에 위탁할 때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줄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징계란

첫 번째가 권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권하다'의 헬라어 '파라크레이시스''위로한다, 달랜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파라크레이토스''보혜사'를 뜻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므로 잘했다고 칭찬도 해보고 권면하며 달래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간곡하게 권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온 바요, 또한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그대로 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권면입니다. 헬라어로 '디아레고마이'라고 하는 이 말은 강화(講和), 설교, 강연을 의미합니다. 부모님들은 늘 자녀에게 설교를 합니다. 이치를 따져가면서 합리적으로 말합니다.

이렇듯 부모님들은 자녀들 앞에서는 모두 설교가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면 속에는 진정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자녀들이 이를 잘못 받아들여서는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느니, 웬 설교가 그리 기냐느니 불평을 합니다마는 그 많은 말속에, 그 많은 설명 속에는 부모님의 간곡한 권유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꾸지람입니다. 헬라어로 '엘렝코'라고 하는 이 말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꾸짖는다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높여서 강하게 꾸짖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설교만으로는 자녀를 설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꾸짖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가라, 오라, 안 된다, 하지 말라---명령조의 다소 고집스러운 말을 쓸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타협과 설명이 자녀들에게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권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꾸지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징계입니다. 헬라어로 '파이데이아'라고 하는 이 말은 '훈련'을 의미합니다. education이 아니라 discipline입니다.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훈련인 것입니다. 교훈이 아니라 전인교육이요,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인격교육입니다. 이것이 징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채찍질입니다. 헬라어로 '마스티고오'라고 하는 이 '채찍질'은 좀더 강한 응징과 처벌을 의미합니다.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하여 응징을 하고, 벌을 내립니다. 이 채찍질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강한 의지가 채찍질 당하는 아픔 속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들을 줄 아는 자녀가 참된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채찍질은 결코 죽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심판도 저주도 아닙니다. 이것은 징계일 뿐입니다. 행동적 징계입니다. 우리는 채찍질 속에 담긴 부모님의 말씀과 뜨거운 사랑과 양보할 수 없는 강한 의지를 깨달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잘못된 자녀를 때려놓고 그 아이가 한참 울다가 잠든 뒤, 시퍼렇게 멍든 아이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렇듯 징계 속에는 크고 깊은 부모님의 사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징계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크신 주도권과 통치와 경륜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우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람과 관계되고 저 물질과 관계된 것 같지만 그실 모든 사건 속에는 크나 작으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고 죽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이 모든 일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주도권 안에서, 그분의 통치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징계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11)" ---- 당장은 징계가 슬프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징계는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잠시 볼 때에는 징계가 슬퍼 보이지마는 그 속에는 높은 경륜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매를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열 일곱 살 때까지도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았다고 기억합니다. 제 잘못을 알고 매를 맞는 경우도 있지만, 간혹 어떤 때는 영문을 모른 채 맞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매를 맞을 때는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빌어야지 말대꾸라도 할라치면 큰일납니다. 제가 매를 맞을 때에는 어머니도 어찌하시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맞다보면 무지막지하게 때리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들노릇 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매는 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크고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오히려 이런 때에 아버지가 꾸지람을 해주셨으면, 저런 때에 아버지가 때려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더군요. 그 무서운 아버지가 그렇게 그리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모두가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요, 세속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나쁜 옛 습관이 있습니다.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못된 버릇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야만 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가운데 슬하에 딸 하나만을 두고 그런 대로 만족하며 잘 지내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그 딸을 출가시키고 나자 적적하셨던지 양아들을 하나 두더군요. 외롭게 지내는 한 아이를 데려다가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서 정식으로 아들을 삼았습니다. 그 아들을 데리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시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의 못된 옛 버릇으로 인하여 그 장로님은 꽤나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발각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또 하나, 그 아이는 무엇이고 생기기만 하면 제 물건까지도 가져다 감춥니다. 장로님이 그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몇 년 동안 고생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이 버릇을 고치는 데는 무척이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징계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파스칼(Pascal, Blais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섬기라고 제게 건강을 주셨지만 저는 세상을 위하여 그것을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저를 일깨워주시려고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 이제 깊이 생각하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시기 위하여 내리시는 것이 징계입니다. 