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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자의 복(시편 32편 1절~7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젊음, 자유, 독신(獨身)'을 행복의 조건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 조건은 모두 위험한 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발상이 선하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행복이 어찌 이 세 조건에 의존하겠습니까? 의와 진실과 믿음이 빠졌습니다. 의와 진실과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고민 밑바닥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음이요, 하나는 죄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가 문제입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죄책(罪責)이 희미해져간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창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죄가 존재해왔습니다. 문제는 죄로 인한 가책, 죄로 인한 고민이 점점 둔화되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죄의식이 희미해지고 마비되어갑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66권 어느 곳을 보아도 얼마나 오래 사느냐, 얼마나 건강하냐, 얼마나 잘사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불행한 것도 죄 때문이요,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길도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죄책이야말로 고민의 뿌리입니다. 몸 아픈 것이 문제입니까? 마음이 아파서 문제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아픈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책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몸도 아픈 것입니다. 죄책 없는 불행이 있다면 그것이 무슨 불행이 되겠습니까? 죄책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어찌 고통이라 하겠습니까? 죄책 없는 죽음이 있다면 그 죽음을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습니까? 문제는 죄입니다. 죄 때문에 불행하고, 죄 때문에 고통스럽고, 죄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죄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도 듣기도 싫어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목사한테 죄 이야기일랑 더는 하지 말라고 주문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만, 교회에서 죄 문제를 빼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로 모이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속을 썩입니까? 그러나 괴로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님께 불효했었던 사실로 인하여 괴롭습니다. 병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병상에서 떠오르는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괴롭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으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못할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의 원인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원인을 모르는 죄책에 시달립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불안'을 가리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도무지 왜 불안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것도 아니고 추운 것도 아닙니다.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웬지 불안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과연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숨겨진 죄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죄 때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책의 원인을 모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원인을 부정하는 죄책입니다. 몰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죄는 죄입니다. 죄는 인식 이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짓는 것도 죄요, 모르고 짓는 것도 죄입니다. 저는 가끔 병원으로 환자를 위문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괴로운 것은 본인이 지금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모르는 환자를 대하는 것입니다. 여기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암환자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는데 정작 죽어 가는 환자 자신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 아픔을 호소합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이것만 나으면 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환자를 볼 때에는 마음이 퍽 아프고 답답합니다. 병세가 어떠한지 본인이 알든 모르든 죽어 가는 것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환자가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다가오던 죽음이 멈추어서거나 주춤거리지 않습니다. 모를 때에 괴로움이 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차피 겪어야 할 괴로움입니다.
넘어서야 할 괴로움입니다.
고학하면서 자취하는 몇 친구가 있었습니다. 남자들끼리 자취를 하는 것이니 사는 꼴이 오죽했겠습니까? 집안정돈이고 뭐고 다 시원치 않았습니다. 공부하랴 살림하랴 고생들을 하면서 끼니때가 되면 그저 이것저것 간단히 끓여 먹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간장을 뜨려고 보니 독 안에 무엇인가 수상한 물체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쥐 한 마리가 빠져 죽어 있는 게 아닙니까? 이것을 보는 순간, 그 친구는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저 썩은 것을 떠먹고 살았나 싶어 욕지기가 올라왔습니다. 끝까지 몰랐더라면 꼼짝없이 그 끔찍한 간장을 다 떠먹었지 별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른다고 해서 더러운 간장이 깨끗한 간장으로 될 리는 없지만 마음만은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몰랐던 것을 알고 보니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알든 모르든 죄는 죄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과 그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잘못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쉽게 시인하려들지 않습니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 탓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심리적 현상으로 봅니다. 혹은 사회규범에 대한 거역이라고도 말하고, 건강치 못한 심리상태에서 오는 현상이라고도 말합니다.
「죄와 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날 좋지 않은 사상에 휘말립니다. '나폴레옹처럼 선택된 강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죄를 범할 권리가 있다.' 이른바 초인주의(超人主義) 사상을 신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돈밖에 모르는 전당포 노파는 사회의 암적 존재이며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에게는 그 암적 존재를 제거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에 이릅니다. 그는 결국 도끼로 노파를 살해하고 전당포에서 훔쳐낸 물건들을 감춥니다. 그것으로 큰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인을 초인적 인간이라고 믿었던 이 청년은 이내 살인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죄의식에서 떠나지 못하는, 초라하고 열에 들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초인주의 사상은 어디로 갔습니까? 살인을 정당화시켰던 그 당당하고 그럴듯한 명분이 어디로 갔습니까? 살인을 정당화시켰던 그 당당하고 그럴듯한 명분이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말입니다.
