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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은혜(마가복음 2:27).

by 【고동엽】 2026. 1. 24.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은혜(마가복음 2: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한 문장 안에 복음의 숨결과 하나님의 마음을 압축해 담아 보여 주는 보석과 같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마가복음 2:27). 이 말씀은 단지 율법 조항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하는 문장이 아니라, 상처 난 영혼을 일으키고, 짓눌린 마음을 풀어 주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름 아래 다시금 사람을 얽매이게 만들려는 모든 거짓 경건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 가벼워져야 함을 잊고, 더 무거워지는 길로 들어섭니다. 은혜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내리는 비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어야 하는데, 어느새 우리는 규칙을 돌처럼 움켜쥐고 그 돌로 자기 자신과 이웃의 이마를 두드리며, 하나님께 드린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주님은 오늘 그 길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너를 살리기 위해 있다.”

마가복음 2장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며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습니다. 배고픔을 달래는 소박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비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날을, 사람을 살리는 쉼의 방으로 만들지 않고, 사람을 심문하는 법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이 영혼의 침상이어야 하는데, 안식일이 양심을 채찍질하는 채찍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굶주린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었던 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이는 “규정 무시”의 미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본래 생명을 살리고 긍휼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질서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사람을 질식시키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셨습니다. 율법은 은혜와 경쟁하는 칼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 삶에 어떤 형태로 열매 맺어야 하는지 보여 주는 빛입니다. 그러나 죄로 굽어진 인간의 마음은 이 빛을 뒤틀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사다리”로 만들고, 사다리를 오르지 못한 자를 정죄하는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복음이 사다리를 부숴 버리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발걸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역시 우리의 공로를 증명하는 시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잔치의 자리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덕법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영한다고 고백합니다. 십계명은 폐기된 고문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를 비추는 등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혁주의는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바꾸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감사의 순종을 가르칩니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안식일은 생명의 날이 아니라 공포의 날이 됩니다. “나는 오늘 안식일을 제대로 지켰는가”라는 질문이, “나는 오늘 주님 안에서 참 쉼을 누렸는가”라는 질문을 삼켜 버립니다. 전자는 우리를 자기 의로 몰고 가고, 후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품으로 데려갑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은 인간 중심의 자기 만족을 정당화하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구속 목적이 인간을 파괴가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멈춤”을 설계하셨습니다. 쉼은 게으름의 별명이 아니라 창조의 리듬입니다. 죄는 이 리듬을 깨뜨립니다. 죄는 멈추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쉬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증명하게 합니다. 더 벌어야 한다, 더 성취해야 한다, 더 인정받아야 한다, 더 비교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게 영혼이 지쳐 쓰러질 때, 하나님은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멈춤은 단지 노동의 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 제가 세상을 굴리는 손이 아니라, 주님께 붙들린 손임을 믿습니다.” 안식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진리를 다시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안식일의 은혜는 단지 창조 리듬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영혼이 왜 그렇게 지치는지, 우리의 마음이 왜 그렇게 불안한지, 우리는 왜 쉬면서도 쉬지 못하는지, 그 뿌리를 묻는다면 결국 죄책과 두려움과 자기 구원 시도에 닿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쉬지 못합니다. 세상 일이 멈춰도 마음의 소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눈을 감아도 양심은 깨어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안식은 단지 일정표의 비움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이, 영혼을 눕힙니다. 십자가의 피가, 마음의 긴장을 풀어 줍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내면의 불을 끕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그저 “휴식”이 아니라 “화해의 쉼”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가, 아들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두려움의 굴레에서 놓이는 쉼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더 큰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즉 안식일은 어떤 규정의 왕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논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말씀이 가능한 이유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은혜는 십자가 없는 도덕이 아니라, 십자가로 빛나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율법이 우리에게 더 이상 사형선고가 아니라 생명의 길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안식의 문을 여셨기에, 안식일은 우리에게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초대장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함께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안식일을 사람 위에 올려놓습니다. 사람을 율법의 발받침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규칙 점검자”로 축소합니다. 율법주의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긍휼을 약화시키고, 마음을 말라가게 하며, 공동체를 차갑게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방종입니다. 방종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다”는 말씀을 빌미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가볍게 하고, 거룩의 부르심을 흐릿하게 만들며, 결국 영혼을 더 피곤하게 합니다. 방종은 잠깐의 편안함을 주는 듯하지만, 하나님 없는 자유는 곧 불안으로 변합니다. 참된 길은 그 중간 어딘가의 타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제자리를 찾는 길입니다. 율법은 주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은혜의 종으로 서야 합니다. 안식일은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누리는 기쁨의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이 우리를 위한다는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게 빛나야 하겠습니까. 먼저, 안식일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날입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단지 예배당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일 동안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내어줍니다. 