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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극치를 아는 사람(빌립보서 2 : 12-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한 주인이 어느 날 저녁에 자기의 종을 불러 이르기를 내일 아침 일찍 윗마을에 다녀와야겠느니 그리 알고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뒷날 아침 일찍 일어난 주인이 이 종을 찾아보니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이 종이 나타났기에 "너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저 윗마을에 갔다 왔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갔다 왔단 말입니까? 무엇을 가져오라는 것인지, 갖다 주라는 것인지,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고서 "갔다 와야겠다" 하니까 갔다 왔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정력에 있어 낭비만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갖출 만큼 갖추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만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알맹이가 없고 내용이 없습니다. 목적을 잃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가 상실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행복을 찾아 나선 방랑객과 같습니다. 정말,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고야 어떻게 라고 하는 문제도 해결이 될 터인데 아직도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의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허무와 무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두고 두고 해야 하는 일생의 과제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행복을 무엇이라 규정하며, 무엇으로 믿고 따라갑니까? 실로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보면 자식이면 좋을 것이라고 해서, 그것도 아들이면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가다가 마지막에는 자식이 원수라며 돌아섭니다. 돈이면 다 될 줄 알고 부지런히 좇아 가다가 돈도 행복의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더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지위다, 명예다 하고 열심히 따라가 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전부가 결코 행복이 아닌 허무인 것을 뒤 늦게야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는 객관적인 것입니까? 주관적인 것입니까? 절대적 가치의 것입니까? 상대적 평가의 것입니까? 우리는 간혹 "행복이란 별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결국 행복이란 주관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 몹시 배고픈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배부르다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배가 불러지는 것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역시 객관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객관적인 여건이 다 갖추어졌다고 하여 그가 행복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행복을 찾는 자의 고민이 있습니다. 절대적 가치란 무엇이며 또 그 상대성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두고 두고 생각하여야 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문제는 기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이것만은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다소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내가 행복하여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무지개 같은 것인가, 아니면 있는 듯하나 없는 것인가, 잡을 수 있는 것인가, 잡을 수 없는 것인가, 이상은 이상대로 영원히 두어야 하는가, 그 현실화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갈등과 번뇌 속에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이상의 현실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학적 문제를 깊이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실제적이고 대단히 긴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깨달아 알고 또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바로 생명의 길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시하는 성서적 신앙이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벽두에 하신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는 말씀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가까웠다"는 말은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열면 이 천국 안에 살 수 있고, 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엥기케 라는 헬라 말은 손에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완전하게 손에 쥐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쥐려면 쥘 수 있는 그러한 공간적 거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은 임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천국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천국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가르치시는 바 성경적 진리입니다. 행복은 꿈과 이상만의 것이 아닙니다. 분명 현실이며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행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미래지향적이요 종말적입니다만, 어렵게 표현하여 종말적 현실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나라, 즉 행복이 그리스도인적인 즐거움이란 먼 미래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이구요, 구체적입니다.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요 성격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행복을 오늘 내가 누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요 14:27)고 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시면 우리는 그 평안을, 그 행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지 못하고 계속 달라고만 조르고 있다면 그 신앙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행복의 극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부조리하고 모순된 처사에 의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루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씁니다.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며 감옥 안에 있는 부자유한 사람이 오히려 감옥 밖의 사람에게 거듭 거듭 기뻐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문에 빌립보서를 행복의 복음이오 혹은 희락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약 부잣집 아들의 처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이는 믿을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고생하는 어려운 생활 중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였기에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산 교훈이요 살아있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기쁨, 이 행복은 물론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건강 때문도 아닙니다. 