여기에 구체적인 사랑이 있고, 효과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물러 서시지도, 양보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마는 만일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다면 그 징계를 받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기에 전쟁이 있고, 실패가 있고, 역경이 있고, 고난이 있고, 배신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징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당신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교육하시고 훈련하시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종교개혁자 칼뱅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의지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밀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참아들이 된 증거로 징계를 받으라고 우리에게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비롯된 징계요, 그 징계야말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릇된 길로 갈 때에 일이 실패하거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 것이요, 그릇된 길로 가는데도 일이 형통하거든 버려진 사람으로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실패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사람된 증거로 소화하고, 거기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내 참모습을 확증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영국의 시인 밀턴(Milton, John)40세에 실명했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던 아내까지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제 영혼이 수그러짐은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함이니이다. 이제 이 고난이 제게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떠한 징계를 받든지 그 징계 속에 있는 말씀과 그 깊은 뜻을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내게 필요함을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로 낙심하지 말고 당연히 있는 것으로 받으며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납득이 갑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고 기다려보십시오. 어떤 시련을 당하든, 어떤 고난 속에 있든 그것을 징계로 받는 사람은 침묵해야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고, 누구에게 시비하지도 말 것입니다. 누구의 책임으로 전가하지도 말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기다려보십시오. 분명히 그 징계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5,6)"----징계를 받을 대로 받았으나 회개치 않으니 더는 징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함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1)"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귀한 성가를 들었습니다. 저는 성가를 들을 때마다 그것을 지휘하는 분의 수고에 늘 감사하게 됩니다. 지휘라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가운데 토스카니니(Toscanini, Arturo)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를 전공한 첼리스트로 19세 때까지는 오케스트라에서 관현악 파트의 한 단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토스카니니는 원래 안경을 껴도 잘 안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빴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단원들은 모두 악보를 멀찌감치 놓고 보면서 연주를 하는데 그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부득불 그는 그 많은 악보를 모조리 욀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맡은 부분뿐만이 아니라 피아노, 바이올린, 북 등 다른 단원이 맡은 부분의 악보까지 모두 외어두어야만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다른 사람이 쉴 때나 잠잘 때에도 밤을 새워가며 그 악보들을 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 리허설을 하기 위하여 모든 단원이 모였는데 그날 따라 공교롭게도 지휘자가 아파서 입원하는 바람에 그 시간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연습은 해야만 합니다. 단원들은 모든 악보를 외고 있는 토스카니니를 지목하여 대신 지휘하기를 요청합니다. 처음 해보는 지휘이기는 하지만 평소 악보를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외고 있던 터라 아주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토스카니니는 그 자리에서 그 오케스트라의 정식 지휘자로 임명되어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일평생 지휘를 하면서 단 한번도 앞에 악보를 놓고 지휘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긴 시력이 나쁘니 있었다고 한들 소용은 없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자신의 단점이었던 나쁜 시력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징계 속에는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행, 그것은 단순한 불행일 수 없습니다. 먼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에 그 지난날의 불행 속에 징계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강권적 은혜가 있었음을 깨닫고 간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연방헌법의 기초에도 참여하여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매디슨(Madison, James)의 기도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저의 가시에 대하여 결코 감사하지를 못했습니다. 저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수만 번 감사하면서도 주님이 제게 지워주신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 할 줄 몰랐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저의 인생 항로를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이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저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저에게 고난 당하는 것이 제게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당한 징계가 분명 유익한 것이었다고 언젠가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하여 애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고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버리고 나서 그 영혼이 깨끗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 눈이 잘못의 원인인 줄 알면서도 그 눈을 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빼어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내 손이 타락의 원인인 줄 알면서도 그 손을 찍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찍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깨끗한 영혼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갈 수만 있다면 이것이 어찌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참자녀됨을 내 뜻대로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는 징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됨과 자녀 되게 하심과 그 깊은 사랑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징계에 대한 바른 신앙적 이해 속에 삶의 용기와 삶의 새로운 창조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징계에 대한 신앙적 이해 (히브리서 12513)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 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어린아이들은 늘 스스로가 사랑 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놀다가도 먹다가도, 심지어는 자다가도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울기도 하고 사고를 내기도 합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늘 부모님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싶어하고,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크고 작은 선물을 받고 싶어합니다. '나는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순간에라도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라고 하는 문제에 의심이 생기면 참을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생각은 흑백논리에만 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스스로의 생각 밖에서 이루어지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어쩌다 한번 책망이라도 들으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중을 듣고 매를 맞으면 나는 필요 없는 존재라고까지 믿어버립니다. 