성과의 목소리, 불안의 목소리, 비교의 목소리, 후회의 목소리, 세상의 소음이 우리의 심장을 끌고 다닙니다. 안식의 날은 주님의 음성이 그 모든 잡음을 잠재우는 날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이 부르심이 안식일의 공기입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실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또한 안식일은 관계가 회복되는 날입니다. 죄는 언제나 관계를 부수고, 관계가 부서진 자는 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내면의 평안이 사라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찢어지면 마음의 피로가 깊어집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을 추구하며, 가족 안에서 사랑의 말이 회복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하루에 모든 관계가 완전히 봉합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향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에 우리는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꺼내어 들고, 그 용서가 흘러가야 할 자리로 걸어가야 합니다. 용서는 쉬게 합니다. 미움은 잠을 빼앗고, 용서는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긍휼을 배우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안식일 논쟁 한복판에서 다윗의 굶주림을 언급하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굶주린 자를 죄인 취급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의 계명은 냉정의 계명이 아닙니다. 필요와 자비를 무시하는 경건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은, 연약한 자를 향해 마음을 닫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을 더 선명히 닮아 간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건네는 일이, 주님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고통받는 자를 돌보는 일이, 형식적 규정 준수보다 더 깊은 안식일의 정신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손길이야말로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찬란한 실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교회에 늘 “주일은 거룩한 날”을 강조하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주일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강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교회로 가는 길에 이웃집 할머니가 길가에서 넘어져 다리를 부여잡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마음속에서 두 목소리가 싸웠습니다. “주일에는 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와, “저분을 돕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목소리였습니다. 장로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할머니를 부축해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고, 가족에게 연락해 병원에 가도록 도왔습니다. 예배에는 조금 늦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교 본문이 우연히도 마가복음 2장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장로님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배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늘 저는 예배에 늦은 것이 아니라, 예배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주일을 지키려 했는데, 주일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거룩을 인간의 냉정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거룩을 사랑으로 빛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안식일의 은혜를 “아무렇게나”로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선물은 가볍게 소비할 물건이 아니라, 감사로 받들어 누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영혼의 정수리 위에 내려앉는 하늘의 이슬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는 우리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사람을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예배를 하찮게 하거나, 거룩을 지우거나, 방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와 거룩이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의무의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생명의 샘에 입을 대는 시간입니다. 설교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입니다. 공동체는 비교의 전시장이 아니라, 서로의 영혼을 받쳐 주는 사랑의 집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주일을 “주의 날”로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통을 고수하려는 습관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 창조의 첫날을 여셨다는 복음적 의미를 담은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일어나신 그 날은, 장차 올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게 하는 표지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안식”의 약속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 백성에게는 아직도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광야를 지나지만, 약속의 안식이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안식은 단지 한 주의 피로를 풀어 주는 휴일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평안을 미리 맛보게 하는 복음의 예고편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마지막 집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잠시 멈추어, 그 안식을 미리 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게 속삭이지 않습니까. “저는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쉬어도 쉬어지지 않습니다. 예배에 와도 마음이 분주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걱정이 따라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셔야 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주님은 여러분을 탓하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여러분의 어깨 위에 올려놓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분을 주님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십니다.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시는 목자의 그림처럼, 주님은 지친 영혼을 붙드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너지기 전에 “멈추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멈추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멈추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징계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나, 사실은 사랑의 손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으시고, 자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안식일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정돈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주일을 지키려 애쓰다가, 주님을 잃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 저는 자유를 말하다가, 거룩을 잃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주님, 오늘 저를 다시 붙드소서. 규정이 아니라 주님께 매이게 하소서. 형식이 아니라 복음의 심장으로 살게 하소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 고백이 우리 안에 맺힐 때, 안식일은 우리를 억누르는 날이 아니라, 우리를 들어 올리는 날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쉼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참 쉼을 누린 자가, 참 사랑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는 자가, 그리스도의 멍에를 기쁨으로 집니다. 왜냐하면 그 멍에는 무겁지 않고, 그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혼을 덮어,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설교요약

