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장 33절~40절)

by 【고동엽】 2024. 4. 13.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장 33절~40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사람은 누구나 절대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성이 절대적인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렇게 절대적인 것인데, 우리가 얻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소원에 대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나는 당신(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어떤 평안도 없었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절대자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 어떤 평안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적 보장 없이는 평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번 돈도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는 사업도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절대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나 해서 땅을 삽니다. 땅이야 변하지 않지만 내가 변하고 땅값이 변하며 땅문서가 변하여집니다. 아무리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 하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간이 상대적인 세상에 살면서 계속 절대적인 것을 구하고 있으니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넌센스가 있습니다. 나는 변하면서 상대방은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고 갖은 지혜를 동원하다가 철학자들이 겨우 생각해낸 것이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는 그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찾았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불안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을까 하고 찾다가, 변하는 그 맥락은 변치 않는다고 해서 찾아낸 것이 변증법입니다.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변한다."----이것이 진리라고 믿고 그 진리 위에 공산주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시행착오로 끝났습니다.

믿을 것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믿는 신앙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 아닙니까? 이것이 진리가 아님은 분명히 판정 났습니다. 그러면, 진리란 절대로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진리란 무엇이냐 하는 과제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까? 있다고 생각하신 분은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내가 믿는 그 진리에 내가 속했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진리와 함께 내가 얼마나 희생하고 있으며 그 진리와 함께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진리 개념은 사실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고, 또한 거짓의 반대인 참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의 내용을 정리하면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종합해 보면 학술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 헬라 사람들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철학적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라야 합니다. 둘째는 로마, 즉 라틴 계열 사람들의 진리로, 불변의 법칙이 진리입니다. 여기서는 약자에겐 진리가 없으며 강자가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이 곧 진리란 말입니다. 잘 아는 대로 혁명이란 성공하면 진리이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긴 자라야만 진리라 것이 통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히브리 사람들의 진리로, 이것은 실제적이며 인격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로, 진리를 따라 사는 생은 곧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합리적인 이치를 믿고 살 때가 평안하다는 것이 헬라 식이요, 힘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평안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으로 라틴 식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여기에 참 평안이 있다는 것이 히브리 식의 진리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진리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말했습니다. 첫째, 진리는 사실입니다. 즉 셋에 셋을 곱하면 아홉이고, 다윗은 유대나라 왕이었다는 사실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진리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네째는 그 실재를 깨달은 사실 그만큼이 진리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로, 17세기에 모든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입니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갈릴레오는 지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이 새로운 학설에 깜짝 놀랐고 특별히 교황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교황청으로 불러 종교재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지동설은 진리가 아니니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취소하지 않으면 죽게 되므로 그는 취소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학설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서명을 하고, 돌아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에 붙들려 평생을 고생하다가 마지막에는 장님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지구가 돌아간다, 또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학설 중에 어느 편이 진리입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갈릴레오의 지동설도 틀린 것입니다. 어떻게 땅이 움직이지 않으며 하늘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진리란 어디까지나 객관적입니다. 내가 돌아간다고 해서 돌아가고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안 돌아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리는 사실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합니다. 실재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깨달아서 증거할 뿐입니다. 지극히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예를 들면, 농부는 농사의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후와 천체가 돌아가는 진리에 대해 조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법칙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을 알아서 그 진리에 따라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과학자는 우주의 많은 진리 중에 조금 아는 그 원리를 이용하여 전기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며, 그 밖의 이것저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진리 중 지극히 작은 한 부분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뉴턴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마치 태평양 바다에서 조약돌 하나 건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무한한 진리 가운데 그 한 부분을 조금 깨달아서 생활에 이용할 뿐인 것입니다. 예술가는 이 진리를 예술계에서 찬양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본 바와 들은 바와 경험한 바에 의해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금 빌라도와 예수가 대면하고 있으면서 진리가 조롱 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철학과 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지금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재판정에서 호령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살릴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는 줄을 모르느냐?" 