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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앞에 선 죄인(누가복음 5장 1~11절)
우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네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능력 앞에선 죄인'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베드로에 대하여 생각할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함에 앞서 적어도 우리는 네 가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본문에 나타난 이적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그 복음 사역의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시작으로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3년 동안에 이루어졌는데, 이 사건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초기이기 때문에 저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는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특별히 본 일도 없거니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는 그런 경험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를 이해하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전도사업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꼭 염두에 두고 이해하여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 중에 "말씀을 마치시고(4절)"라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전하시고 이 말씀 끝에 그 말씀을 확증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말씀의 연속입니다. 반드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것만이 말씀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만지는 말씀이 있고 우리가 사건으로 부딪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말씀의 연속, 하나의 설교이기 때문에 전편은 말씀으로 전하시는 말씀이요 후편은 이적으로 보이시는 말씀입니다. 전편은 귀로 듣는 말씀이요 후편은 눈으로 보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호숫가에 모였습니다. 배가 둘이 있는데 그 하나가 베드로의 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십니다. 뭍에는 사람들이 주욱 앉아 있고 배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배에 앉으셔서 호숫가 언덕에 둘러선 사람들을 앞에 하고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이 30분인지 1시간인지 2시간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5분, 10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당 시간 말씀을 했으리라고 봅니다. 짐작해보건대 두세 시간 동안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편은 말씀으로 하시는 말씀이었고 후편은 사건으로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후편을 일시에 듣고 보았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확증하고 믿게 됩니다. 확실하게 믿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이적의 배경입니다.
세 번째로, 11절의 말씀을 봅시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말씀이 결론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 그리고 예수를 좇는다-어려운 입입니다. 오늘도 보면 예수를 좇는다면서 아직도 나를 위하는 생각이 많습니다. 나의 명예, 나의 물질, 나의 썩어질 육체를 위하는 생각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삼일 저녁 시간에도 나올까말까 망설이다가 늦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처럼 좋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뭔가 꺼림칙해서 늦어진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 늦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마는, 이상하게도 늦는 사람이 항상 늦습니다. 5분 늦는 사람은 언제나 5분 늦습니다. 첫번 찬송가를 부를 때에 오는 사람은 늘 첫번 찬송 할 때에 오고, 두 번째 찬송가를 부를 때에 오는 사람은 늘 두 번째 찬송 할 때에 옵니다. 그 정도의 열심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득이 그렇게 밖에는 달리 평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좇았습니다. 대를 물려가면서 해오던 사업을 완전히 버려 두고 '예수님만 따라가겠습니다. 굶든 먹든, 죽든 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풀타임 미니스트리(full-time ministry)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뜻하지 만은 않습니다. 신학대학에 들어가 놓고 딴 일 하려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 이것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입학하였던 것이 아닙니까? 졸업하고 나서도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슬슬 딴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못합니다. '내가 장사를 하면 돈을 잘 벌 텐데'-벌지도 못하면서 마음 한쪽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다른 일을 하였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생을 시원스럽게 헌신하지 못하고 양다리 떡 걸쳐놓고 왔다갔다 합니다. 그러다가 한 60이 넘어서야 제정신을 차리는데,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와 같이 버리기 힘든 인간의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 : 24)"라고 하셨습니다. 다 부인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데,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적입니다. 이적이 이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적의 효과이자 이적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적인 부름, 온전한 소명이요, 소명의 말씀, 소명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이 소명에 응답하는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에 어떠한 자세로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각오를 가지고 나아가야 되겠습니까? 어떤 결단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소명에 응답하고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적어도 이만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소명이 소명답게 결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생각하면서 본문에 나타난 이적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물고기를 잡는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어부들이 물고기를 밤새껏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그물을 다 씻어 정리해놓았습니다. 일은 다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이 가진 직업에 관련하여 이적을 나타내십니다. 저들이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도록 하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의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직업과 이적 사건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역사를 우리가 이해하여야 됩니다.
소명을 기적 속에서 들었고 기적으로 응답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자연적인 역사, 초이성적인 역사, 초율법적인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부르심도 이적 속에서 이루어졌고 응답하는 것도 이적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졌습니다. 한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적에 대한 응답은 또 하나의 이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는 것 자체도 이적이었습니다. 큰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 이적이 있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순종키 어려운 여건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치에 맞거나 내 마음에 한 절반만 들어도 순종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의견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을 순종하라고 하면 정말 힘듭니다. 이런 것은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치에 맞지 않음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간적으로 고기 잡을 때가 아닙니다. 이 지역의 관례로는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물고기들이 호숫가로 밀려오는 밤에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밤새껏 한 마리도 못 잡았기에 이제는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벌써 그물을 다 씻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두 시간 말씀을 하신 뒤이므로 평상시 물고기를 잡는 시간에서 서너 시간이 벌써 지나간 것입니다. 다 지나갔고 이미 끝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와서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다. 여간해서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해보나마나한 일이지 않습니까? 시간적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예수님께서 요구하고 계십니다.
