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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어버이 주일설교

[곽선희목사]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잠언 23 : 23-26)

by 【고동엽】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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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잠언 23 : 23-26)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러할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여, 인간에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에 대한 효를 다시 한번 반성하며 신앙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인 줄 압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부모에 대한 개념이나 이러한 것들이 너무 협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적으로 나를 낳아 주신 어버이만이 부모가 아닙니다. 또한 내가 낳은 자녀만이 자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결혼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는 혈연 관계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복음적으로 볼 때에는 그처럼 소중한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 훌륭한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는 아들을 훈계하였고,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위해서 받들고 순종하며, 평생토록 그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며 정말 효도를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아버지요 아들이라고 하는 사이는 많지 않은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부모에 대한 개념이나 자녀에 대한 개념이 너무 협소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교회의 어느 집사님 한 분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크게 불행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자녀 중에 한 아이가 저능아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참으로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 교회에서도 저능아들을 위해 소망반이라고 하는 교회학교를 따로 마련하게 되었는데 그 집사님이 이 직책을 맡아서 수고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의 모든 저능아들은 다 내 아들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그렇게 힘써 수고하시다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모든 노인은 다 내 부모님이다" 하는 이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젊은이는 다 내 자녀다" 하는 이러한 넓은, 또한 깊은 의미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맺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는 나는 효도할 길을 잃었다며 지난날에 불효한 것이나 후회하면서 감상적인 눈물이나 흘리는 자녀는 효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 어머니가 떠나셨으면 내 친구의 어머니도 있고, 내 이웃의 어머니도 있으며 또한 이 땅에는 버려진 어머니가 많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기 않지만 이 땅에 아버지의 연배되는 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금 더 넓은 그리고 깊은 의미에서의 효도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아버지를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나를 낳아준 아버지, 어머니, 곧 부모님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두 번째는 목사님을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적으로, 영적으로 나를 먹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요 키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내 심령 생활이 그 분에게 달렸습니다. 그런고로 목사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한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부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파더(father)라고 하여 아버지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선생님이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지적으로 나를 가르쳐 주신 분이니만큼 그 분의 영향권에 내가 있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르쳐 주신 모든 선생님들이 정신적인 세계에서 아버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이제 네 번째로는 정치적인 지도자인 왕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였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당시에는 왕정이 있을 때였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상의 이유로 하여 여러 기록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와 목사와 선생과 임금을 아버지라 하고 이 네 분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육신적으로 나를 낳아준 어버이만 생각하려는 협소한 효도의 개념을 고쳐서 복음적, 영적으로 높이고 넓히는 은혜가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버이 주일을 당하여 한국적 효의 개념을 그 유형별로 시간을 두고 조금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이제 몇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 첫째는 부모님을 장수케 해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을 오래오래 살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장수케 할 뿐만 아니라 장수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거기에 효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최고의 자랑으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고 하였습니다.
장수의 복은 효도하는 가문에 주시는 축복입니다. 따라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있고, 그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요, 성서적으로도 효도의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한국적인 개념으로 볼 때 죽음이 어떻게 자녀들의 책임이며, 생명의 문제를 누군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치 돌아가신 책임이 자식된 내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상복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장례식에 가보면 상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상주가 루우즈(rouge)를 바르지 않나, 웃지를 않나, 농담을 하지 않나,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완전히 퇴색하고 말았습니다. 상주는 죄인이요,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것이 내 잘못 때문에 돌아가신 것처럼 책임을 느끼며 애통해 하는 그것이 상주요, 그것이 효심입니다. 어찌하든지 간에 오래오래 사시도록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렇게 오래 사시도록 모시는 그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편하게 모시는 것이 효도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편하게 모시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좋은 옷을 입혀 드리고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전래되는 효도 이야기들을 보면 대개가 부모님들의 비현실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성을 다하므로 기적이 나타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는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에도 부모님이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하면 그것을 찾아 깊은 산 속을 헤매다가 복숭아를 찾아왔다든지, 추운 겨울에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시기에 꽁꽁 얼어붙은 강가에서 얼음을 깨며 애를 쓰고 있는데 그리고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는 등 대개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님께 대접하고자 했고, 그렇게 하여 대접을 하였다는 한국적 효도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과학이나, 윤리나, 합리성의 여부에 관한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어쨌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 같으면 속된 말로 돌았다고 하겠지만 고기를 잡수시고 싶어하는 부모님을 위해 가난한 살림살이를 핑계하지 않고 자기 허벅지의 살을 도려내어 고기 국을 끓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끔찍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자랑스럽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한국적 효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편하게 해드리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며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효의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곧 대를 이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가가지 않은 아들이 불효자요, 아들 낳지 못하는 며느리가 불효자가 됩니다.
그 때문에 어쨌든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손자를 안겨주는 것이 최고의 효도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효심입니다.