세속적인 성공도 아닙니다. 그는 어떤 기록에 의하면 넉자 밖에 안 되는 키에 안질도 있는 사람이요 주기적으로 오는 부끄러운 병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정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의 일차적인 근거는 예수께서 나를 구속하셨다고 하는 구원론에 근거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가 이미 십자가에 죽으셨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 죄를 대속 하셨다고 하는 그 구원, 그 구속함에 그의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에 미친다는 것은 대단히 귀중한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미친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바로만 미친다면 미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미친다는 것이 남 보기에는 딱하지만 본인은 행복한 것입니다. 본인만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엄청난 행복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므로 그 사랑에 포로가 되고, 그 사랑에 미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불렀다고 하는 그 소명에 근거한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 만물의 때만도 못하며, 죄인의 괴수요, 천하에 못된 나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고 하는 놀라운 감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그렇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특별하게 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필요 속에서 자기 가치를 발견합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보시고 필요하다 하시니 이제 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사랑할 만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는 사랑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자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참으로 분명한 목적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그릇이라는 것은 그릇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옛날의 그릇을 골동품으로 진열해 놓고 관상용으로 쓰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릇이란 본래 그 속에 무엇을 담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는 비록 부족하고 하나의 질그릇이었지만 그러나 그 쓰임의 목적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어 쓰여진다 할 때에 그는 행복했습니다. 하나님께 필요했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필요했으며, 이웃을 위해 필요했고, 빌립보 교회를 위해, 아니 수많은 성도들을 위해 나는 필요하게 쓰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감격스럽고, 그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저희 집 딸아이가 교복을 입기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밖에서 다니다가 뛰어 들어 오더니 침대에 엎드려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길래 제가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퉁명스럽게 하는 말이 "남학생이 따라왔단 말이야"하고 웁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나이에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나 나름대로 한마디하기를 "이제부터 살 재미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남학생이 누군지 잘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너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말입니다. 아무리 절세가인이었다 할지라도 이제 60이 넘었다고 생각하면 누가 따라 오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좇아가도 도망갈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나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간혹 보면 너무 바빠서 못살겠다며 어떻게라도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야말로 말조심하셔야 합니다. 혹 마음으로라도 그런 기분은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때때로 어떤 분들은 저를 아끼시는 마음에서 "목사님, 밤낮 그렇게 너무 무리하시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마음으로 하는 대답은 "오랄 때 가야지"하는 것입니다. 누가 항상 오라는 줄 아십니까? 저도 가만히 꼽아보니 몇년 남지를 않았습니다. 나를 반가워하는 것도 잠깐입니다. 조금 지나면 이제 보기 싫다고 할거란 말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아주 큰배를 운전하는 선장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배 전문가요, 바다의 사나이인데 이제 나이 70이 되어 은퇴를 하였습니다. 그때에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엘 가보지를 않았고, 감기 한 번 걸려 본 적 없이 이렇게 건강한데 그만두라고 한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필요 없어" 하시더니 그후 시름시름 앓다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할 일이 없는 사람! 세상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제 눈을 똑바로 뜨고 할 일이 있나 없나를 보세요. 이 주위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가 만나야 하고 내가 도와야하며, 내가 위로하여야 하고, 내가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내가 전도해야 할 사람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필요 없는 사람을 왜 두겠습니까? 내가 못 보아서 그렇지 반드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종종 임종을 맞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제 아무래도 힘들겠다는 사람을 앞에 놓고 그의 임종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럴 때 사실 저의 소원 같아서는 "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 하는 마지막 기도가 끝나면 그대로 바로 돌아가셨으면 참 좋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임종기도를 하고 나왔는데도 돌아가시지를 않고 그 다음에 또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별수 없이 또 가서 다시 기도해야지요. 이렇게 왔다갔다하면서 한 1주일 연기가 되면 그 다음에 오라고 할 때는 갈 마음이 없어집니다. 한번은 어느 권사님의 임종 기간이 이렇게 길어졌던 일이 있습니다. 1주일을 왔다 갔다 했는데도 돌아가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에는 오늘은 진짜로 가십니다 해서 가보았더니 마침 미국에서 아들이 나왔습니다. 그때에 그렇게 누워만 있던 이 권사님이 떡 앉아서는 이 아들을 붙들고 묻기를 "너 예수 잘 믿었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권사님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며 돌아 앉아버리십니다. 그러자 이 아들이 다급해서 하는 말이 "어머니 저 장로 될께요, 맹세합니다" 하고서는 용서를 빌며 자꾸만 웁니다. 그때에 이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야 내 아들이지" 하며 안도의 숨을 쉬시더니 그 길고 바로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분! 이 노인 권사, 할머니가 왜 1주일 동안이나 오락가락 했겠습니까? 아직도 해야 할 마지막 말 한 마디가 있었단 말입니다. 