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뉘 죄 때문입니까(요한복음 9장 1~7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한이 보았던 이적이 일곱 가지밖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많은 이적들 가운데서 특별히 계시적 의미가 강한 몇 가지를 선별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들은 다른 이적들에 비하여 한층 더 계시적이고 상징적이며 표적적인 의미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단순한 하나의 사건으로,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과정에서 결과까지 하나하나가 모두 계시적이며 표적적인 의미가 깊은 것이므로 특별히 잘 이해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든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다른 사람의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누구도 이사람보다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사람의 문제는 당연히 해결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 사람의 문제에 의미가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불행, 이에 대한 예수님의 신학적인 해석-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나는 불행하다'라는 마음이 들거든 이 사람의 처지와 나의 처지를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아마 이사람보다 불행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무가치하다' '생활이 의미가 없다' '소망이 없다'-정말 그렇습니까? 나면서부터 소경된 이 사람만큼 절망적이며 소망 없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의 고통은 대체로 두 가지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의미의 문제입니다. 깊이의 문제입니다. 그 고난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독한 고난을 당해도 의미만 있다면, 즉 명분이 좋고 목적이 좋고 다른 사람이 인정만 해준다면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아도 무의미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당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여 다른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요, 그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미 없는 고난, 명분 없는 고난-절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의미의 문제입니다. 고난을 놓고 무겁다 가볍다 하며 저울로 달 수는 없습니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의미가 있으면 참을만하지만 의미가 없다면 그 고난이 고통스럽고 억울하기만 합니다.
남보기에는 하찮은 일이더라도 본인에게는 절망스럽습니다.
둘째로 소망의 문제입니다. 오늘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내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면 고난도 당할만합니다. 그러기에 젊은 시절의 고난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돈주고도 산다 하지 않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 많이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나이 들어 닥친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의 미래적 의미, 소망적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고생 좀 해가며 삽시다. 때로 예수님께서는 임산부의 고난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여인들은 임신한 열 달 동안 고생을 합니다. 또 해산하느라 고생하고 키우느라 고생합니다. 고생이 좀 많기는 합니다만 소망적인 고생입니다.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을 안됐다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와 소망-이로써 고난이 설명되고 위로되고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문제를 좀더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이 사람, 고생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의 고생으로 누구에게 좋은 일이 생깁니까? 의미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 소경입니다. '소경으로 이 고생이니 장차 어떻게 될 것이다'-보장도 전혀 없는 고생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의 고난이요, 명분 있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고난, 의나 명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장님된 것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시련도 아닙니다. 미래가 약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랍비여, 이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 여기에 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의 대답을 미리 가지고 있습니다.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 철저한 대답입니다. '모든 고난은 죄 때문이다'-이것은 기계론적 인과율입니다. 고난이 있다면 그 원인은 죄 때문이다, 그러면 누구의 죄인가-이렇게 추적해나가는 것입니다. 불행도 질병도 죄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교리가 이러합니다. 구약성경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내리셨습니다. 단지 거기에 다른 초월적 의미가 있을 뿐이지 고난도 병도 재앙으로 내리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개개인의 문제를 놓고 논할 때에는 달리 설명할 길도 있겠습니다마는 민족 혹은 세계, 즉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충분히 건강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이의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구조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삶 그 자체가 질병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만 인간에게는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있습니다. 소화 능력을 한 예로 들어봅시다. 소의 내장을 날것으로 먹고도 거뜬히 소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소화 능력이 그토록 대단합니다. 좀은 끔찍한 이야기입니다마는 독사가 내뱉는 독을 먹어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상처나 혈관 속으로 들어가 온몸에 퍼지면 생명까지 잃게 되지만 먹어서 소화시키면 더할나위없는 보약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독도 보약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의학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신학적인 문제로 넘어가봅시다. 그러면 충분히 건강하도록 창조된 사람이 왜 약해집니까? 왜 병듭니까? 다른 사람은 다 이겨내어 건강한데 약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상구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T-임파구가 약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백혈구가 약하고 임파구가 약해서 병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디 사람은 건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특별히 전문가가 쓴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면 힘이 좀 생기는 모양입니다. 목소리도 커져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쓸데없는 용기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술에 취하면 강해지는 것이 둘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만용입니다. 배짱만 자꾸 커집니다. 그 둘이 성욕입니다. 이 둘만 강해지고 나머지는 모두 약해집니다. 술을 마시면 어떠한 병에건 걸리고 맙니다. 일례로 술을 마시지 않는 건강한 사람은 병균을 가진 여자와 성 관계를 해도 절대 전염이 안됩니다. 그 병균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관계하면 단 한 번에도 전염이 됩니다. 참 놀라운 통계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론입니다. 술도깨비한테 홀린 사람, 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소리만 꽥꽥 질러댔지 도덕적 의지도 약하고, 정의감도 약하고, 신앙도 양심도 약해집니다. 병을 이기는 힘도 약해집니다. 