둘째로, 장소를 봐도 맞지 않습니다. 저들은 언제나 그물을 던집니다.
낚시질이 아니라 그물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물고기가 몰리는 장소에다 그물을 던집니다. 무턱대고 아무데나 그물을 던져 잡는 것이 아닙니다. 고기가 모이는 곳은 바다 깊은 곳이 아니라 호숫가입니다. 이런 상식에 아랑곳없이, 저들의 경험과는 관계없이, 엉뚱하게도 깊은 데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로서는 순종하기 어려운 입장입니다.
셋째로, 이미 그물을 다 정리해놓았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2절)"라고 했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다 씻은 후에 예수님께서 한 배에 올라앉아 육지에서 좀 떼게 하시고 저 언덕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리를 가르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일하는 도중에 한번 더 하는 것은 쉽습니다마는 다 정리한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입니다. 지금 일을 끝내고 그물을 착착 개어서 얹어놓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하는 도중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시킨다면 열 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다 끝난 다음에 똑같은 일을 다시 하라고 합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이미 실패했던 똑같은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나마 경험에 맞지 않는 시간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니 참으로 곤란합니다. 그물도 씻고 손도 씻었습니다. 이제는 끝났으니 낮잠이나 좀 자다가 밤이 되면 다시 한번 해보자 하고 생각하는 시간에 와서 예수님은 그물을 던지라 하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는 데 전문가입니다. 모든 분야마다 전문가가 있습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베드로입니다. 그리 넓지 않은 갈릴리 바다를 제 손바닥 보듯 빤히 아는 베드로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사람입니다. 갓 서른 살입니다. 목수의 아들이요, 그 자신도 목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물고기를 잡으려거든 그물을 여기 내려라 저기 내려라 하고, 목수가 어부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경험상으로도 불가능하고, 지식으로도 불가능하고, 이치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믿음은 순종이다. 믿음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저렇게 하면 되겠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 하는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 됩니다. 그때에야 믿음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에 합당한 것이라면 큰 어려움이 없겠지만 믿음과 반대될 때에 우리는 부득불 믿음 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요구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곧 믿음이요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 이적에 참예했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2장 1절로 11절에 나오는 첫번 이적 이야기를 보았습니다마는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예수님께 고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 : 5)."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이것이 마리아의 견해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모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마리아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서 있던 예수님은 하인들을 보고 말합니다. 저기 결례 항아리가 비어 있으니 물을 길어다 부어라, 아구까지 가득 채워라, 이제 그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주어라-이밖에 다른 말씀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지시를 따를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집에 모자라는 것은 포도주입니다. 그런데 왜 물짐을 지라는 것입니까? 왜 결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까? 따지자면 한이 없습니다. 포도주 모자란 것과 물 길어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며, 결례 항아리에 물을 채웠으면 그만이지 그 맹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주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입니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기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는 동안에 항아리의 물이 전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 절대 순종함으로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첫번 이적을 본 것이 베드로가 오늘 순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미루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의 요체는 곧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도 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까지도 순종하였습니다.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지만 순종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마디합니다. 이 말마저도 하지 않았으면 싶은데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일단 단서를 단 다음에 계속하여 하는 말이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입니다. 잡느냐 못 잡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못 잡을 것이 뻔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씀하셨으므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헬라 원문을 보면 '에피 데 토 레마티 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말에 따라서, 당신의 말대로 라는 말입니다. '말하는 대로'라는 말에는 절대로 가감이 없습니다. 목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라고 했으면 일단 가는 것입니다. 무슨 방법으로든 가면 됩니다. 내 방법대로 가면 되지-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물을 던져라 하면 두말없이 던지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던져라 해도 그렇습니다. 내일 아침에 던지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네 마음대로 던지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말씀대로'라는 말은 말에 따라서, 즉각적으로, 말씀하신 그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가감 없이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잡히리라는 확신이 있어서도 아니고, 잡기 위해서도 아니고,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소라도 있기 때문이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를 묻지 맙시다. 말씀하신 분을 보아서 순종합시다. 부모님께 효도를 할 때에 어떻습니까? 부모님이 말씀하신 것이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될까 안될까, 이로울까 해로울까, 이치에 맞는가 안 맞는가, 쉬울까 어려울까를 묻지 마십시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선생이여"라고 호칭합니다. 아직도 그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합니다. 모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니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는 그 자체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6절)."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혀서 혼자서는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다른 배에까지 도움을 청합니다. 두 배에 가득 실었는데 잠길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이를 보고'라는 말은 '이를 알고'라는 말도 됩니다. 즉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선생이여'했는데 지금은 '주여'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적을 보기 전에는 '선생'이었으나 이적을 본 다음에는 '주인'입니다. 믿음이 발전한 것입니다.