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구원에 이르는 회개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by 【고동엽】 2024. 3. 28.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구원에 이르는 회개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어린이가 학기말 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착실한 우등생이므로 별 어려움 없이 답안지를 잘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문제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그 문제만을 붙들고 낑낑거리며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감독하시는 선생님은 멀리서 이 모습을 보시고 "저 놈이 고전하고 있구나"하고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는 풀릴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그 문제로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가 보기 딱해서 자기 답을 보고 쓰라고 살짝 시험지를 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도 있고 끝까지 자기가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리며 보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옆구리를 치며 빨리 보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 광경을 보시면서 "저놈이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구나"하며 그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십니다. 드디어 끝나는 시간이 되자 그는 견디다못해 친구의 답을 보고 얼른 써 버렸습니다. 선생님은 "결국 넘어갔구나"하고 생각하셨지만 모르는 척하고 시험지를 다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등생은 맨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시험지를 내지 않고 미적거리더니 무거운 발걸음으로 선생님께 와서 답안지를 내놓으며 "선생님, 빵점 주세요"라고 힘없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너무 감격하시어 "네가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내가 보았단다. 너는 이제 고백함으로써 승리했다. 정말 훌륭한 학생이구나"하시며 그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일생을 통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까, 아니면 출세하는 일이었습니까? 가장 어려운 일은 진실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로서는 정말이지 회개하기가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모름지기 세상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없어서 인격도 나라도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가장 어려운 일이요 귀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시면서 제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 말씀이 아닙니까? 인생은 일생을 회개와 더불어 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우리의 일생의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인생은 그의 회개의 양과 질에 의해서 평가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자 프란체스코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으로 천국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 크고 작은 보좌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서 유달리 크고 화려한 한 보좌가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그는 궁금하여 천사에게 이 보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대답하기를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란체스코가 앉을 보좌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자기 스승이지만 너무 높아지는 것에 시샘이 나서, 어느 날 조용히 프란체스코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일세. 가장 큰 죄인이야"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자는 "선생님,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성자로 일컬어지는 선생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그것은 정말 잘못된 거짓말입니다"하고 반박을 했습니다. 이 때 성 프란체스코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걸세.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만일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일세."---이런 간증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의 괴수이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이고, 교회를 핍박한 자이기에 어떤 핍박을 받아도 할말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너희가 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좀 쉽게 풀이하면, 그는 늘 좋고 기쁜 마음으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 같아 때로는 부득이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은 못나고 나쁜 사람이어서 늘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운 것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자기는 오히려 버림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회개한 죄인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저것 논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니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가정 문제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수했습니다.

회개는 은혜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왜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단의 방해 때문입니다. 사단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술수를 쓰며, 우리는 그 술수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첫째, 우리를 교만하게 하여 회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지혜입니다. 둘째, 변명하게 하여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만듭니다. "너만 죄인이냐"고 얼마든지 변명 거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뿌리깊은 것으로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 하와를 만났을 때 너무 좋아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기가 막힌 사랑의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범죄한 다음에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아담에게 물으시자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라고 변명을 해 버립니다. 그러고 보면 변명이 얼마나 뿌리깊은 죄입니까? 죄를 정당화하고 남에게 전가하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셋째, 사단은 회개의 결과를 위협합니다. 만일 네가 회개하면 이런 망신을 하게 되고, 저런 문제가 생기며, 또 다른 사람에게까지 파급이 되니 회개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결과와 파급되는 다음 문제를 가지고 협박하니 회개할 자유를 잃게 되고, 또한 두려워서 회개할 용기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를 내일로 미루라고 유혹합니다. 아직 젊었고 아직도 날이 많은데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기회를 가로막아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결코 후회나 뉘우치는 마음만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깨닫는 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죄를 중단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하던 일을 이제 멈추었다고 회개가 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회개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되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작업이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원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원적으로 되어지는 것만이 회개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심판이 무섭고 평판이 무섭고 저주가 무서워서 벌벌 떨며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오직 자원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와야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행동 없이 감상만으로는 회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회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회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먼저 겸손함을 주시어 죄의 성격을 깨닫는 지혜를 주셔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무서운 죄를 지으면서 죄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죄됨을 깨닫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또 회개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회개해야 될 줄 알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말 한마디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못해 회개하지 못하고 점점 문제가 커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용기가 필요한데, 이 용기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회가 은혜입니다. 회개해야 하는데 오늘내일 미루다가 갑자기 차 사고로 죽으면 어찌되는 것입니까? 저는 종종 임종이 가까운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앞으로 몇 시간 남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권면을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갈 것인데, 당신의 이런 형편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함께 대화를 나누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니, 마음 가운데 꺼리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혹 갚을 것이 있으면 갚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여 이 기회를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셨음에 감사하면서 보냅시다."---이렇게 권면을 해 봅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음은 정말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방법이 문제입니다. 회개를 하되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고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해야 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바른 길을 찾는 것, 그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고 하나님께로 나와 무릎을 꿇고 회개해서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유명한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에는 순수하다는 뜻이 있습니다만 실인즉 그는 순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그 모든 재산을 수탈하고 억압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박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로마 정부에 붙어서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세금을 강제로 거두어 가는 세리였습니다.

