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하나되어 사는 삶// 20011007
2001-12-07 23:47:30 read : 376
주일 낮예배// 로마서 6장 1-11절
< 죄가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
인간사회에서 생기는 모든 아픔과 갈등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입니다.
죄는 축복을 결정적으로 막기에 축복을 진정 원하면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합니다.
그처럼 죄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지만 죄로 짓눌려서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5장 20절 말씀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내 편한 대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또 은혜로 덮어주실 거야."라고 생각하고 죄에 대해서 편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리고 2절에서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다시 죄 가운데 빠져서는 안된다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있어 최대의 기쁨은 바로 무엇보다 죄 사함의 기쁨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형선고 받고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내린 특별사면과 같습니다.
그처럼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죄와 가까이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지어도 괜찮아!"라는 생각부터 버리고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례가 무엇인지 대략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합하는 것인데, 특별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라고 합니까? 죽어야 진짜 사는 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덜 죽으면 아픈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많은 마음의 고통은 덜 죽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나무가 타다 말면 참 볼품이 없습니다. 차라리 다 타서 숯이 되면 쓸모가 있습니다.
건물도 짓다가 말면 보기에 흉하고, 길도 가다가 포기하면 정말 손해가 많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빨리 죽어야 되는데 죽는 흉내만 내니까 더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 믿겠다고 했으면 정말 잘 믿어보려고 할 때 큰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에서 영적 스파이로, 혹은 이중간첩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히 예수님 품으로 들어와서 세상적인 옛 사람은 죽은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간첩이 남쪽으로 내려와 살지만 마음은 북쪽에 있기 때문에 절대 평안이 없습니다.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가슴이 떨리고, 마음은 항상 갈등과 긴장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은 교회에 있어도 마음이 세상에 있으면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간첩이 자수를 결심하고 경찰에 자수하여 광명을 찾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북한과 은밀하게 교신을 하고 지낸다면 이중간첩입니다.
그처럼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서도 다시 세상과 내통하면 갈등과 불안은 계속됩니다.
이제는 죄와 완전히 결별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마음에 온전한 평안이 생깁니다.
그래도 진짜 죄와 결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만은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죄 문제를 너무 회피하지 마시고, 죄를 자꾸 합리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죄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때문에 죄 설교를 하면 꼭 자기보고 설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심방 받는 사람이 예배 도중에 내내 기분 나쁜 표정을 하다가
예배가 끝나자마자 "나도 알아요!"라고 하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어찌 죄에 대해서 죽었고, 어찌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는 것은 자존심이 죽는 것이고, 정말 자신이 죽을 줄 알아야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틀려도 나만은 옳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지 않으면 주님과 온전히 연합할 길이 없습니다.
< 세례는 최대의 축복된 의식입니다 >
오늘은 세례식이 있는 날인데, 세례란 무엇입니까? 캘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삶을 출발하는 것이다."
이 세례식에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인치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바로 물입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요, 깨끗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사람이 죄를 씻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기본적으로 의인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이 좀더 의로워진 후에 세례를 받겠다고 합니다.
생각은 훌륭하지만 얼마나 우리가 의로워져야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맞겠습니까?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의로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받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례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을 위해 헌신을 다짐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산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4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를 통한 새로운 삶의 출발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려면 죽어야 하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세례식은 주님과의 결혼식 의미도 있지만 옛 사람의 장례식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주님과의 결혼은 좋아하면서 자기를 장사지내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동시에 신앙 생활도 잘 해보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을 멋있게 시작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발은 교회에 또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양다리 신앙생활을 하니까
예배가 주는 감격이나 새로운 삶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주일마다 교회를 빠지고 '저 푸른 초원 위에 있는 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꼭 무슨 사고가 날 것 같고 앞길이 왠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그 마음을 달랠 구실을 찾는데 시편 23편을 생각하고 안심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 말씀을 합리화시킵니다. "주님이 쉬라고 이 푸른 초장인 골프장으로 인도하셨을 거야."
또한 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사람이 또 생각합니다. "맞아! 이 골프채를 주님의 지팡이로 생각하고 편하게 즐기자."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있겠습니까?
< 새로운 삶을 결단해보십시오 >
여러분! 정말 주님을 믿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고자 하십니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면서도 지극히 만족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옛 사람을 장사지내고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옛 사람을 장사지낼 때 어떻게 됩니까? 4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옛 사람을 죽일 때 비로소 우리는 새 생명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주님과 함께 온전히 살고자 결단할 때 진정한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 공부하는 학생과 공부 안하는 학생 중에 누가 더 불안합니까?
사실상 공부하는 학생보다 공부 안하는 학생이 훨씬 더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해합니다.
공부를 안하는 학생도 마음속에는 항상 "공부해야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상 앞에 써 놓습니다. "3당 4락! 세 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
그처럼 공부하려고 작정을 했으니까 먼저 책상 정리를 하고 나서 책상에 앉습니다.
정리가 끝난 후, 공부하기 전에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 들어 온 것부터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서 공부하려니까 배가 조금 고픕니다. 그래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습니다.
배가 부르니까 슬슬 졸음이 와서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깨보니 새벽 두 시입니다.
새벽 두 시까지 책상에 있었으니까 이제는 떳떳하게 다시 침대에 가서 잠을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어젯밤에 두 시까지 공부했더니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했다고 하니까 어떻게 공부가 주는 축복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도 그와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매일 "신앙생활을 잘해야지,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작정을 새롭게 해봅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려면 왜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처럼 제대로 헌신도 못했는데 세월이 지나 어느덧 집사가 되고 구역장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이래봬도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다"라고 은근히 내세웁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신앙의 내용은 별로 없기 때문에 축복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려면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도 절대 손해나지 않습니다.