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주입니다. 그러나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훌륭한 선생님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큐리에'라고 부르고 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 된 기본 자세입니다. 주의 소명을 받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사야 6장 5절을 보면,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에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 6절에서도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예레미야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시작합니다. 나는 의인입니다,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명자의 기본 자세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회개한다는 말입니까? 계속적으로 회개하여야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회개라는 것은 무슨 살인죄라든가 간음죄 같은 일반적인 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의 뜻은 '내가 순종할 때에 믿음으로 하지 못했습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고 하셨을 때 '옳거니, 이제는 고기를 잡겠구나'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예 잡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좀더 부연하여 추측해봅니다. 빈 그물을 번쩍 들어올리고는 "예수님, 이것 보세요. 한 마리도 안 잡혔잖아요!"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득 잡히고 나니 두려워졌습니다. 내가 왜 의심하였던가, 내가 왜 미리 감사하지 못했던가, 두려워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꼭 들어야 할 말씀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삼하 5 : 19)," 저 원수들을 너희 손에 붙이리라, 저 여리고 성을 너희 손에 붙이리라-이 한마디만 들으면 이긴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쳐들어가면 다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순종하기는 한 것 같은데 억지로 했습니다. 말씀하셨으니 당신의 체면을 보아서 순종하렵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제자인데 순종해야지요, 이렇게 생각했던 것 자체를 지금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 신앙, 기쁨으로 순종하지 못한 것, 말씀 자체를 능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말씀을 주실 때에 성취된 것과 같은 감격을 갖지 못한 것, 약속 자체만을 가지고도 만족해야 하는데 만족하지 못했던, 그 불 신앙에 대해서 그는 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은 믿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죄인을 보는 것입니다. 빛 앞에서 어둠을 보는 것입니다. 깊은 산에 올라가 홀로 자기를 돌아보며 '내게 이런 잘못이 있구나' 반성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을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가 참으로 위대한 회개요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감격 앞에서의 회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사건, 이 하나님의 큰 능력 앞에서 내 모습을 보니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회개의 예가 구약성경에서 몇 군데 나옵니다. 그 중의 하나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욥기를 보면 1장부터 40장까지 계속하여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열 형제나 되는 자녀들이 다 죽고, 재산이 없어지고, 아내는 병들고, 자기마저 병이 듭니다. 친구들조차 찾아와서 자꾸 비난하고 저주를 하니 죽을 지경입니다. 전신에 악창이 나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고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개가 와서 핥습니다. 이렇게 모진 고통을 당할 때에 욥은 자기의 생명을 저주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욥 3 : 11, 12)" 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부르짖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까지 잘 참았다고는 하지만 그 속으로 할만한 원망은 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기나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겨우겨우 믿음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의 재산을 주시고 자식도 다시 열 명을 주십니다. 이때에 욥이 회개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 : 5, 6)."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할 때에 교만하였다가 실패할 때에 회개하는 사람을 봅니다. 건강할 때에 자기 마음대로 교만하게 살다가 병들어 죽게 되어서 회개하는 사람을 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일이 잘될 때에 회개하는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기적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 축복 받을 때에 오히려 회개하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퍽 힘듭니다. 이러한 회개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회개하고 있는 베드로는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니고 실패한 것도 아니고 징계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물고기를 잡는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았습니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자면 베드로는 수지맞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느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높은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세 앞에D똕TXT?서 자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씀드립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앞에서 나라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무자격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이제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 지금 순종한 것처럼 순종만 하면 된다, 그 자세로 겸손하게 계속적으로 회개하며, 은혜 안에서 자기를 반성하며, 자기를 작게 여기며, 따르기만 하라.
그러면 많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는 뒷날에 삼천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그것을 이루리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저들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라는 구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실패해서 목사 된 사람은 많습니다.
이 사업 저 사업 다 안되니 아마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가 보다 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사람은 꽤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는 오히려 사업이 잘되었습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안되던 일이 기적으로 잘되었는데 이것을 내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특별 케이스입니다. 성경에서나 읽을 수 있는 것이지 일반적으로는 드문 이야기입니다. 이 일 저 일 다 망한 다음에 그때 가서야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하는 사람이 있습디다. 도대체 선교사가 실패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니까 이제는 할 수 없이 '주의 일이나' 하겠다고 드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가 물고기를 잡는 데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고기를 더 많이 잡았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많은 물고기는 볼 것 없이 싹 밀어붙이고는 주를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적이 이 일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안에다 엄청난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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