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원죄의 고향(창세기 4장 1절~13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고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정이 매우 두터운 세 친구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우연히 아주 크고 묵직한 금덩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 친구는 혹 이 일로 인해서 우정에 금이 갈까봐, 이것 가지고 서로 다투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이 금덩이를 팔아서 공정하게 삼분하여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들의 결정을 자축하는 의미로 인근 주막에서 술을 사다가 하루 저녁 먹고 즐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주막에 술을 사러 갔습니다. 술을 사 가지고 오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금덩이를 셋으로 나누어 갖다니, 이럴 수는 없다. 두 친구만 없으면 저것은 다 내 것인데……' 불현듯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 두 친구를 죽이기로 작정하고는 술에다가 독약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두 친구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한편, 친구가 술을 사러 다녀오는 동안에 나머지 두 친구는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친구가 없으면, 이 금덩이를 우리 둘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저 친구 때문에 우리 몫이 작아진다." 두 친구는 공모하여 술을 가지고 돌아오는 친구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받아온 술을 마시면서 자축했습니다. 이리하여 결국은 세 친구가 다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무엇엔가 붙들립니다. 우리가 쓰는 말대로 '무엇엔가 씌어서' 자기 자유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행동의 자유, 사고의 자유, 판단의 자유, 지혜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다 빼앗겨버리고, 마치 귀신들리는 것처럼 무엇엔가 그만 강하게 붙들리고 마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흔히들 누가 정신병자가 되든지, 귀신이 들리든지, 헛소리를 하든지 하면 이는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인격이 무엇엔가 노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고, 끝도 없는 욕심의 노예가 될 때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전후좌우 생각나는 것도 없어요. 오로지 그것 한 가지만을 생각하는 결과로 이런 엄청난 일들이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세상에도 있는 것입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마약이 그렇게 나쁜 줄 알면서 왜 그 마약을 계속하느냐,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도박이 나쁜 줄 알면서 왜 그 도박을 계속하느냐, 술을 먹는 사람들은 술이 나쁜 줄 알면서 왜 그 술을 꼭 먹어야 하느냐?--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을 취했을 때에 가졌던 쾌감을 잊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극은 너무나 강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외에 되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아무 기쁨이 없다고 해요. 언젠가 저는 일부러 마약에 대한 책을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그 내용 중에 제가 충격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있습니다. 마약을 하고 나서 여자관계를 가지게 되면 일생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 때의 격렬했던 기쁨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고 해요. 그래서 마약을 했던 사람은 꼭 마약을 가지고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비정상(非正常)을 따라가던 사람은 정상으로 돌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비정상이 정상을 구축할 때, 그 사람은 정상을 통한 행복을 전혀 즐길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것만이 그 사람에게는 그만 정상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들이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이래서 그는 노예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세상에는 즐길 일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캄캄한 방에 앉아서 화투장을 쥐고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세상의 좋은 일들과 도대체 비교가 되는 일이겠습니까 마는, 여기에 미친 사람은 정신없는 것입니다. 새소리도 안 들리고, 그 좋은 자연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스운 것은, 어떤 때에 유원지 같은 곳을 가보면, 거기에 앉아서도 고스톱판을 벌이고 있어요. 넓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만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미련하다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자기 자유를 다 빼앗기고, 어디엔가 던져주고, 거기에 질질 끌려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의 원인이 되는 죄는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사람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아담 가문의 첫 번째 큰 사건이 형이 동생을 쳐죽인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 역사의 첫 사건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죄가 줄줄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왜 이 사건이 있었습니까? 왜 가인은 아벨을 죽여야 했습니까? 왜 가인은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까? 첫째는 사랑 받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사랑 결핍증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싸움은 사랑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 말이 되는 얘기입니다. 사랑 받고 싶어서--부모의 사랑 받고 싶고, 여자의 사랑 받고 싶고, 남편의 사랑 받고 싶고, 친구의 사랑 독차지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마음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병들면 엄청난 결과가 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랑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당할 때에 그는 불편했습니다. 제사가 거부될 때에 그는 괴로웠습니다. 사랑을 위한 욕망이 무참히 깨어질 때에 그는 괴로웠고, 또한 동생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오직 사랑, 오직 사랑만이 자기 정체를 결정해주고, 존재 의미를 결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유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뜻 대단한 것 같지마는 사실 소유욕 뒤에는 바로 사랑 받고자 하는 자기 정체에 대한 인정 의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왜 '돈'을 그렇듯 중요하게 여깁니까? 돈을 가졌을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좀 높이 봐주는 것 같아서, 아무 것도 없으면 자기를 짓밟아버리는 것 같아서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높아지려고, 돈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마음속 깊이에서 사랑 받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소유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 받고 싶은 마음,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하지 못할 때에 소외된 것 같고, 동시에 재산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사실은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도 사랑은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전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인은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분노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 섭섭함으로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분노'라는 말이 각 나라마다 언어학상으로 달리 풀이되고 있는데, 그것이 아주 재미있는 비교가 되기에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서부 아프리카 민족인 멘데족에서 말하는 '분노'의 뜻은 '패인 마음'입니다. 