이제 여러분의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신앙적으로 바로 서고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에 모든 병균을 넉넉히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약해지면 결국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요즘 신학대학에서 '구원과 치유'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강의를 하느라고 이 책 저 책을 들추어보니 위의 사실은 분명 과학적인 것입디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일단 '죄 때문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으십시다. 그래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인삼 녹용이다 뭐다 하여 보약 좋아하다가는 자칫 보약중독증에 걸리고 맙니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십시다. 저 만큼은 건강할 것입니다. 늦잠자지 마십시다. 그러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핑계가 많습니다마는 오래 살고 싶거든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충분히 건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 높은 차원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물었던 것은 당시의 미신적인 이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출생 전부터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출생 전의 영혼도 범죄할 수 있다-'본인의 죄입니까?'라고 물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출생 전에 이미 죄를 짓고 태어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다분히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신학적 이해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윤회설적인 해석입니다. 즉 부모의 죄가 이미 출생 전에 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로 내가 이렇게 태어났다-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의 성병 때문에 자식이 장님으로 태어나는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런 일이 숱하게 많았습니다. 2천 년 전에도 질문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이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나 신학적인 문제와도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신학적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벌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하는 고난은 의인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워낙 악해서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진다는 망상에 빠집니다. 본문에서 제자 중 한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된 근원에 관해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좀 섭섭한 질문입니다. '이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칭찬을 하셨겠습니까? 묻는다는 것이 고작 '뉘 죄 때문입니까?'입니다. 또 이 소리를 들은 소경은 얼마나 기분이 언짢았겠습니까? 제가 그 소경이었다면 고함이라도 질렀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죄가 없어서 눈뜨고 다니는 줄 알우?' 그러나 이 사람은 워낙 그런 소리에 익숙했던 터라 참는 데에 이력이 난 모양입니다. 아무 말 없이 비난까지 감수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많은 시비를 벌일 수 있는 여건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를 일단 중지시키십니다.
다 덮어놓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십니다. 죄 때문이건 아니건, 본인의 죄건 부모의 죄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해서 생긴 불행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일만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철학적 난제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셨습니다. 마귀의 장난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인간이 만든 불행이 아니요 뒤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심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원론적 차원에서 보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무척이나 불행한 일입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마는 하나님의 사역은 이 불행 때문에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대로 살다가 죽어간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엄청난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속되고 있습니다.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또한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본인의 죄냐 부모의 죄냐, 사회의 죄냐 세상의 죄냐-모두 과거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과거가 원인이 되어서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인과율적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관점을 바꾸어놓으십니다. 원인이 있다면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완전히 뒤바꾸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내일이건 십 년 후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큰 역사를 위하여 오늘의 이 사건이 있다는 큰 경륜적 의미로 보셨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미래적 원인이 있는가 하면 과거적 원인도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과거에 지은 죄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느라고 고생을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하여, 앞에 있을 희망찬 내일을 위해서입니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사건도 있습니다.
구속함을 받은 사람이냐 받지 못한 사람이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같은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해도 그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똑같이 과거에 지은 죄로 감옥에 들어갔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반성을 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회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이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감옥생활은 과거적인 의미가 아니라 미래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또는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여기에 신앙적 세계관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어떠한 불행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한 여자가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안 믿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상관없이 좋기만 하였지만 점차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제사도 드려야 했고 술상도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10년 살다보니 이제 결혼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후회막급입니다. '그 때 예수 믿는 그 보이프랜드와 결혼할 것을' '내가 지금의 남편을 택한 것은 역사적인 실수다' '다 내 죄다' '나는 죄인인 고로 죽을 때까지 이 고생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특별한 은혜로 생각이 달라집니다. '내가 안 믿는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것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남편과 이 집 식구들을 구원하고 말 것이다'-곧 선교적 의미로 생각을 바꿉니다. 마치 나만 장군의 집에 식모로 들어갔던 아가씨처럼 말입니다. 마치 바벨론 왕의 궁전에 들어갔던 다니엘과 같이 말입니다. 혹은 애굽에 갔던 요셉과 같이 말입니다. 마음을 달리 먹기만 하면 오늘의 이 고난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이 됩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결국에는 한 사람으로 해서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온 것은 실수가 아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잠깐동안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 실수까지도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덮어집니다.
