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16일(금)■
(누가복음 11장)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묵상/눅 11:27-32)
◆ 복 있는 사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자가 외쳤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권능과 지혜로 충만한 아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이렇게 소리를 높여 외쳤을까?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은총을 입은 여자'(눅 1:28), '복 받은 여자'(눅 1:48) 맞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28)
여기서 '오히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눈게'는 앞의 사실을 부정하는 의미를 가진다. 로마서 10장 18절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할 때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는 복 받은 여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리아의 복이 최고의 복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리아의 복이 부러운가? 더 큰 복이 있다.
훌륭한 아들을 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사업이 형통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권력을 얻게 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그외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열거해보라.
그리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덧붙여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다른 사람이 받은 복이 엄청나게 커 보이는가? 정말 부러운가?
그 사람보다 더 복된 사람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셨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이것이 복되다고 하신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다른 것이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이것은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가!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아침마다 이 복을 누린다.
◆ 요나의 표적
(29)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16).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파도를 잔잔케 하고 바다 위를 걸어도 아직 부족하다고 트집 잡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을 모두 침묵시킬 가장 큰 표적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사흘 밤낮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으셔서 무덤에 매장되셨다가 부활하실 것이다. 세상의 오만가지 이론이 난무해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fact) 앞에서 모두 무용지물이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느니, 예수님은 이러저러하다고 제 아무리 멋대로 떠들어대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역사적 사실 앞에서 당신의 모든 거짓 이론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싶은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싶은가?
오직 하나만 증명해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만을 밝히면 된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라면 믿지 않는 당신은 두려워 떨어야 할 것이다.
◆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이 어떤 사람인가?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30). 수많은 왕이 그 지혜를 확인하기 위해서 몰려왔다. 이스라엘 왕 중에서 으뜸이었고, 그의 잠언과 전도서를 성경에 삽입해둘 정도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무척 거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크신 이다.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내가 장관보다 더 높은 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오만일 수 있는가? 오히려 내가 장관보다 낮은 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신나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씀들을 종종 하시는 바람에 여러 사람에게 '신성모독'으로 공격받으셨다.
감히 남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했다고 공격받았으며(마 9:3), 하나님 우편에 있을 것이라는 말에 공격받으셨다(마 26:64).
예수님은 절대로 인간이면 할 수 없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그뿐인가?
그런 참람한 말씀을 하시고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다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가 거슬리는 말들이다. 불편하고 모순투성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아멘으로 받으며 그분의 온유와 겸손 앞에서 감동한다.
무화과나무를 단숨에 말려 죽이시는 그 능력을 가지고서도 자기를 주먹으로 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분이 온유하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온유한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는데 이보다 더 진정한 겸손이 어디 있는가? 인간들이 칭찬받고 싶어서 겸양을 떠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예수님의 겸손을 깨달은 뒤로는 인간의 어떤 겸손도 진정한 겸손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낮추어도 겸손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 주님의 겸손이야 말로 진정한 겸손이다. 오직 주님을 믿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겸손이다.
나는 예수님께 엎드린다.
그를 경배하며 찬양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이렇게 마음껏 접할 수 있는 이 놀라운 복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
주님의 말씀을 읽고 행할 수 있는 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복됩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11장)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묵상/눅 11:27-32)
◆ 복 있는 사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자가 외쳤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권능과 지혜로 충만한 아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이렇게 소리를 높여 외쳤을까?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은총을 입은 여자'(눅 1:28), '복 받은 여자'(눅 1:48) 맞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28)
여기서 '오히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눈게'는 앞의 사실을 부정하는 의미를 가진다. 로마서 10장 18절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할 때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는 복 받은 여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리아의 복이 최고의 복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리아의 복이 부러운가? 더 큰 복이 있다.
훌륭한 아들을 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사업이 형통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권력을 얻게 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그외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열거해보라.
그리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덧붙여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다른 사람이 받은 복이 엄청나게 커 보이는가? 정말 부러운가?
그 사람보다 더 복된 사람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셨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이것이 복되다고 하신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다른 것이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이것은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가!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아침마다 이 복을 누린다.
◆ 요나의 표적
(29)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16).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파도를 잔잔케 하고 바다 위를 걸어도 아직 부족하다고 트집 잡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을 모두 침묵시킬 가장 큰 표적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사흘 밤낮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으셔서 무덤에 매장되셨다가 부활하실 것이다. 세상의 오만가지 이론이 난무해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fact) 앞에서 모두 무용지물이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느니, 예수님은 이러저러하다고 제 아무리 멋대로 떠들어대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역사적 사실 앞에서 당신의 모든 거짓 이론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싶은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싶은가?
오직 하나만 증명해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만을 밝히면 된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라면 믿지 않는 당신은 두려워 떨어야 할 것이다.
◆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이 어떤 사람인가?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30). 수많은 왕이 그 지혜를 확인하기 위해서 몰려왔다. 이스라엘 왕 중에서 으뜸이었고, 그의 잠언과 전도서를 성경에 삽입해둘 정도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무척 거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크신 이다.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내가 장관보다 더 높은 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오만일 수 있는가? 오히려 내가 장관보다 낮은 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신나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씀들을 종종 하시는 바람에 여러 사람에게 '신성모독'으로 공격받으셨다.
감히 남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했다고 공격받았으며(마 9:3), 하나님 우편에 있을 것이라는 말에 공격받으셨다(마 26:64).
예수님은 절대로 인간이면 할 수 없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그뿐인가?
그런 참람한 말씀을 하시고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다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가 거슬리는 말들이다. 불편하고 모순투성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아멘으로 받으며 그분의 온유와 겸손 앞에서 감동한다.
무화과나무를 단숨에 말려 죽이시는 그 능력을 가지고서도 자기를 주먹으로 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분이 온유하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온유한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는데 이보다 더 진정한 겸손이 어디 있는가? 인간들이 칭찬받고 싶어서 겸양을 떠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예수님의 겸손을 깨달은 뒤로는 인간의 어떤 겸손도 진정한 겸손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낮추어도 겸손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 주님의 겸손이야 말로 진정한 겸손이다. 오직 주님을 믿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겸손이다.
나는 예수님께 엎드린다.
그를 경배하며 찬양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이렇게 마음껏 접할 수 있는 이 놀라운 복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
주님의 말씀을 읽고 행할 수 있는 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복됩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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