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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에 약속된 복(잠언 4장 1절~9 절)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30여년 전,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니 저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해야 할 사람들이 효도를 다 못하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일찍이 세상을 떠난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효도해야 할 부모님이 옆에 살아 계시는데도 효도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살아생전에 효도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만큼은 아주 거창하게 치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요즘 보면 관 하나에 6백만 원짜리가 있고 수의(壽依) 한 벌에 5백만 원짜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낭비를 해가면서 굉장한 장례식을 치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제사하는 데 돈을 엄청나게 들입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언젠가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던 중, 제사 뒤에 작용하는 좋지 않은 심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나이 많은 부모, 병든 부모가 내게 이롭게 해줄 것은 한가지도 없다. 하지만 돌아가셔서 귀신이 되면 복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심리입니다. 나 중심에서 볼 때 득볼 것이 없다 해서 살아 계신 부모를 소홀히 여기고 죽어 귀신이 된 다음에야 열심히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기가 찰 노릇입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복을 '받자'는 것이 아니라 '강도질하자'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한테서는 효 사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들 말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어느 학자는 나름대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지식이 부모로부터 왔다.
삶의 지혜와 기술의 습득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아야 살 수 있었다. 평생을 머슴살이해도 제 힘으로는 밭 몇 뙈기 사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와 신분도 부모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양반 자식은 양반으로, 상인 자식은 상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옛날에는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사회와 학교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얻기 때문에 옛날처럼 부모 덕볼 일이 없고, 그래서 효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곧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더라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효도 받는다." "받기보다 조금씩 주면서 살아야 자식도 나를 위한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그런 효도라면 받지 않느니만도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순수한 효의 개념, 그 자체가 타락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퇴색하였습니다. 복이란, 위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받는 길을 분명히 보여주셨으니, 그것은 곧 십계명에도 명시(明示)된 부모 공경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혜의 왕 솔로몬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여기에서 솔로몬은 '선한 리'를 전한다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굿 독트린(good doctrine)-곧 선한 교리를 가르쳐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장 효에 대해 말합니다. 효는 인간에 대한 계명들 중에서 첫째 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첫째부터 다섯째 계명까지는 엘로힘(Elohim),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지만 여섯째부터는 그 말이 없습니다. 효에 대해 언급한 다섯째 계명도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왜 여기에만 특별히 하나님이라는 말이 들어갔을까요? 어째서 다섯째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언급한 위의 네 계명과 똑같이 취급되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직적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는 맥락에서 효와 신앙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궁극적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지만 부모도 생명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대행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도둑질을 가르치는 아비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는 도둑질을 하더라도 자식한테만은 그것이 나쁜 일임을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부모의 훈계를 짜증스러워합니다. "아이구 또 잔소리야!" 하고 반항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듣기 싫은 소리라도 자꾸 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리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사실, 자식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고 공부를 강조하는 부모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공부를 못해 본 사람들입니다. 해본 적이 없으니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몰라요. 다만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는데 대한 한이 맺혔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자식들에게 '내가 못해 본 것 네가 좀 해다오' 하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자녀들에게만은 제발 바른 길을 가 달라고 애원합니다. 부정직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자녀들에게는 진실을 강조합니다. 그 많은 잔소리에 다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은 선합니다. 적어도 자녀들을 향한 훈계는 항상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말씀을 공경할 때에 결코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 : 12)"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에 받을 축복이 큽니다. 하지만 부모 앞에서 불경스러운 언동(言動)을 일삼으며 불효할 때에는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에 대한 불효를 하나님께 대한 불경만큼이나 중요하게 취급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7장 15절부터 26절까지에 12가지 저주받을 행위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첫째가 우상숭배에 대한 저주요, 둘째는 불효에 대한 저주입니다. 계속해서 잠언 1장 7절 이하를 읽어 가노라면 믿음과 효, 경건과 효를 하나의 뜻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효에 따른 축복은 첫째, 장수(長壽)입니다.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장수하는 가정들을 보면 분명히 효가 있습니다. 둘째, 효도하는 사람은 지혜와 명철을 얻습니다. 효도함으로써 부모님의 모든 지혜를 배웁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받드는 동안 그 많은 경험, 그 많은 실패와 역경 속에서 얻은 소중한 지혜가 그대로 내 것이 됩니다. 그런고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어리석고 고집스럽고 교만한 사람이 되며, 결국은 인격적인 파산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쩌면 불효에 대한 심판이 '어리석음'으로 내려진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셋째, 효도하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영광도 주어집니다. 어느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이 말하기를, 자신의회사가 잘되는 이유는 사람을 채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화려한 경력, 학력도 좋지만 그 사장님이 중요하게 보는 것은 첫째가 부부간의 화목이랍니다. 부부 사이가 원만치 못한 사람에게는 분명히 무슨 결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 사람이 효자인가, 연세 많으신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부모 공경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력서 볼 것 없이 채용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상관을 배신하는 법이 없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뇌물을 받거나 공금 횡령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정말 효도함은 '금 사슬을 목에 거는 것이요, 영화로운 면류관을 머리에 얹는 것(잠 1 :9)'임을 잊지 마십시오.