오늘,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할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 미래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확실한 미래가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새로운 창조적 기회로 생각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고난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무서운 일입니다마는 밝은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공산당이 왜 세계를 사십 년, 구십 년씩이나 지배해야 했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그러나 훗날에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큰 역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어느 사건의 실수로만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새로운 기회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래서 혹 절망감을 느끼게 될 때에 이를 신앙 안에서 소화하며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받아드릴 줄 아는 새로운 안목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타낸다'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파네로데'입니다. '파네로'의 뜻은 '빛'입니다. 빛이 비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엄연한 역사는 감추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신학에서 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자주 언급합니다.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깊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이 있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수님과 만나는, 복음과 만나는 계기에 이것이 빛과 같이 나타납니다. 밖으로 노출이 됩니다. 감추어진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신비롭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어떠한 계기를 통해 믿는 사람에게 노출되면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계기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인간의 자존심, 인간의 명예, 인간의 행복이 무너지는 때가 바로 그 계기가 됩니다. 인간의 가치관이 완전히 부정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일이 합동해서 작용해야 합니다. 첫째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의 만나는 사건이 있을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말씀은 평범한 가운데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서 계실 때에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고도 잡은 것이 없어 배에서 나와 이제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지금까지 그물을 내리고 있었어도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새벽이 아닌 다 밝은 아침에 말입니다. 깊은 데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저들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황당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할말이 많습니다. 별다른 일을 새롭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온 그 일을 반복해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른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지혜로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말씀에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기발한 일 찾다가는 죽쑤기 쉽습니다. 특별한 거 좋지 않습니다. 그저 설거지하던 사람은 설거지할 것이고 청소하던 사람은 청소할 것입니다. 가르치던 사람은 그대로 가르치고 장사하던 사람은 계속 장사할 것입니다. 하던 일을 그대로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전에는 단순히 돈벌이로 하던 일이었고 내 마음대로 하던 일이었지만 이제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합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의사가 오늘 예수 믿게 되었으니 직업을 바꾸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장사하던 사람이 오늘 예수 믿으니 다른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던 일을 그대로 하십시오. 단 말씀에 따라서 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하십시오. 똑같은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힙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발랐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속은 같은 동양권이어서 그런지 우리라 비슷한 면이 꽤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농촌에서 풀을 베거나 김을 매다가 벌레에 물리기라도 하면 열 번이면 열 번 다 그렇게 합니다. 땅에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 가지고 물린 곳을 문지릅니다. 의학적으로 따져보아도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무슨 약 성분인가가 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해독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잘 낫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눈에 진흙을 이겨 바릅니다. 벌레에 물렸을 때나 그렇게 할 일이지 눈에라니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좀 이상한 방법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의 눈을 마구 쑤시면서 하나님을 찾는다거나 사람들이 놀랄만한 기이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발라줍니다. 도대체 어찌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특별하고 이상스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 모양이나 옷 모양이 유난스럽습니다. 별스럽게 보여지기를 바랍니다마는 결코 좋은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은 벌레 물렸을 때에나 쓰는 아주 평범한 방법을 쓰십니다. 침을 뱉어 흙을 이겨서 눈에 발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소경이 가만히 있은 것만도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미 급한 저 같았으면 소리라도 질렀을 것입니다. "여보시오, 장님이라고 무시하는 거요? 장님 눈은 눈도 아닌 줄 아오? 먼지 들어가면 아프단 말이오." 그러나 이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하십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평범하기도 하고 불합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후속치료입니다. 지금 당장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치료되는 것입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하셨지만 만일에라도 '일진이 사납군'하고 안 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이 사람은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로암까지 가서 저의 손으로 물을 떠올려 눈을 씻는 그 과정까지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야 있건 없건, 확신이야 있건 없건, 신학적 지식이야 어떠하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절대적인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야 물을 것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라고만 했을 뿐이지 "그리하면 눈을 뜨리라"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눈을 뜨게 되리라, 아멘."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라고만 하십니다.
이제 다시 소급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소경으로 난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내 눈 좀 고쳐주세요'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 일도 없습니다. 제자들과 지나가시다 보고 대화를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붙드시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씻으라 하셨을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습니다. 순종할 사람 몇 없을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쉽게 순종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밑져야 본전이지 뭐. 믿고 따라 해보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하기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실로암까지 가서 저의 손으로 물을 떠올려 씻는 동안 눈을 뜨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의심하거나 불순종할 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이 있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을 때에 묵묵히 순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는 큰 역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사도행전 26:24-29) (0) | 2024.03.18 |
---|---|
능력 앞에 선 죄인(누가복음 5장 1~11절) (0) | 2024.03.18 |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1~9) (0) | 2024.03.18 |
네 믿음이 크도다(마태복음 15장 21~28절) (0) | 2024.03.18 |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태복음 21장 18~22절) (0) | 2024.03.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