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기쁨과 행복// 20010225
2001-12-08 17:41:18 read : 459
주일낮 예배// 시편 20편 1-3절(구약성경 815쪽)
우리 나라에는 큰 예배당에서 한번에 수천 명이 예배드리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많이 모이는 그런 교회들을 보면 솔직히 말해 조금 부럽긴 합니다.
그러나 질투하는 부러움, 저 자신의 존재를 무너뜨리는 그런 부러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 나름대로 주신 분복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회를 하면서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은 가장 부러운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넘치고 감동이 넘치는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린 후 예배드린 사람들마다 심령에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가지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힘있게 살아가는 힘의 원천을 제공하는 싶은 것!
그것은 저의 꿈이며, 아마 거의 모든 목회자의 그런 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신앙생활에서 예배만큼 귀하고 예배의 성공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 예배란 무엇입니까? >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면 우리에게 생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사모하게 됩니다.
2)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 시간과 정성을 드리고 싶습니다.
3)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증인으로 경건하게 살고 싶습니다.
4)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그리워집니다.
그처럼 예배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의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만남을 사모하고, 이 만남을 가지는 것이 행복한 신앙생활의 원천입니다.
만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만남이 없기에 관계가 멀어지고 각종 오해가 생깁니다.
부부관계도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오직 상대방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왜 부부관계가 흔들립니까? 얼굴은 보지만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육 개월마다 한번씩은 신혼 때 기분으로 여행을 가라고 합니다.
시시각각 배우자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사랑에 빠져야 그 관계가 견고해지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자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에 기도 응답의 은혜가 있게 되고, 축복이 예비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깊은 교제도 없이 손만 벌린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얻어 누리기 원한다면 먼저 만나야 합니다.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매를 들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원리로 하나님과 만남도 없이 무엇을 요구만 한다면 과연 바람직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가장 기쁘게 여기실까요? 손 벌리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너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쁘단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매일 딸과 함께 산책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어느 날 목사님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그 사랑스러운 딸이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이제 며칠간 아빠와 산책을 못하게 될 것 같아요."
무슨 일인가 궁금해했는데 며칠 후에 그 딸이 아빠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아빠! 며칠 동안 아빠 선물로 드리려고 이 슬리퍼를 만들었는데,
이제 제가 만든 이 슬리퍼를 신고 저랑 이 근처 공원으로 산책 나가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기분 좋게 딸을 꼭 껴안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만들었네! 은지야! 정말 고맙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슬리퍼를 신고 산책하는 것보다 너랑 손을 잡고 산책하는 것이 더 좋아!"
아마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은 심정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께서 그것도 기뻐하시겠지만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고 우리 인생을 복되게 만드는 통로가 되며,
우리가 예배에 성공하면 다른 성공을 위한 힘과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참 예배자가 될 때 얻는 축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실 것이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붙들어주실 것이며,
우리의 눈물과 정성과 헌신과 땀과 감사를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예배가 되어야 할까요?
<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
마르틴 루터는 예배를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올려 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답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드릴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최고로 높여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마음이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의 힘든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하면 하나님이 더욱 감동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장성한 아들이 결혼해 분가했는데 일주일에 한번씩은 부모를 뵈러 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 앞에서는 즐거워합니다.
아들이 힘든 것을 부모가 안다면 그런 모습에 부모님은 얼마나 감동하겠습니까?
속 상한 일이 있더라도 부모님 앞에서는 밝은 표정을 지어야 효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예배 드리러 왔을 때에는 항상 밝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가치를 알고 예배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님의 높이는 마음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릴 때마다 한 주도 빠짐없이 졸면서 예배드립니다.
잠을 못 자서, 몸이 힘들어서, 피곤해서 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마다 한번도 빠짐 없이 조는 것은 신앙과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왜 그렇게 날마다 조느냐?"고 하면 성경 말씀을 가지고 대답을 합니다.