나는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부모님이 해주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고 내 의견이나 생각을 꺾으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받는 것은 사랑이요 빼앗기는 것은 미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흑백으로 나누어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해지면 그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됩니다. 칭찬도 사랑이요 책망도 사랑이요, 때로는 매맞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꽤 나이가 먹고도 아직도 유아적인, 흑백 논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내 뜻대로 되어야만 사랑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좀더 자라서 성숙한 인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면 오히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속에 더 큰사랑이 있었음을 깨닫고 감격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참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생자에 빗대어 참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자녀란 무엇입니까? 간단하고 명백합니다. 권면이 있고 꾸지람이 있고 징계가 있고 채찍질이 있으면 참 자녀인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꾸지람도 없고 징계도 없고 채찍질도 없다면 버려진 자식인 것입니다. 프랑스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는 벌할 줄도 안다.' 징계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아들'이라는 말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헬라어로는 '아들''휘오스'라고 합니다. '휘오스'는 어린아이 티를 벗어나 웬만큼 자란 성숙한 자녀를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테크나'입니다. 부모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성숙한 자녀를 일컬을 때에는 '휘오스'라고 합니다.

본문말씀은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지 귀가 닳도록 권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전파하라, 가르쳐라, 권면하라----강하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군중 앞에서, 선상에서, 혹은 법정에서, 심지어 감옥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말씀 전함을 그는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강하게 명령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곧 기회를 얻었으면 전할 것이요, 기회를 얻지 못했으면 기회를 만들어서 전하라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을 문안간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분인데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일반병실에 입원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특실에 계셔도 될 형편인데 왜 사서 고생이냐고 물었더니 몇 가지 속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저는 건강할 때, 전도라는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비로소 같이 입원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괴롭지만 병든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특실에 있으면 혼자 감옥에 갇힌 양 지내야 할 텐데 일반병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지내며 그들에게 전도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원하십니까? 어떤 생활을 해나가야 되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조그마한 선교모임에 참석을 해보았습니다. '직업과 전도'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데, 참석한 사람 가운데 은행에 근무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월급은 적어도 텔러(teller), 창구에 앉아서 금전을 출납하는 일을 고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줄곧 그 일만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급을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주임도 지점장도 필요 없다, 나에게는 이 일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창구에 앉아서 돈을 받고 내주고 하면서 손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돈을 좀 찾을 일이 있어서 은행에를 갔더니 창구 여직원이 돈을 내주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어디어디에 쓸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이 아가씨 하는 말이 '교회에 가는 것 잊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목사한테 교회 나가는 것 잊지 말라고 합디다. 그래서 꼭 나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마는 이런 분들에게는 돈이 문제가 안됩니다. 부자가 무슨 대숩니까?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서 한마디씩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출세해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세도 부려보았자 허무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생을 질적으로 살아가 보십시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부지런히 전도하십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혜가 있든지 없든지, 상대방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에서 명령합니다. "네 직무를 다하라." 파수꾼의 직무입니다. 사람들이 깨든 안 깨든 기상나팔은 불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묻지 마십시다. 기다리지도 마십시다. 좋은 대답이 있기를 바라지도 마십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내하며, 고난을 받으며 --- 복음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하고서 욕을 당하면 그 욕은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지런히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서 말씀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에게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내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엄한 명령입니다. 종말론적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203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우리의 마지막 운명은 이 말씀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우리가 성경을 사랑합니다. 마침내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우리의 운명을 책임집니다. 말씀에 위탁할 때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줄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징계란

첫 번째가 권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권하다'의 헬라어 '파라크레이시스''위로한다, 달랜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파라크레이토스''보혜사'를 뜻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므로 잘했다고 칭찬도 해보고 권면하며 달래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간곡하게 권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온 바요, 또한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그대로 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권면입니다. 헬라어로 '디아레고마이'라고 하는 이 말은 강화(講和), 설교, 강연을 의미합니다. 부모님들은 늘 자녀에게 설교를 합니다. 이치를 따져가면서 합리적으로 말합니다.