죄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알든 모르든 죄는 엄연히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죄책입니다. 두려움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 그렇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아주 깊은 고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토설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비밀을 지킬 때에'라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성서」에는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회개치 않는 자의 괴로움은 숨겨진 죄로 인한 자기만의 고통입니다. 이렇게 해서 짜증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생활은 점점 더 썩어갑니다. 그리고 자기상실, 자기파멸, 자기부정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끝없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옳지 않은 것은 내 양심이 말합니다. 내 진실이 나를 정죄합니다.
아무리 잘 꾸며진 말로도 죄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회개만이 문제를 푸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고 후회하며, 죄 때문에 고민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부터 의롭게 열심히 살기로 결심하고 무슨 고행을 하고 공로를 세워서 지난날의 불의를 보상하리라, 속죄하리라고 하지만 넌센스입니다. 인간 스스로 속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제 손으로 제 머리를 붙잡아 올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끌어 올려봐야 몸은 몸대로 더 깊은 곳으로 떠내려갈 뿐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돈은 다 떨어지고 허기진 배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보니 차츰 아버지가 그립고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하고 끝내 목매달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의 죄는 사함 받지 못합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체면 불고(不顧)하고 아버지 집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음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회개한 사람의 기쁨을 말씀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죄를 고백할 때에 복이 있습니다. 벌받을까 해서, 혹은 명예나 출세, 부한 삶을 노린 간사한 마음으로써가 아닌 오직 죄 사함 받기 위하여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자복하고 토설하고 ---- 숨김없이 아뢰고 고백합니다. 내가 잘못했나이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하고 고백할 때에 주님께서 저를 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 왕은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편 있는 여자 밧세바를 취한 죄입니다. 이 죄를 숨기기 위하여 그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이 큰 죄를 깊이깊이 숨겨놓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가 찾아와서 "당신이 그사람이라(삼하 12:7)" 할 때에 다윗은 그대로 무릎을 꿇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다윗의 참회록을 보면 그 많은 회개의 시 가운데에 밧세바를 책망하거나 원망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하필이면 왜 그 시간에 목욕을 하고 있어서 내 눈에 띄었느냐고, 순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한번쯤 밧세바를 탓할 만도 하건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 오직 하나, 간사함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복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거룩하신 은혜로 용서받게 될 때에 말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반가운 하나님이요, 전에는 진노의 하나님이시더니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전에는 그 음성이 저주스럽고 심판적이었으나 이제는 자비로운 음성으로 들립니다. 기쁘게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지불한 십자가의 댓가 ---- 나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내가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이 참아주셨습니다. 내가 형편없는 길로 갈 때에 당장 벼락을 치셔서 모든 것을 끝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아주셨습니다. 가까이 오도록 부르셨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예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가룟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고 뒤에 뉘우쳤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회개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가 충만하기 전에는 참으로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왕으로서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나이다" 하고 무릎을 꿇기란 얼마나 어려운 입장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셨기에 그가 자복하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그 엄청난 대가를, 그 엄청난 희생을 생각할 때에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웃을 반가이 대하게 됩니다. 죄 사함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반갑습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집니다.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 속죄 받은 사람의 심령으로 대할 때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화목해지고 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이제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환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오는 환난이 아닌 다음에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환난이라는 데에야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죄책 없는 고난, 저주 아닌 환난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죄책이 없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홍수도 환난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여기에 참 자유가 있고 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죄 문제 말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정치문제이고 경제문제입니까? 우리의 걱정은 부정입니다. 가난하냐 부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숨겨진 죄악입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깊이 숨겨진 죄악 ---- 그것이 걱정입니다. 숨겨진 죄, 숨겨진 악, 회개 못한 허물, 회개의 기회를 놓친 지난날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은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에 진실로 회개하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할 때에 주님께서 내 죄를 사하실 것이요, 나는 사함 받은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중풍병 환자를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그러나 어떤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고 쑥덕거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예수님 편에서는 둘다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이리라 하시고 환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죄 사함 받은 이 사람은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나갑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속죄 받은 사람의 생활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간 내가 누워 괴로워했던 그 낡아빠진 침상을 둘러메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