"시편에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다른 말씀은 잘 잊어도 그런 말씀은 잘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핸드폰도 미리 끄는 것도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실수로 핸드폰을 끄지 않고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내 앞에 계신 분이 내게 소중하고 그분에게 집중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배드릴 때에 핸드폰을 끄는 것을 잊지 않아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바로 예배를 존중하는 모습,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법정에서 핸드폰이 울리면 백만 원 이하의 벌금 및 구류 20일을 살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핸드폰을 끄지 않고 예배한다면 될까요?
사실상 이 세상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핸드폰도 끄고, 자세도 정자세로 하고,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 속에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응답 받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 예배 시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여야 합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는 것, 벌이 두려워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하나님 만나는 것을 사모하고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모습은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청진기입니다.
사실상 신앙 수준은 예배 안에서 결정되고 예배의 질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작 30분전부터 기도하며 들뜬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처럼 예배가 끝나도 못내 그 시간이 아쉬워서 감격 가운데 예배당을 나서도
이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기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
예배 시간을 그저 그렇게 보내면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축복 받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축복 받는 것도 잘 받아야 합니다. 축복을 어떤 분은 죽는 길로 연결시킵니다.
어떤 분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 교회를 안 나오십니까?"
그분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어찌나 축복하는지 바빠서 못 나가겠어요."
축복을 받아서 바빠서 못 나간다면 정말 무엇이 축복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까지 천하영광, 물질을 주겠다고 유혹하지 않습니까?
마귀도 물질 줄 능력이 있다는 말인데, 그것에 현혹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예배를 최고로 소중한 것으로 알고 예배의 자리를 벗어나면 안됩니다.
그러면 꼭 망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른 더욱 소중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불의 전차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1924년 올림픽 때 확실한 금메달 감이었던 에릭 리들이라는 100미터 선수가
결승전 경기가 있는 날이 주일이라고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위선자, 배반자, 율법주의자, 옹졸한 자라는 갖가지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도 그는 말합니다. "그래도 저는 주일에 경기에 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릭 리들은 눈앞의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400미터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감독에게 부탁합니다.
"저에게 400미터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불가능한 일입니다. 100미터 단거리 선수가 어떻게 갑자기 중거리를 뜁니까?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감독이 그를 출전시켰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한 것입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100미터 선수가 400미터 경기에서 우승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200미터는 저의 힘으로 뛰고,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예배에 참석하면 손해인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유익입니다.
반면에 예배에 빠지면 그때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삶이 훨씬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이익을 바라보고 예배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세상일이 많아 벅차니까 주일도 빠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쳐서 책상에 엎드려 잠깐 낮잠을 자는데 꿈을 꿨습니다.
꿈에 사다리가 보이더니 그 사다리가 하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단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투덜댑니다. "하나님! 단 하나를 빼서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나요?"
그처럼 단이 하나 빠져 있으니까 오르기가 위험하기도 했고 힘도 배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는데 어느 곳에서는 세 단이나 빠져 정말 오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데 너무 힘들어 불평했습니다.
"하나님! 3단이나 없는 이런 사다리를 주시면 어떻게 하늘로 갑니까?"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 단은 하나님이 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일을 범해서 스스로 뺀 것이오."
주일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 우리 영혼이 쉼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 하늘가는 우리의 길은 더욱 뚜렷하게 되고 더욱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주일을 지킬 때 영혼과 마음과 삶과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부르시면 세상 일을 뒤로 하고 나와야 합니다.
바쁜 일도 뒤로 미루고 나와야 하고, 부부싸움을 했다고 해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때로는 부득이한 일로 토요일 밤에 술을 마셔서 술 냄새가 나도 나와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에 언제 가장 보람이 있었고, 언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헌신했을 때가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 우리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삶의 모든 부분이 윤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시간을 무엇보다도 사모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예배 시간에 열린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여야 합니다 >
예배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쉬운 줄 압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말씀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힘듭니다.