이렇듯 부모님들은 자녀들 앞에서는 모두 설교가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면 속에는 진정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자녀들이 이를 잘못 받아들여서는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느니, 웬 설교가 그리 기냐느니 불평을 합니다마는 그 많은 말속에, 그 많은 설명 속에는 부모님의 간곡한 권유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꾸지람입니다. 헬라어로 '엘렝코'라고 하는 이 말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꾸짖는다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높여서 강하게 꾸짖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설교만으로는 자녀를 설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꾸짖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가라, 오라, 안 된다, 하지 말라---명령조의 다소 고집스러운 말을 쓸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타협과 설명이 자녀들에게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권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꾸지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징계입니다. 헬라어로 '파이데이아'라고 하는 이 말은 '훈련'을 의미합니다. education이 아니라 discipline입니다.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훈련인 것입니다. 교훈이 아니라 전인교육이요,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인격교육입니다. 이것이 징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채찍질입니다. 헬라어로 '마스티고오'라고 하는 이 '채찍질'은 좀더 강한 응징과 처벌을 의미합니다.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하여 응징을 하고, 벌을 내립니다. 이 채찍질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강한 의지가 채찍질 당하는 아픔 속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들을 줄 아는 자녀가 참된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채찍질은 결코 죽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심판도 저주도 아닙니다. 이것은 징계일 뿐입니다. 행동적 징계입니다. 우리는 채찍질 속에 담긴 부모님의 말씀과 뜨거운 사랑과 양보할 수 없는 강한 의지를 깨달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잘못된 자녀를 때려놓고 그 아이가 한참 울다가 잠든 뒤, 시퍼렇게 멍든 아이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렇듯 징계 속에는 크고 깊은 부모님의 사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징계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크신 주도권과 통치와 경륜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우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람과 관계되고 저 물질과 관계된 것 같지만 그실 모든 사건 속에는 크나 작으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고 죽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이 모든 일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주도권 안에서, 그분의 통치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징계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11)" ---- 당장은 징계가 슬프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징계는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잠시 볼 때에는 징계가 슬퍼 보이지마는 그 속에는 높은 경륜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매를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열 일곱 살 때까지도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았다고 기억합니다. 제 잘못을 알고 매를 맞는 경우도 있지만, 간혹 어떤 때는 영문을 모른 채 맞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매를 맞을 때는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빌어야지 말대꾸라도 할라치면 큰일납니다. 제가 매를 맞을 때에는 어머니도 어찌하시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맞다보면 무지막지하게 때리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들노릇 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매는 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크고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오히려 이런 때에 아버지가 꾸지람을 해주셨으면, 저런 때에 아버지가 때려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더군요. 그 무서운 아버지가 그렇게 그리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모두가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요, 세속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나쁜 옛 습관이 있습니다.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못된 버릇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야만 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가운데 슬하에 딸 하나만을 두고 그런 대로 만족하며 잘 지내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그 딸을 출가시키고 나자 적적하셨던지 양아들을 하나 두더군요. 외롭게 지내는 한 아이를 데려다가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서 정식으로 아들을 삼았습니다. 그 아들을 데리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시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의 못된 옛 버릇으로 인하여 그 장로님은 꽤나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발각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또 하나, 그 아이는 무엇이고 생기기만 하면 제 물건까지도 가져다 감춥니다. 장로님이 그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몇 년 동안 고생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이 버릇을 고치는 데는 무척이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징계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파스칼(Pascal, Blais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섬기라고 제게 건강을 주셨지만 저는 세상을 위하여 그것을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저를 일깨워주시려고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 이제 깊이 생각하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시기 위하여 내리시는 것이 징계입니다. 