4절 하반부 말씀처럼 우리가 새 생명을 가졌다는 말은 덤으로 사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새로운 삶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의식한다면 더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여러 번 결단해 보았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정말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결단하면 조금씩이라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조차 하지 않으면 진짜 변화는 없고, 마음의 갈등만 더 깊어질 것입니다.
도둑이 새롭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면 안됩니다.
나중에 또 도둑질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도둑질하지 말아야지!"라고 결단을 해야
인간성이 회복되고, 다른 새로운 일을 찾아보게 되고, 점차 변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결단조차 하지 않으면 도둑질이 더 쉬워지고, 결국 죄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 항상 주님을 붙잡고 사십시오 >
그리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나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이면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려면 지혜도 필요하고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직장 때문에 교회에 자주 결석하는데 그때마다 몸둘 바를 몰라 합니다.
남들이 가볍게 생각하는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환경과 여건이 어려워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 어찌 믿음의 실패가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일을 혼자 맡아 하면서도 한 번도 찡그림 없이 묵묵히 조용히 감당합니다.
새벽기도에도 "내가 없다면 얼마나 그 자리가 쓸쓸할까?"하면서 묵묵히 나오는 모습을 보면
따로 무슨 축복을 빌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태도가 이미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멀리서 여기까지 옵니다. 그렇게 결정하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분은 비전이 있는 분입니다. 비전은 꿈꾸는 것만이 아니라 태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몸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쉬고 싶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겉모습이 어떠해도 그런 영혼은 정말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그처럼 어렵게 자리를 지키면서도 이렇게 고백할 때 얼마나 마음이 흐뭇한지 모릅니다.
"멀다는 것이 핑계지요. 제가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잘 할 수 있는데 못해서 죄송해요."
잘 하면서도 못해서 죄송하다는 그 한 마디가 듣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그런 자세는 아름답고, 씩씩하고, 용기 있는 자세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만약 그런 자세를 가진 청년이 있다면 돈과 지위가 없어도 자기 딸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실 것입니다. 자세가 바르면 반드시 축복은 따라 옵니다.
그처럼 주님에게 붙들려 사는 모습, 선한 일에 붙들려 사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주님 붙잡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높여주십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한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파출부 일을 하면서 자녀를 키웠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 신문배달을 하고, 앰프공장 등에서 일했습니다.
가정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려 했지만 어머니 때문에 한양공고 야간에 들어갑니다.
공고에 들어가서도 낮에는 헤드폰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주님을 만나 열심히 교회에 나가기 되었습니다.
학교에 갔다 와서 몸은 축 처졌지만 금요 철야기도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봄, 철야기도에서 진로 문제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음성을 주셨습니다.
"문식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더욱 성실하게 일하며 하나씩 전자 제품의 기술을 익혀갔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성공한 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좋은 경영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비웃으며 대했지만 그는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수부대에 자원해 5년간 복무하고 중사로 제대한 후, 예전 헤드폰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얼마 후, 그 공장이 망해서 직장을 잃은 후, 수개월 동안 교회의 도움으로 연명했습니다.
간신히 한 전자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밑바닥에서부터 열심히 일하다가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 그 회사를 그만 두고 지하 셋방에 조그만 가내 공장을 차렸습니다.
밤새 기계를 돌리니까 이웃집에서는 계속 항의하고, 사는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부부가 열심히 밤낮으로 일했지만 빚만 늘어나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어느 날, 그는 너무 실의에 빠져 자살할 마음으로 한강으로 나갔습니다.
두 자녀 생각이 나서 도저히 자살할 수 없었고 강물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이제까지 고생하며 산 삶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마음속에 강물의 유혹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번만 결단하며 영원히 편히 쉴 수 있어!"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쪽 발을 강물로 넣는데, 갑자기 "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사람들이 어떤 모임을 끝내고 헤어지고 있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니 이런 소리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집사님! 이번 주일에 뵙겠습니다."
그 순간 고 3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생각났습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함께 하리라."
그는 즉시 강물에서 발을 빼고 찬찬히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잠시 실패했다고 해서 29살의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곧장 교회로 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힘차게 살자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공장을 5평 짜리 차고로 옮기며 돈 50만원으로 중고기계 2대를 구입하고,
하나님이 앞길을 예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레전자산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불량품도 없게 하고, 철저하게 납기를 지키고, 신용을 쌓아나갔습니다.
그 뒤 연 300% 의 초고속 성장을 해서 지금은 장래가 유망한 벤처기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 몇 번의 실패는 반드시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더욱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학벌이 없고, 자산이 없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레 전자사업의 정문식 사장의 경우 한양공고 야간졸업이 그가 가진 학력의 전부입니다.
그처럼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꼭 붙잡는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높여주십니다.
너무 축복을 받으려고 서두르지 마십시오. 과목도 10년 이상 지나야 열매가 맺힙니다.
신앙인의 헌신도 그 진가가 드러나고, 축복의 열매가 맺히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하나님 믿을 겁니다"라고 외칠 준비가 되었습니까?
짧게 살든지, 길게 살든지 상관없이 항상 굵게 사시고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믿기는 하지만 적당히 타협하고 믿는 것을 적절하게 숨기며 살면 결과가 좋을까요?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 빼놓고는 믿지 않는 사람과 비슷하게 산다면 축복 받을까요?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교회에서는 믿는 척하고, 사람 앞에서는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믿지 않는 척하고 사는 그런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는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은 새로운 결단을 통해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고,
이미 세례 받은 분들도 덤으로 사는 인생임을 알고 더욱 헌신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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