왜 잘 들리지 않습니까? 죄로 인한 이기심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그처럼 말씀 듣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말씀을 잘 들으면 거기에서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보고 "내 말 들어 보세요."하고 주장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부모나 교회보고 "내 말 들어보세요"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알고, 공동체의 원리를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중에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까 저에게도 사람 보는 눈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처녀 총각에게 어떤 사람은 배우자감으로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예배 중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예배에 집중하는 사람,
예배 시간 전에 와서 예배를 준비하고, 앞자리에 앉는 사람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교회는 앞자리나 뒷자리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우리 교회도 예배당이 커지면
꼭 앞자리로 오십시오. 자리문제로 예배의 질이 크게 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사람관계에서 사람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거리에 있으면
절대 그 관계가 깊어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예배 때에 말씀을 부지런히 받아 적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책임감 있게 잘 할 사람들입니다. 신뢰가 갑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몸은 나와 있어도 말씀을 자꾸만 손으로 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말씀을 막고 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막고 치는 것과 같습니다.
30년 전에 한 시골에서 밤에 우물에 도깨비가 나왔다고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가보니까 정말 우물에 파란 도깨비불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후레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그곳을 비춰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고양이가 빠져 있었습니다. 쥐를 잡으려다가 우물에 빠진 것입니다.
고양이 구출작전이 벌어졌습니다. 긴 대나무에 갈고리를 걸어 내렸습니다.
이제 고양이는 그곳에 올라타면 안전하게 끌어올려져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대나무를 내리니까 고양이가 여기저기 피하며 대나무를 할퀴려고 했습니다.
자기를 구하려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하니 고양이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한 사람이 대나무 막대기를 거꾸로 쥐고 고양이를 세차게 때렸습니다.
고양이가 꽥 하며 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고양이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이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괜히 할퀴고 뜯고 합니다. 말씀을 막습니다.
교인 중에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나 들으라고 그 말씀 했지요?"라고 하면서
할퀴고 대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리는 말을 죽이는 말로 듣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 들으면서 자신에게만 꼭 좋은 말만 골라 들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사십시오 >
이제 우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알고 예배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순식간에 이상하게 변할 수 있는지 그 실상을 알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한 사람이 구로구 시흥동에 셋방을 얻으러 아내와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들이 가진 돈으로 전세방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오는데 부인이 그만 짜증을 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마음이 산란하고 스스로 주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일년이 지나기가 무섭게 전세 값은 마구 오르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부인은 임신 9개월의 몸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가면서 투덜댔습니다.
"당신은 천만 원 짜리 전세방도 얻을 능력이 없어요?"
그것이 그만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가뜩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이성을 잃었습니다.
순식간에 아내와 두살바기 딸을 목 졸라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바드 대학 연구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현재 이혼율은 세 가정 당 한 가정이 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결혼을 올린 가정의 경우 50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주일 함께 교회를 나가는 가정의 경우 1105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의 삶은 그만큼 안전해진다는 연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수없이 뒤집혀도 예배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삶에 은총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예배가 성공하면 성공자가 되고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과 첫 순교자 아벨의 차이는 무슨 차이였습니까?
예배의 차이였습니다. 예배가 그처럼 사람도 달라지게 하고, 축복도 달라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예배에는 매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 매인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 시간뿐만이 아니라 항상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모습에 대해 우리는 흔히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표현을 씁니다.
야외에 놀러가서 "교회에서 항상 찬송하는데 야외에서도 무슨 찬송이냐?"라고 하면서
어떤 분은 두만강을 한 곡조 뽑습니다.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억눌린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저는 그의 책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는데 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기도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바위 너구리들이 그들의 안전터인 바위로 달려가 거하는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 항상 주님께 달려와 예배자로 서게 하옵소서!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우리의 작은 세계 안에는 우연과 변화가 북적대오나
우리 주님 안에서는 흔들림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주님 앞에 우리가 있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행복한 예배자의 고백이 항상 넘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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