필요하니 두셨고, 필요치 않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세상에 두시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내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필요에 내 진실이 응답함으로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자기를 바치고자 하는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바치는 일에 아까워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희생에 인색하면 사랑의 참 신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정신도 다 주는 그러한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사도 바울의 기막힌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관제라는 말은 양을 가져다 놓고 목을 치면 목이 떨어지면서 피가 솟아오를 때 그것을 그릇에 받아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이것이 붓는 제사라 하여 관제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 여러분! 이 마음을 가져보셨습니까? 이런 대상을 만나 보셨습니까? 직장이든, 일이든,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든 간에, 저 분을 위해서라면 이제 내가 피를 쏟아 부어도 좋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 보지 못했다면 그는 실로 인생의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단 한번, 어느 순간도 그런 마음을 못 가져 보았다면 그는 행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고, 어떤 쾌락의 철학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그는 인생의 참된 기쁨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분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피를 쏟아 부어도 좋다는 대상! 그런 정열! 모두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 이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의 기쁨을 모른 자는 기쁨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희생 속에서 얻는 기쁨의 신비를 모르는 자는 행복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바로 여기에 그의 행복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여러 모양으로 행복을 표현하는 중에 가장 행복할 때 하는 소리가 "미칠 지경이다" 또는 "화끈하다"고도 합니다만 별말 다해 보아도 행복을 표현한다는 말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르쳐 드릴 말이 있는데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대개들 보면 조건을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이 소원만 이루어지면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조건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밤낮 그더라 맙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어야 합니다.
바로 저 분을 위해서라면, 바로 이 일을 위해서라면, 여기서 이대로 피를 토하고 죽어도 좋다는 그런 순간이 결정적인 행복의 절정입니다. 희생의 기쁨을 아는 사람,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자라야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자를 면서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썩어지는 밀 알이 썩어지면서 아쉬워하지를 않습니다. 이는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분명히 아셔야 하고 희생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결혼은 왜 하느냐에 답한 다음의 말들을 인용합니다.
결혼을 왜 하는냐 했을 때, 결혼은 고독으로부터의 자유, 방종으로부터의 자유, 허무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한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역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결혼함으로 바빠지고 결혼함으로 방종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또한 결혼함으로 일거리가 생겨서 허무주의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대개 자녀도 없이 혼자 사시는 분들을 두고 보면 한 50이 넘게 되면 이제는 일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며, 누구를 위하여 돈을 벌 것인가 하는 "그 누구를 위하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써 수고하며 돈을 벌어보았자 줄 사람도, 물려 줄 자식도 없단 말입니다. 그 누구를 위하여 희생할 만한 대상이 없는 자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 자신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말입니다.(롬 14:7) 그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서는 살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며, 교회를 위해,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며, 구를 위해 희생하는 그 희생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자랑거리여야 합니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우리는 큰 자랑을 지니고 삽니다. 대체로 보면 우리가 수고한 일들이 뒤에 가서는 부끄러운 일들이요 가책과 수치감으로 남아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는 달리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허무한 것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결과, 이런 일은 불행한 것입니다. 자랑! 그리스도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숭고한 자랑! 그것이 있을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 직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를 못하고 나의 일 따로, 하나님의 일 따로 라면 이는 불행한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이 일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역사에 연결된 일이요, 그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생각할 때에 그 가치는 무궁 무진하게 높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종말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큰 기쁨을 가지고 살 때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내 마음에 큰 기쁨이 있을 때에 또한 다른 사람을 행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것, 나만이 아니라 다 함께 기뻐하는 바로 그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함께 기뻐하라!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며, 내가 위하여 수고하고, 내가 기쁘게 한 그분과 함께 기뻐하는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행복은 영원한 것이면서 또한 현재적인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는 이 행복으로 슬픔을 이겼습니다. 이 기쁨으로 모든 고난도 이겼습니다. 이 행복이 그로 하여금 창조적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건만 저희들은 그 부름을 외면한 채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고, 기뻐할 수 없는 일을 따라가면서 기쁨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고, 뉘우치며 낙담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이 같은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진정, 행복의 길에서 행복을 찾게 하시사, 주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기쁨과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행복이 우리의 가슴에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후로는 그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시고,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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