이에 예수님은 쇠사슬에 묶인 죄인의 모습이지만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진리 편에서 조금도 요동 없이 타협도 비굴함도 없는 당당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사실 처음부터 이 재판이 모순이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재판이란 재판해 가면서 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해 놓고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판결이 난 재판이니 이런 잘못된 재판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이 재판은 새벽에 진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반드시 낮에 재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사람의 감정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은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꺼려하여 새벽에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날치기 재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유대사람들은 유월절인 이 절기에 몸을 더럽힐 수가 없다고 해서 법정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있으면서 소리를 질러 재판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빌라도가 법정과 마당을 들락날락하면서 재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또 한번 우스꽝스러운 모순입니다. 의인을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지으면서도 유대인들의 규례를 따라 이방인의 재판정에 들어갈 수 없다고 밖에서 소리지르는 이 위선이야말로 얼마나 모순된 것입니까? 그리고 유대의 법으로는 하나님을 훼방한 죄는 당연히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는 십자가형을 내렸다는 것이 또 한번의 모순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재판한 사건은 전적으로 진리를 벗어난 것임을 빌라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면서도 마음으로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고 "내가 왕이라"고 대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를 놓아주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며 대야에 손을 씻는 비겁한 행동을 취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빌라도 중 누가 더 자유인으로 보입니까? 누가 재판장입니까? 알고 보면 예수께서 빌라도를 죄인으로 심판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대표자로 강자철학(强者哲學)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지금 왜 이렇게도 무능하게 가만히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높은 권세가 있어 온 유대 사람들이 높이높이 존경하며 말씀에 능하신 분이 죽음 앞에서 왜 한마디의 변명도 없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이 억울한 재판 앞에서 그의 침묵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우기 빌라도 자신은 예수를 살릴 수도 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통사정도 없는 예수를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의로운 것이 분명한데도 변명이나 애걸이 없었습니다. 이상의 예수님의 태도에서 오히려 빌라도는 두려움까지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세상적이요 물질적이요 육체 중심적으로만 사는 빌라도가 감히 예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의 음성을 알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D. L. 무디는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모든 생활을 연구하고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의 일생 중에 어느 순간이 가장 마음 아팠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 보는 이 순간, 즉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조롱하는 이 때가 제일 가슴아팠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누명을 쓰는 것이나 고난 당하는 것이 괴롭고 약자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진리가 무엇이냐는 조롱 섞인 빌라도의 질문은 아마도 주님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었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네가 3년 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도 사랑한다면서 추종하던 제자들이 많은데 어째서 지금 홀로 이렇게 서 있느냐? 지금까지 당신이 부르짖던 진리는 어디 갔느냐"는 비난과 조롱이 뒤섞인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한두 명의 동조자나 제자는 여기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죽은 자도 살렸고 많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들은 왜 말이 없느냐, 그래도 진리냐 하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기에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고독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고난 당하시는 바로 이 자리에 정말 몇 사람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 생명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지금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하면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진리와 함께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 둘째는 그의 말씀과 약속이 진리요, 셋째는 그는 왕이시며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종말적인 심판주라는 사실이 진리이며, 넷째는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진리며, 다섯째는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는 장차 그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이 진리를 따르고 이 진리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홀로 죽으려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침묵하고 계시나 그것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빌라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십자가에 못박는 그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진리입니다. 역사상의 최대의 진리가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를 알고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며 나를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장 33절~40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사람은 누구나 절대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성이 절대적인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렇게 절대적인 것인데, 우리가 얻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소원에 대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나는 당신(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어떤 평안도 없었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절대자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 어떤 평안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적 보장 없이는 평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번 돈도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는 사업도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절대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나 해서 땅을 삽니다. 땅이야 변하지 않지만 내가 변하고 땅값이 변하며 땅문서가 변하여집니다. 아무리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 하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간이 상대적인 세상에 살면서 계속 절대적인 것을 구하고 있으니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넌센스가 있습니다. 나는 변하면서 상대방은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고 갖은 지혜를 동원하다가 철학자들이 겨우 생각해낸 것이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는 그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찾았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불안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을까 하고 찾다가, 변하는 그 맥락은 변치 않는다고 해서 찾아낸 것이 변증법입니다.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변한다."----이것이 진리라고 믿고 그 진리 위에 공산주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시행착오로 끝났습니다.