여기에 구체적인 사랑이 있고, 효과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물러 서시지도, 양보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마는 만일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다면 그 징계를 받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기에 전쟁이 있고, 실패가 있고, 역경이 있고, 고난이 있고, 배신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징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당신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교육하시고 훈련하시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종교개혁자 칼뱅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의지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밀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참아들이 된 증거로 징계를 받으라고 우리에게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비롯된 징계요, 그 징계야말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릇된 길로 갈 때에 일이 실패하거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 것이요, 그릇된 길로 가는데도 일이 형통하거든 버려진 사람으로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실패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사람된 증거로 소화하고, 거기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내 참모습을 확증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영국의 시인 밀턴(Milton, John)40세에 실명했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던 아내까지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제 영혼이 수그러짐은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함이니이다. 이제 이 고난이 제게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떠한 징계를 받든지 그 징계 속에 있는 말씀과 그 깊은 뜻을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내게 필요함을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로 낙심하지 말고 당연히 있는 것으로 받으며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납득이 갑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고 기다려보십시오. 어떤 시련을 당하든, 어떤 고난 속에 있든 그것을 징계로 받는 사람은 침묵해야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고, 누구에게 시비하지도 말 것입니다. 누구의 책임으로 전가하지도 말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기다려보십시오. 분명히 그 징계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5,6)"----징계를 받을 대로 받았으나 회개치 않으니 더는 징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함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1)"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귀한 성가를 들었습니다. 저는 성가를 들을 때마다 그것을 지휘하는 분의 수고에 늘 감사하게 됩니다. 지휘라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가운데 토스카니니(Toscanini, Arturo)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를 전공한 첼리스트로 19세 때까지는 오케스트라에서 관현악 파트의 한 단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토스카니니는 원래 안경을 껴도 잘 안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빴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단원들은 모두 악보를 멀찌감치 놓고 보면서 연주를 하는데 그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부득불 그는 그 많은 악보를 모조리 욀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맡은 부분뿐만이 아니라 피아노, 바이올린, 북 등 다른 단원이 맡은 부분의 악보까지 모두 외어두어야만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다른 사람이 쉴 때나 잠잘 때에도 밤을 새워가며 그 악보들을 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 리허설을 하기 위하여 모든 단원이 모였는데 그날 따라 공교롭게도 지휘자가 아파서 입원하는 바람에 그 시간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연습은 해야만 합니다. 단원들은 모든 악보를 외고 있는 토스카니니를 지목하여 대신 지휘하기를 요청합니다. 처음 해보는 지휘이기는 하지만 평소 악보를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외고 있던 터라 아주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토스카니니는 그 자리에서 그 오케스트라의 정식 지휘자로 임명되어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일평생 지휘를 하면서 단 한번도 앞에 악보를 놓고 지휘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긴 시력이 나쁘니 있었다고 한들 소용은 없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자신의 단점이었던 나쁜 시력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징계 속에는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행, 그것은 단순한 불행일 수 없습니다. 먼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에 그 지난날의 불행 속에 징계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강권적 은혜가 있었음을 깨닫고 간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연방헌법의 기초에도 참여하여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매디슨(Madison, James)의 기도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저의 가시에 대하여 결코 감사하지를 못했습니다. 저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수만 번 감사하면서도 주님이 제게 지워주신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 할 줄 몰랐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저의 인생 항로를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이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저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저에게 고난 당하는 것이 제게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당한 징계가 분명 유익한 것이었다고 언젠가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하여 애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고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버리고 나서 그 영혼이 깨끗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 눈이 잘못의 원인인 줄 알면서도 그 눈을 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빼어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내 손이 타락의 원인인 줄 알면서도 그 손을 찍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찍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깨끗한 영혼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갈 수만 있다면 이것이 어찌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참자녀됨을 내 뜻대로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는 징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됨과 자녀 되게 하심과 그 깊은 사랑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징계에 대한 바른 신앙적 이해 속에 삶의 용기와 삶의 새로운 창조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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