  • 안식일은 사람을 얽매는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 바리새적 율법주의는 안식일을 법정으로 만들고, 복음은 안식일을 쉼의 집으로 회복합니다.
  • 개혁주의 관점에서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길잡이입니다.
  • 참된 안식은 단지 노동 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칭의와 화목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쉼입니다.
  • 주일의 안식은 부활의 복음을 기억하며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거룩한 기쁨의 날입니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안식일(주일)을 “증명”의 날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회복”의 날로 누리고 있는가.
  • 예배와 거룩이 내 삶에서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사람을 상처 내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 나는 율법주의(냉정, 정죄, 비교) 혹은 방종(경외 상실, 거룩 경시) 중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가.
  • 주님이 주시는 쉼의 핵심은 “일정”이 아니라 “복음”임을 믿고 있는가.
  • 오늘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사람을 향해, 안식일의 긍휼을 어떻게 흘려보낼 것인가.

강해

마가복음 2:27은 안식일 논쟁의 결론으로 주어진 예수님의 규정 해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성품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목적을 “사람을 위한 것”으로 제시하심으로, 계명의 본래 지향이 생명과 긍휼에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어지는 2:28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안식일 해석의 최종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단순한 종교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연결되어 “참 쉼”을 제공하는 복음의 통로가 됩니다. 이 관점은 율법주의를 해체하고 방종을 경계하게 하며, 은혜 안에서 거룩의 질서를 기쁨으로 회복하게 합니다.

주석

  • “안식일”은 창조 질서(하나님이 쉬심), 언약 표지(이스라엘의 구별), 그리고 종말론적 소망(장차 올 안식의 예표)을 함께 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시되, 사람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오용된 해석을 바로잡으십니다.
  • “사람을 위하여”라는 방향성은 계명의 목적론적 해석을 요구합니다.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길이며, 그 길은 생명을 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 예수님은 다윗의 사례를 통해 “필요”와 “긍휼”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해석의 열쇠임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계명 무시가 아니라 계명의 본 뜻 회복입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헬라어 본문(대표적 형태): τὸ σάββατον διὰ τὸν ἄνθρωπον ἐγένετο, οὐχ ὁ ἄνθρωπος διὰ τὸ σάββατον.
  • τὸ σάββατον (to sabbaton): “안식일”을 가리키는 중성 단수. 단순한 날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표징을 포함합니다.
  • διὰ (dia) + 대격: “~을 위하여/목적으로”의 의미가 강합니다. 안식일의 목적이 사람의 파괴가 아니라 유익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 τὸν ἄνθρωπον (ton anthrōpon): “사람”을 일반적 의미로 지칭하며,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필요를 포함하는 보편적 표현으로 읽힙니다.
  • ἐγένετο (egeneto): “되었다/생겨났다”의 아오리스트. 안식일의 존재 이유가 ‘설계’되어 주어진 선물임을 시사합니다.
  • οὐχ (ouch): 강한 부정.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안식일 준수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부정합니다.

금언

  •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을 누르는 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빛입니다.”
  • “안식은 시간을 비우는 기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 “거룩은 냉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빛납니다.”
  • “주일은 의무의 목록이 아니라, 복음의 샘입니다.”
  • “참된 쉼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어 영원한 안식으로 자랍니다.”

신학적 정리

  • 율법의 삼중 용도: 죄를 드러냄(정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교사),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인도함(규범). 안식일 이해도 이 질서 안에서 건강해집니다.
  • 그리스도 중심성: 안식일의 주권은 그리스도께 있으며, 안식의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 종말론적 안식: 주일의 쉼은 장차 올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표지로서 기능합니다.

주제별 정리

  • 율법주의: 규정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긍휼을 잃게 함.
  • 방종: 은혜를 구실로 거룩의 질서를 무너뜨려 결국 영혼을 더 피곤하게 함.
  • 복음적 순종: 구원받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누리며 지킴.
  • 긍휼과 필요: 하나님 나라의 해석 원리로 작동함.

목회적 정리

  • 지친 성도에게 주일은 “더 해야 하는 날”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날”이어야 합니다.
  • 공동체는 주일을 통해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서로를 살리는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 예배의 강조는 사람을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 연약한 자를 향한 돌봄은 주일의 거룩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의 심장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이번 주일, 예배를 “평가”가 아니라 “만남”으로 받겠습니다.
  • 주일을 ‘완벽하게 지켰는가’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쉼을 누렸는가’로 점검하겠습니다.
  • 정죄의 말 대신 회복의 말을 선택하겠습니다.
  • 가족과 이웃을 향해 작은 긍휼 한 가지를 실천하겠습니다.
  • 주중에도 짧은 멈춤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리듬을 만들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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