참회자의 복(시편 32편 1절~7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젊음, 자유, 독신(獨身)'을 행복의 조건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 조건은 모두 위험한 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발상이 선하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행복이 어찌 이 세 조건에 의존하겠습니까? 의와 진실과 믿음이 빠졌습니다. 의와 진실과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고민 밑바닥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음이요, 하나는 죄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가 문제입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죄책(罪責)이 희미해져간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창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죄가 존재해왔습니다. 문제는 죄로 인한 가책, 죄로 인한 고민이 점점 둔화되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죄의식이 희미해지고 마비되어갑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66권 어느 곳을 보아도 얼마나 오래 사느냐, 얼마나 건강하냐, 얼마나 잘사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불행한 것도 죄 때문이요,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길도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죄책이야말로 고민의 뿌리입니다. 몸 아픈 것이 문제입니까? 마음이 아파서 문제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아픈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책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몸도 아픈 것입니다. 죄책 없는 불행이 있다면 그것이 무슨 불행이 되겠습니까? 죄책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어찌 고통이라 하겠습니까? 죄책 없는 죽음이 있다면 그 죽음을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습니까? 문제는 죄입니다. 죄 때문에 불행하고, 죄 때문에 고통스럽고, 죄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죄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도 듣기도 싫어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목사한테 죄 이야기일랑 더는 하지 말라고 주문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만, 교회에서 죄 문제를 빼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로 모이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속을 썩입니까? 그러나 괴로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님께 불효했었던 사실로 인하여 괴롭습니다. 병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병상에서 떠오르는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괴롭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으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못할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의 원인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원인을 모르는 죄책에 시달립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불안'을 가리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도무지 왜 불안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것도 아니고 추운 것도 아닙니다.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웬지 불안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과연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숨겨진 죄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죄 때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책의 원인을 모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원인을 부정하는 죄책입니다. 몰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죄는 죄입니다. 죄는 인식 이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짓는 것도 죄요, 모르고 짓는 것도 죄입니다. 저는 가끔 병원으로 환자를 위문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괴로운 것은 본인이 지금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모르는 환자를 대하는 것입니다. 여기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암환자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는데 정작 죽어 가는 환자 자신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 아픔을 호소합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이것만 나으면 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환자를 볼 때에는 마음이 퍽 아프고 답답합니다. 병세가 어떠한지 본인이 알든 모르든 죽어 가는 것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환자가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다가오던 죽음이 멈추어서거나 주춤거리지 않습니다. 모를 때에 괴로움이 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차피 겪어야 할 괴로움입니다.
넘어서야 할 괴로움입니다.
고학하면서 자취하는 몇 친구가 있었습니다. 남자들끼리 자취를 하는 것이니 사는 꼴이 오죽했겠습니까? 집안정돈이고 뭐고 다 시원치 않았습니다. 공부하랴 살림하랴 고생들을 하면서 끼니때가 되면 그저 이것저것 간단히 끓여 먹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간장을 뜨려고 보니 독 안에 무엇인가 수상한 물체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쥐 한 마리가 빠져 죽어 있는 게 아닙니까? 이것을 보는 순간, 그 친구는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저 썩은 것을 떠먹고 살았나 싶어 욕지기가 올라왔습니다. 끝까지 몰랐더라면 꼼짝없이 그 끔찍한 간장을 다 떠먹었지 별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른다고 해서 더러운 간장이 깨끗한 간장으로 될 리는 없지만 마음만은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몰랐던 것을 알고 보니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알든 모르든 죄는 죄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과 그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잘못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쉽게 시인하려들지 않습니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 탓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심리적 현상으로 봅니다. 혹은 사회규범에 대한 거역이라고도 말하고, 건강치 못한 심리상태에서 오는 현상이라고도 말합니다.
「죄와 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날 좋지 않은 사상에 휘말립니다. '나폴레옹처럼 선택된 강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죄를 범할 권리가 있다.' 이른바 초인주의(超人主義) 사상을 신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돈밖에 모르는 전당포 노파는 사회의 암적 존재이며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에게는 그 암적 존재를 제거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에 이릅니다. 그는 결국 도끼로 노파를 살해하고 전당포에서 훔쳐낸 물건들을 감춥니다. 그것으로 큰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인을 초인적 인간이라고 믿었던 이 청년은 이내 살인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죄의식에서 떠나지 못하는, 초라하고 열에 들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초인주의 사상은 어디로 갔습니까? 살인을 정당화시켰던 그 당당하고 그럴듯한 명분이 어디로 갔습니까? 살인을 정당화시켰던 그 당당하고 그럴듯한 명분이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말입니다.