믿을 것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믿는 신앙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 아닙니까? 이것이 진리가 아님은 분명히 판정 났습니다. 그러면, 진리란 절대로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진리란 무엇이냐 하는 과제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까? 있다고 생각하신 분은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내가 믿는 그 진리에 내가 속했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진리와 함께 내가 얼마나 희생하고 있으며 그 진리와 함께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진리 개념은 사실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고, 또한 거짓의 반대인 참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의 내용을 정리하면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종합해 보면 학술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 헬라 사람들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철학적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라야 합니다. 둘째는 로마, 즉 라틴 계열 사람들의 진리로, 불변의 법칙이 진리입니다. 여기서는 약자에겐 진리가 없으며 강자가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이 곧 진리란 말입니다. 잘 아는 대로 혁명이란 성공하면 진리이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긴 자라야만 진리라 것이 통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히브리 사람들의 진리로, 이것은 실제적이며 인격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로, 진리를 따라 사는 생은 곧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합리적인 이치를 믿고 살 때가 평안하다는 것이 헬라 식이요, 힘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평안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으로 라틴 식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여기에 참 평안이 있다는 것이 히브리 식의 진리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진리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말했습니다. 첫째, 진리는 사실입니다. 즉 셋에 셋을 곱하면 아홉이고, 다윗은 유대나라 왕이었다는 사실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진리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네째는 그 실재를 깨달은 사실 그만큼이 진리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로, 17세기에 모든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입니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갈릴레오는 지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이 새로운 학설에 깜짝 놀랐고 특별히 교황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교황청으로 불러 종교재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지동설은 진리가 아니니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취소하지 않으면 죽게 되므로 그는 취소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학설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서명을 하고, 돌아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에 붙들려 평생을 고생하다가 마지막에는 장님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지구가 돌아간다, 또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학설 중에 어느 편이 진리입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갈릴레오의 지동설도 틀린 것입니다. 어떻게 땅이 움직이지 않으며 하늘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진리란 어디까지나 객관적입니다. 내가 돌아간다고 해서 돌아가고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안 돌아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리는 사실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합니다. 실재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깨달아서 증거할 뿐입니다. 지극히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예를 들면, 농부는 농사의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후와 천체가 돌아가는 진리에 대해 조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법칙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을 알아서 그 진리에 따라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과학자는 우주의 많은 진리 중에 조금 아는 그 원리를 이용하여 전기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며, 그 밖의 이것저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진리 중 지극히 작은 한 부분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뉴턴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마치 태평양 바다에서 조약돌 하나 건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무한한 진리 가운데 그 한 부분을 조금 깨달아서 생활에 이용할 뿐인 것입니다. 예술가는 이 진리를 예술계에서 찬양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본 바와 들은 바와 경험한 바에 의해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금 빌라도와 예수가 대면하고 있으면서 진리가 조롱 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철학과 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지금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재판정에서 호령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살릴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는 줄을 모르느냐?" 이에 예수님은 쇠사슬에 묶인 죄인의 모습이지만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진리 편에서 조금도 요동 없이 타협도 비굴함도 없는 당당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사실 처음부터 이 재판이 모순이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재판이란 재판해 가면서 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해 놓고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판결이 난 재판이니 이런 잘못된 재판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이 재판은 새벽에 진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반드시 낮에 재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사람의 감정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은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꺼려하여 새벽에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날치기 재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유대사람들은 유월절인 이 절기에 몸을 더럽힐 수가 없다고 해서 법정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있으면서 소리를 질러 재판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빌라도가 법정과 마당을 들락날락하면서 재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또 한번 우스꽝스러운 모순입니다. 의인을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지으면서도 유대인들의 규례를 따라 이방인의 재판정에 들어갈 수 없다고 밖에서 소리지르는 이 위선이야말로 얼마나 모순된 것입니까? 그리고 유대의 법으로는 하나님을 훼방한 죄는 당연히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는 십자가형을 내렸다는 것이 또 한번의 모순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재판한 사건은 전적으로 진리를 벗어난 것임을 빌라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면서도 마음으로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고 "내가 왕이라"고 대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를 놓아주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며 대야에 손을 씻는 비겁한 행동을 취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빌라도 중 누가 더 자유인으로 보입니까? 누가 재판장입니까? 알고 보면 예수께서 빌라도를 죄인으로 심판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대표자로 강자철학(强者哲學)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지금 왜 이렇게도 무능하게 가만히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높은 권세가 있어 온 유대 사람들이 높이높이 존경하며 말씀에 능하신 분이 죽음 앞에서 왜 한마디의 변명도 없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이 억울한 재판 앞에서 그의 침묵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우기 빌라도 자신은 예수를 살릴 수도 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통사정도 없는 예수를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의로운 것이 분명한데도 변명이나 애걸이 없었습니다. 이상의 예수님의 태도에서 오히려 빌라도는 두려움까지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세상적이요 물질적이요 육체 중심적으로만 사는 빌라도가 감히 예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의 음성을 알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D. L. 무디는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모든 생활을 연구하고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의 일생 중에 어느 순간이 가장 마음 아팠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 보는 이 순간, 즉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조롱하는 이 때가 제일 가슴아팠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누명을 쓰는 것이나 고난 당하는 것이 괴롭고 약자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진리가 무엇이냐는 조롱 섞인 빌라도의 질문은 아마도 주님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었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네가 3년 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도 사랑한다면서 추종하던 제자들이 많은데 어째서 지금 홀로 이렇게 서 있느냐? 지금까지 당신이 부르짖던 진리는 어디 갔느냐"는 비난과 조롱이 뒤섞인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한두 명의 동조자나 제자는 여기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죽은 자도 살렸고 많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들은 왜 말이 없느냐, 그래도 진리냐 하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기에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고독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고난 당하시는 바로 이 자리에 정말 몇 사람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 생명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지금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하면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진리와 함께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 둘째는 그의 말씀과 약속이 진리요, 셋째는 그는 왕이시며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종말적인 심판주라는 사실이 진리이며, 넷째는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진리며, 다섯째는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는 장차 그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이 진리를 따르고 이 진리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홀로 죽으려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침묵하고 계시나 그것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빌라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십자가에 못박는 그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진리입니다. 역사상의 최대의 진리가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를 알고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며 나를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