효도함으로 내게 주어질 축복이 큽니다. 효도하는 사람의 가정과 자녀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기를 원한다면 효도하십시오. 여행, 취미생활-이거 별볼일 없습니다. 효도해야합니다. 형제애의 뿌리도, 부부의 사랑도 효에 있습니다. 효도하는 동생이 효도하는 형을 사랑할 수 밖에요. 효도하는 남편이 효도하는 아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효 안에 성숙된 사랑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또한 자녀 교육을 위해서도 효가 필요합니다. 효도하는 가운데 훌륭한 자녀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6․25때 있었던 일입니다. 신앙심 깊은 어느 부모가 아들을 최전선으로 보내며 당부했습니다. "네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어느 곳에 있든지 새벽 5시가 되면 우리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전쟁터는 험한 곳입니다. 많은 시험이 있고 유혹이 있고, 잘못될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이 젊은이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 기도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죄의 길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지켜 경건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새벽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의 부모님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마고 약속한 시간 아닙니까? '지금쯤 어머니 아버지께서 새벽 기도를 시작하셨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젊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그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마음이 생겼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머리 위로 "타-앙!"하고 총알이 날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서있었다면 그는 영락없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경건한 가정, 효도하는 마음이 있는 가정 분위기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한 교육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돌아가서 여러분의 부모님께 효도하세요. 내가 효도할 때에 자녀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루마니아의 공산당원들이 어느 목사 한 사람을 끌어다 놓고 심한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하라고, 신앙을 부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독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자, 공산당원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목사의 14세 된 외아들을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고문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자, 아버지는 참다못해 외쳤습니다. "멈추시오! 내가 예수님을 부인하겠소!" 그때 목사의 아들이 죽어 가면서 말하기를 "아버지, 방금 말씀하신 것 취소하세요.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세요. 저는 예수님 이름을 저주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재벌이 되어서 많은 재산을 물려주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들은 물불 안 가리고 억척스럽게 그러모은 재산을 부끄러워합니다. 땀흘리지 않고 쉽게 들어온 돈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물려줘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여러분의 자녀 된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훌륭한 명예를 물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가정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서 무엇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부모님께 효도할 때 내 자식이 바로 자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도 내게 효도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합니다. 부모님을 거역하면서 제 자식 잘 키우겠다는 생각은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임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오늘의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가장 모범적인 효자가 누구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삭이었습니다. 자, 이삭을 보십시오. 그는 아브라함이 백 살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 모리아 산에 올라간 때는 대략 27세쯤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27세된 아들이 산길을 올라가며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불도 있지만 제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제물이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겠지." 아브라함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 제사드릴 곳에 올라가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는 아들과 함께 이야기합니다. 성경에는 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전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예, 압니다." "얼마나 사랑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줄 압니다.""좋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일이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 "압니다." "그렇다면 이 제단 위에 올라가 누워라. 하나님께서 내게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단다."그러자 이삭은 "예" 하고 순순히 장작더미 위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 좀 해보십시오. 만일 요즈음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누구든지 "아버지가 백 살을 넘더니 노망을 해도 한참을 했구먼.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지. 귀가 먹어서 잘못 들은 게야" 하고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의 거룩한 명령을 따라 제단 위에 누웠다는 말씀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께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산 제물로 바쳐질 것을 예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야곱을 보세요. 그의 아들들은 요셉을 애굽에다 팔아먹고 나서 아버지한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정말 죽은 줄 알고 13년 동안 울고불고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요셉은 살아 있었지요? 아들들한테 완전히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할말이 없습니다. 왜 나를 속였느냐고 따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야곱 자신도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인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전자전(父專子專)이라는 것이지요.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자기는 불효하고 자식에게 효도를 강요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당찮은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 39)."우리는 이 말씀을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전적인 동의와 충성이라는 맥락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효도할 때에 사회가 복을 받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바로서야 사회 질서도 바로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가정은 최초의 학교요, 부모는 최초의 교사"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사랑, 은혜와 공의, 조화와 자유, 온유와 순종, 겸손, 신뢰-이 모든 것은 오직 가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효가 바탕이 된 가정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레미야 35장을 보십시오. 여호야김 왕 때 하나님께서 레갑 자손을 시험하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레갑 자손에게 가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레갑 자손은 그 명령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렘 35 :6-7)"-조상이 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할 수 없다는 대답입니다. "우리 조상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온 백성 앞에서 레갑 자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효가 있어야 나라가 바로 되고 사회가 바로 됩니다. 왜 혼란과 배신과 불신, 그리고 반항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어릴 때부터 효의 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을 존경하고 순종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반항적인 체질과 잘못된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은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은가?-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을 물려주기 원하노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물려준다는 것, 여기에 진정한 효의 유산이 있습니다. 뭐 좀 기발한 유산이 없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일랑 그만두십시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바를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유산입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앙의 유산, 경건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녀들의 가정을 평화롭게 하고, 한 나라와 사회, 나아가 전세계를 바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 유산들 중에서 특히 효를 강조하고 자랑해 왔습니다. 효가 모든 행위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사회 법도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가치관의 혼란이 오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어른들은 효와 신앙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기에 비판보다 순종을, 합리성보다 경외함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따지는 것이 많은지, 참된 순종과 경외함이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소금섬을 물로 끓이라고 하면 끓이는 것이 효도라는 말을 아시죠?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자란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경구(警句)이지요. 하지만 요새는 달라요. 어느 부모가 자녀더러 소금섬을 물에 넣고 끓이라 해보십시오. 당장 양로원으로 쫓겨갈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효의 개념이 중생 되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부모님께 대한 바른 효도가 있을 때에야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그리고 이 사회와 이 나라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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