이제 네 번째의 한국적 효의 개념은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벼슬을 못한 아들은 불효자입니다. 출세를 해야 하고 명예를 높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문을 빛내게 될 때 그것이 효도가 됩니다. 나라를 위하여 명예롭게 죽게 되면 충신이라는 명예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가문의 명예를 높였기에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충이 효로 통하는 것이 여기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외면적이고 물량적인 면도 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혹은 내실에 있어서 문제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개념이 한국적 의미에서의 효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결국은 부모님을 높이고 최고로 여기며, 그를 기쁘게 하고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께 졸라서 들은 이야기 중에 하도 많이 들어서이기도 합니다만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야기 내용인즉, 어떤 부자 노인에게 아들들이 셋이 있었는데 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쯤 되자 자기의 논, 밭 등의 재산을 이 세 아들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대로 물려오는 보물인 하나밖에 없는 금항아리를 어느 아들에게 주어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효심이 가장 지극한 아들에게 이것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그 효심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큰아들을 불러다 놓고는 "지금 내가 나이 많아 몸이 약해졌는데 그러나 조금 더 살았으면 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젊은 여자의 젖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는데 네 어린 그 아들을 땅에다 묻어 버리고 대신 내가 네 아내의 젖을 좀 먹으면 안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나가면서 하는 말이 "오래 살더니 노망이시군" 하면서 격하게 나갔답니다.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셋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아! 그러셔야지요. 아버님께서 좀더 오래 계실 수만 있다면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아들이야 또 낳으면 되지 않습니까?"하면서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자기 아내를 설득시켜서 그리하기로 하고 이제 아들을 안고 산으로 묻으러 갑니다. 이 때에 할아버지가 따라 나서면서 내가 묻으라는 곳에다 묻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느 나무 가까이로 가더니 이 나무 밑에 묻으라고 하길래 거기를 팠더니 금항아리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자는 이야기입니까? 과학적으로 말하자는 것입니까? 합리적인 이론으로 풀이하자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도주의로 설명하자는 것입니까? 한국적 효도는 인도주의도, 합리주의도, 때로는 도덕도 초월합니다. 그 모든 것 위에 효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부모님만 편하시고 오래 사실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 라도 다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고로 달리 따질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따질 것 다 따지고 하겠다니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어느 며느리가 하도 말대답을 하니까 시어머니가 "너 정말 그렇게 말대답하기냐?" 했더니 그 며느리 하는 말이 "어머님, 이것은 말대답이 아니라 이념과 이치가 그렇습니다"하더랍니다. 언제 이념, 이치 따지고 효도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생각을 해보십시다. 이것이 한국적 효도였습니다. 효가 모든 것 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대 순종, 최고의 가치, 최고의 위치, 그리고 하늘의 명의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전래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이처럼 불행하고 살벌한 가정이 되고,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효도에 대한 개념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부모님의 높은 존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효도란 구제가 아닙니다. 나아가 나이 많은 어른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존재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간혹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우 강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세계의 곳곳에서 저들의 교육을 배워 보겠다고 야단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나라 서점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에 관한 책이 적지 않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교육, 저들의 지혜는 그렇게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강점은 신앙적 지혜에 있습니다. 그 지혜는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하면 전승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토론을 하다가도 "성경에 말씀하신다" 하면 그것으로 결론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들은 무슨 말을 하다가도 "이것이 전승이다" 하면 끝난 것입니다. 전승이란 조상 대대로 계승되어 내려온 지혜입니다. 그것은 노인들과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노인에게서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물어야 합니다. 배울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십니까? 처음 몇 개월간은 사고가 많이 납니다. 이 사고를 줄이고 싶으시면 먼저 10년 이상 운전한 분들께 듣기를 바랍니다. 내가 운전 좀 할 줄 안다고 마구 나아갈 것이 아니라 계속 듣고 물으셔야 합니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내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이 곧 효도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경험을 들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90%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전부가 다 지혜입니다. 이렇다할 성공은 없는 것 같으나 그 뼈아픈 생활과 그피눈물 나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고로 부모님의 그 긴 연륜 속에서 얻어진 많은 경험과 지혜를 소중히 여기며 들을 줄 아는 그 마음이 효도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뛰겠다고 하다가 많은 실수를 거듭합니다. 실패하고,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나 또다시 악순환을 당합니다. 이러한 것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면 먼저 경험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효자는 실수가 없습니다. 먼저한 경험을 소중히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악인의 아비는 슬퍼할 것입니다. 부한 것이 효자의 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면 오히려 부모님께 많은 근심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출세한다고 반드시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기뻐하시게 할 수 있는 첩경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비록 자신은 악했다 하더라도 자식은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문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마 7:1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으로, 선하고 의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의롭게 사는 것이 최고의 효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될 때에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따라서 듣는 자가 될 때에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듣지 않고 교만할 때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어리석은 자의 부모는 슬퍼하기 마련입니다. 잠언 1장 8-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써보고 걸어보는 그런 면류관이나 목걸이가 아닙니다.
부모의 교훈, 그 훈계가 나의 면류관이요, 금사슬의 내 목걸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요한 3서 4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아들이 진실하게 살고, 내 딸이 아름답게 사는 그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고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드리며, 그 길을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부모님의 철학과 부모님의 이상, 부모님의 과거와 현재, 그 직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 가문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에 비로소 효도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아들이 멀리 유학을 떠나 공부를 하면서 자기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이러한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저에게 잘해 주셨습니다.
제가 혹시 앞으로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낳았을 때 아버지 어머니처럼 내 자녀에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는 그의 부모님을 크게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와는 반대로 내가 어쩌다가 이러한 가문에 태어났는가 하고 나온다면 이것처럼 큰 불효가 없습니다.
내 아들아 내 길을 마음에서부터 즐거워할찌니라!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 다 옳고, 그 교훈, 그 뜻이 옳았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효도요, 그리고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때에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효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효도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거기에 효도하는 길이 있고, 효 자체는 곧 축복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은 성서적인 약속입니다. 효도할 때에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됩니다. 복의 뿌리가 됩니다. 효도하는 가정에 장수하는 축복을 더하시고 또한 모든 형통함의 복을 주시마고 말씀하십니다. 효는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를 기쁘게 하고 그의 길을 즐거워하며 주안에서 순종할 때에 복된 가정이 될 것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효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머무는 귀한 가정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찌어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에게 귀한 부모님들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부모님을 슬프게 했고, 웃음 대신에 한숨과 눈물을 드렸사오며, 마음에 아픔을 드린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새롭게 다짐하게 하시사 의의 길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믿음 안에서 기쁨으로 효도를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주시는 평강과 그 큰 축복을 가정에 충만히 채울 수 있도록 은혜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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