또 마씨족은 '썩은 마음', 미스키노족은 '쪼개진 마음', 토트즐족은 '달구어진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분노'란 무엇입니까? 불같은 마음입니다. 정신 못 차리는 불같은 마음--이것이 분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350회 나타납니다마는, 분노라는 말은 무려 450회 나타납니다. 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이것이 분노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분노하는 마음이 화산처럼 폭발해 오를 때에 다스리지 못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7절에서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control해야 합니다. over control 되면 큰일입니다. 마음을 꼭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16장 32절을 보세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유명한 요절이 아닙니까?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노하기를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우선 노를 조금만 늦추어도, 당장에 '욱'하고 올라오는 노를 단 1분만 늦추어도, 하루만 늦추어도 일은 간단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몇 초를 못 이겨서 '욱'하고 터지는 것입니다. 분노--그렇지 않습니까?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면, 어쩌다 내가 탄 차 앞에서 얄밉게 운전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냅다 들이 받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놓고는 네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1초의 몇 분의 1입니다. 사실, 운전을 하는데 정말 얄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 그 차를 받아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 아주 실감나는 말씀입니다. 또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 말씀합니다. 분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독일의 대통령이었던 폴 헨델베르크라는 분은 얼굴이 너무나 자비롭고 인자해서 뭇 사람으로부터 높이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분노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항상 인자하고 평화로워서 그것으로 더욱 유명했습니다. 심지어 가까이에서 생활하는 그의 비서까지도 그가 얼굴에 분노하는 것을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늘 마음이 평화롭고 분노하지 않는 분으로 소문이 났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라고 어찌 화나는 일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럴 때면 휘파람을 불어서 분노를 날려버리고 마네." 그렇습니다. 그만한 여유만 있다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도대체 여러분은 어떤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분을, 솟아오르는 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6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연약할 때에,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육체와 함께 모든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박아버렸다'--그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 앞에서 자기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분을 다스려야 됩니다. 이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아무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또한 가인에게 있어서 더욱 문제되었던 것은, 분노한 다음에, 심히 화가 난 다음에 어떻게 처신했느냐 입니다. 그는 분풀이를 동생한테 합니다. 흔히 말하는 '분풀이'--이게 문제입니다. 분을 어떻게 풀 작정입니까? 분이 안으로 들어가서 소화를 못하면 병들어 죽어요. 그렇다고 고함치고 소리지르면 미친 사람이 됩니다. 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가인이 바로 여기서 실수를 합니다. 분풀이를 동생한테 해버립니다. 사랑 받지 못한 원인이 자기에게 있건만 이것을 동생에게 돌려버립니다. 원인 귀속이 잘못된 것입니다.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화난 것은 내 인격의 부족함 때문이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니요 내가 잘못된 것 때문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재정비해야지요. 믿음을 다시 돌이켜야지요. 믿음을 다시 세워야지요. 그런데 어디에다 대고 분풀이를 합니까? 가인은 이것을 동생한테 귀속시키고 마침내 동생을 제 손으로 쳐죽이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엎드려 기도해야 할 사람이 남을 원망하고 있어요. 회개해야 할 사람이 세상을 탓하고 있어요. 결국에 분은 점점 더합니다. 내가 남을 원망하니 그도 남을 원망하고, 원망이 원망을 낳고, 원수가 원수를 낳고…… 분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데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살펴야 했던 것입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래, 나 못사는 것이 남 잘사는 것 때문입니까?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인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었습니다.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을 때, 그대로 엎드려서 회개하고 정성을 다하여 다시 제사를 드리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분풀이를 아벨한테 하고 있는 것입니까?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도 종종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시어미 미워서 개 옆구리 찬다'--애매하게 개만 '깽'하고 도망가게 돼요. 시어머니한테 꾸중들은 며느리가 화난다고 개한테 화풀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이들도 다 알아서, 아버지에게 꾸중들은 어머니가 자기들을 야단치면 어머니는 괜히 그러신다고 투덜댑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교훈이 되겠습니까?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6, 7절)"--이 시간에 선을 생각하라, 어찌하여 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느냐 하심입니다.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취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다음에 올 저주와 심판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맙니다. 분노함은 무지함입니다. 분노하게 되면 지혜가 없습니다. 분노하게 되면 앞뒤를 가리지 못합니다. 분노하게 되면 그 기나긴 미래를 몽땅 버리고 맙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고로 선행을 하라, 마음을 선하게 가지라, 그래야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지혜가 있어야 나를 보고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죄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잠재해 있는 죄의 원인이 되는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이 병과, 이 불안과, 이 고통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마음을 활짝 열고,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증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만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실까 하는, 바로 그런 마음의 깊은 체험이 있을 때에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오늘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좇아,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만 나를 다스릴 수 있고, 또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로 주신 자녀(창세기 33장 1절~11절) (0) | 2024.03.19 |
---|---|
위기 앞에 선 신앙인(마가복음 14장 32절~42절) (0) | 2024.03.19 |
여호와의 구원의 손(이사야 59장 1절~8절) (0) | 2024.03.19 |
어찌 죽고자 하느냐(에스겔 33장 10절~16절) (0) | 2024.03.19 |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