죄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알든 모르든 죄는 엄연히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죄책입니다. 두려움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 그렇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아주 깊은 고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토설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비밀을 지킬 때에'라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성서」에는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회개치 않는 자의 괴로움은 숨겨진 죄로 인한 자기만의 고통입니다. 이렇게 해서 짜증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생활은 점점 더 썩어갑니다. 그리고 자기상실, 자기파멸, 자기부정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끝없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옳지 않은 것은 내 양심이 말합니다. 내 진실이 나를 정죄합니다.
아무리 잘 꾸며진 말로도 죄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회개만이 문제를 푸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고 후회하며, 죄 때문에 고민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부터 의롭게 열심히 살기로 결심하고 무슨 고행을 하고 공로를 세워서 지난날의 불의를 보상하리라, 속죄하리라고 하지만 넌센스입니다. 인간 스스로 속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제 손으로 제 머리를 붙잡아 올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끌어 올려봐야 몸은 몸대로 더 깊은 곳으로 떠내려갈 뿐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돈은 다 떨어지고 허기진 배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보니 차츰 아버지가 그립고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하고 끝내 목매달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의 죄는 사함 받지 못합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체면 불고(不顧)하고 아버지 집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음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회개한 사람의 기쁨을 말씀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죄를 고백할 때에 복이 있습니다. 벌받을까 해서, 혹은 명예나 출세, 부한 삶을 노린 간사한 마음으로써가 아닌 오직 죄 사함 받기 위하여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자복하고 토설하고 ---- 숨김없이 아뢰고 고백합니다. 내가 잘못했나이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하고 고백할 때에 주님께서 저를 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 왕은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편 있는 여자 밧세바를 취한 죄입니다. 이 죄를 숨기기 위하여 그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이 큰 죄를 깊이깊이 숨겨놓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가 찾아와서 "당신이 그사람이라(삼하 12:7)" 할 때에 다윗은 그대로 무릎을 꿇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다윗의 참회록을 보면 그 많은 회개의 시 가운데에 밧세바를 책망하거나 원망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하필이면 왜 그 시간에 목욕을 하고 있어서 내 눈에 띄었느냐고, 순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한번쯤 밧세바를 탓할 만도 하건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 오직 하나, 간사함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복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거룩하신 은혜로 용서받게 될 때에 말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반가운 하나님이요, 전에는 진노의 하나님이시더니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전에는 그 음성이 저주스럽고 심판적이었으나 이제는 자비로운 음성으로 들립니다. 기쁘게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지불한 십자가의 댓가 ---- 나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내가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이 참아주셨습니다. 내가 형편없는 길로 갈 때에 당장 벼락을 치셔서 모든 것을 끝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아주셨습니다. 가까이 오도록 부르셨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예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가룟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고 뒤에 뉘우쳤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회개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가 충만하기 전에는 참으로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왕으로서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나이다" 하고 무릎을 꿇기란 얼마나 어려운 입장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셨기에 그가 자복하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그 엄청난 대가를, 그 엄청난 희생을 생각할 때에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웃을 반가이 대하게 됩니다. 죄 사함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반갑습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집니다.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 속죄 받은 사람의 심령으로 대할 때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화목해지고 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이제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환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오는 환난이 아닌 다음에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환난이라는 데에야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죄책 없는 고난, 저주 아닌 환난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죄책이 없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홍수도 환난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여기에 참 자유가 있고 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죄 문제 말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정치문제이고 경제문제입니까? 우리의 걱정은 부정입니다. 가난하냐 부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숨겨진 죄악입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깊이 숨겨진 죄악 ---- 그것이 걱정입니다. 숨겨진 죄, 숨겨진 악, 회개 못한 허물, 회개의 기회를 놓친 지난날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은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에 진실로 회개하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할 때에 주님께서 내 죄를 사하실 것이요, 나는 사함 받은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중풍병 환자를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그러나 어떤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고 쑥덕거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예수님 편에서는 둘다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이리라 하시고 환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죄 사함 받은 이 사람은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나갑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속죄 받은 사람의 생활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간 내가 누워 괴로워했던 그 낡아빠진 침상을 둘러메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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