아니 세리 중에 세리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돈도 있었고 권세도 있었습니다만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반민족주의자요 반종교주의자였고, 죄인의 대명사로 통하였기에 아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뉘우침이 있었습니다만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기 나름으로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그에게 참으로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 뵙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그 동기가 다양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많은 사람들에 비해서 가장 순수한 동기를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병 고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권세나 돈 때문에 나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어떤 명예를 얻으려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메시아이신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뵈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옹위해서 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어, 뽕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얼굴을 뵈고 싶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용돈이 모자라서 돈을 구하려고 집에 온 것이 아닙니다. 머슴이 되어도 좋으니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삭개오도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뵙기 위해 나무 위라도 개의치 않고 올라갑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체면과 위신을 생각했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체면과 위신을 버리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곧 자기의 핸디캡을 극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 기회이기에 그는 급히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가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아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이 시간에 삭개오에게 회개하라, 청산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지 "내려오너라. 내가 너희 집에 유하겠다"라는 말씀에서 삭개오는 너무 기쁘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는 이 순간에 마음 문이 활짝 열리게 되어 선뜻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지금 율법에 따라서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1 이하에 보면 양을 훔쳤을 때에는 4배로 갚고, 소를 훔쳤을 때에는 5배로 갚으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소는 일하는 동물이니까 더 갚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삭개오는 자기가 남의 물건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율법에 따라서 4배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얼마나 은혜스런 말씀입니까? 욕심과 증오와 부끄러움 등의 고통이 한꺼번에 다 사라지는 그런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고 회개가 열매맺는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아들을 영접하면서 잔치를 베풀던 그런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과거를 청산하며 회개한다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요즘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산으로 은둔하였습니다. 은둔하던 그 날, 사단장과 참모장이 인사를 드릴 때에 그의 첫마디가 성경책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청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옛날에 교회 다닌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분에게 성경을 많이 보시고 기도도 열심히 하시어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잘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에 그는 "목사님마다 여기에 오면 성경책을 갖다주셔서 성경이 우리 집에 많습니다"라고 좀 귀찮아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은둔하면서 성경책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한번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을 대해 보셨습니까? 정말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보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자주 보고 기도도 하고 있습니다만 언제 한번 참회와 함께 진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바른 자세로 성경을 보았느냐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집사님으로 감옥에서 오래 고생하시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생활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 갔을 때 그분을 만나게 되어 지나간 일에 대해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그는 감옥 생활을 잘 활용하고 나왔기에 정말 좋은 기간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집사였지만 평소에 성경 한번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가 감옥에 들어가서 비로소 읽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에게 교회 가자고 말한 적은 있어도 예수 믿자는 말은 못했는데, 감옥에서 처음으로 이 말을 해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에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에 소문나게 방탕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거리를 지나가는데 거듭나기 전에 만났던 술집 아가씨가 반갑게 다가오면서 "선생님, 오랫만입니다. 왜 요즘은 들르시지 않습니까? 놀러 좀 오세요"하고 아양을 떨며 반색을 했답니다. 어거스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당신, 사람 잘못 보았소. 옛날의 그 어거스틴은 죽은 지 오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벌써 못박았다니까요"하고 스스로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하는 크신 축복이 우리에게 있어지길 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