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픔을 알아주시는 주님
2002-06-03 12:19:27 read : 1626
누가복음 22장 54-62절 // 20020602
<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
주일은 어떤 날일까요?
생명수가 흐르는 교회에 나가 말씀의 삽으로 슬픔을 퍼다 버리는 날입니다.
지난 한 주간, 고단하고 힘들게 살았을지라도
우리는 주일에 말씀을 들으며 슬픔을 버리고 새로운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 섭섭한 마음, 아픈 마음도 모두 다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내일은 분명히 맑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 겸손히 예배하다 보면 마음의 앙금이 털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앙금을 가지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슬픔과 아쉬움을 잘 닦아내어서
교회에 올 때 가졌던 눅진눅진했던 마음을 보송보송한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사람, 환경 다 잊어버리고 주님만 바라보면 그것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슬픔은 오직 주님만 잘 아시고, 잘 치료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장례식에 갈 때가 있는데, 그때 꼭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슬픈 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좋은 데로 갔을 거예요. 용기를 내세요."
지금 좋은 데로 못 가서 슬퍼합니까? 다시 그분을 볼 수 없어서 슬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픔에 대해 얼마나 잘 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합니까?
그런 말은 위로가 아니라 방정입니다. 그때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슬픈 일을 당해도 사람마다 슬픔의 감정은 아주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감정을 잘 알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잘 위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사람들을 잘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할 일은 주님을 소개하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말해주는 일뿐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형편을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파하는 어려운 현실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가장 최선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슬픔을 털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 베드로의 깊은 마음의 상처 >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베드로의 슬픔을 누가 제대로 이해하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이 이해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열두 제자 중의 하나라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베드로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베드로! 그 일에 대해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당신 혼자만 잘못한 것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좋은 위로이지만, 문제는 그 위로가 베드로에게 거의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금방 슬픔을 딛고 일어서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죄책감을 없애보려고 스스로 많이 노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는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도록 많이 애썼을 것이고,
자기가 처한 상황이라면 다들 그렇게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책감이 쉽게 없어집니까? 어디 잠을 제대로 잘 수나 있겠습니까?
어쩌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만 받아도 분을 삭이느라 잠을 못 자는 것이 사람인데
3년 동안 열심히 좇았던 스승을 가장 힘든 때 배반하고 잠이 제대로 오겠습니까?
사람의 감정은 자신의 이성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잊어야 살 줄 알면서도 잊지 못하고, 용서해야 살 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수십 번도 더 선한 마음을 가지자고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어차피 저 사람과 평생을 살려면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먼저 사랑하고 용서해야지!"
그런데 정작 다시 보면 미우니까 "용서 못해!" 하면서 미운 마음을 그대로 가집니다.
정직해야지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하고, 부지런해야지 하면서 또 게으름을 핍니다.
그런 상황에서 "잊어야지!"라고 결심한다고 베드로의 죄책감이 쉽게 없어지겠습니까?
어느 날, 어떤 분이 자기 아버지와 오해로 인해 전화로 큰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너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아버님!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이제부터 아버님을 없다고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탕 끊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어제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제 네 아버지와 무슨 일 있었니?"
그 상황에서 화를 내며 아버지에게 한 마지막 말이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그때 어머니나 친구가 어떤 말을 한들 그것이 그분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어떤 말도 위로가 되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마 평생 그분이 져야 할 짐입니다.
주님을 배반한 베드로의 심정이 아마 이 아들의 심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는 주님 듣는 곳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 예수란 사람을 모릅니다. 저는 이 사람을 결코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지 이해하십니까?
그 장면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 본문 61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주님이 몸을 돌려 그를 보셨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금요일 하루 종일, 베드로는 주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기가 배반하던 때 보았던 주님의 표정을 기억하고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토요일에도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앉아 있으면서,
그때 보았던 예수님 표정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어찌 그 표정을 잊겠습니까?
< 우리의 슬픔을 치료해주시는 주님 >
이때 만약 한 가지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지며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그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마음을 막았던 슬픔의 돌도 치워졌습니다.
또한 이 주님의 부활은 베드로의 슬픔뿐만 아니라 우리 슬픔도 치울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는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죄책감의 돌이 없습니까?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 죄책감은 아마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으면 우리의 눈물과 죄책감과 슬픔도 사라질 것입니다.
혹시 억장이 무너지는 슬픈 일을 당한 적 있습니까?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었다면 앞으로 있을 것도 예상해야 합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위로할 것입니다. "집사님! 집사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위로해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위로자가 계십니다. 바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또한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만큼 우리의 슬픔의 돌을 잘 치워 없앨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 살아 계신 주님을 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슬픔과 고통은 인생의 정화장치입니다 >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우리가 이렇게 어렵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항상 즐거운 삶을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기보다 우리가 더 그리스도인답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거룩함에서 옵니다.
거룩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슬픔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고통과 슬픔을 원하지 않지만
사실 그 고통과 슬픔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깊이를 더해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질 때가 우리의 믿음은 더 정화되는 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슬픔은 제 역할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영원한 존재가 아님을 깨우치는 역할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캠프장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머무는 여행객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영혼이 잠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려움은 잠든 영혼을 깨우는 모닝콜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4가지 이유 >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까?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첫째, 우리가 마음 상했을 때, 그때 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쟌 플라벨이라는 한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영혼을 채워주시려고 하면, 먼저 영혼을 비우는 일부터 하십니다."
우리가 낙심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왕궁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동굴에 숨어 있을 때 만났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대체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마다 주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더 가까이 만난다고 생각하십시오.
성도에게는 슬픈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소생하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2. 둘째,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도 낙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했었지만 그 다음에 보면 참 멋있게 사역을 합니다.
나중에 그는 죽지 않고 승천합니다. 그가 승천하는 장엄한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의 모습 때문에 낙심하면 안됩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죤 뉴톤은 젊었을 때 자신의 삶에 절망해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가 자살했다면 '어메이징 그레이스(찬 405장)'라는 노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가 없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여러분! 힘들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누구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감추어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앞의 흑암 뒤에는 하나님의 미소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엡 1:18)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찬 492)."
그러나 성경 에베소서 1장 18절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이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소중한 기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중한 기업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라는 소중한 기업을 경영하시려고 하나님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잘 경영하시기 위해서 아드님의 목숨까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의 신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 백성들을 구했습니까?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숨 걸고 세우신 우리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라는 기업을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이라는 기업은 망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기업인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빌게이츠의 기업은 망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숨을 걸고 지키셨고, 앞으로도 목숨을 걸고 지키실 것입니다.
4. 넷째,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데 우리가 실망하고 포기하면 됩니까?
신앙생활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우리의 기도, 우리의 믿음이 정말 효과가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생각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떠난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다."
어떤 어려움도 주님보다 크지 않고, 우리의 어떤 잘못도 복음보다 크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오늘은 반역했을지라도 내일은 순교의 재목이 될지 어떻게 압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앞세우고 더욱 분발하면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의 순수한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덤벙댑니까? 우리 주님은 베드로가 실수할 줄 잘 아셨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의 순수한 마음을 잘 아셨기에 그를 끝까지 품어주신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한 순간의 잘못된 모습만 보고 끝까지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잘 하려고 했었던 과거의 모습과 우리의 마음을 기억해 주십니다.
물론 주님은 죄를 그냥 덮어두면서 미화시키지는 않으십니다. 죄는 죄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들의 '최선'의 순간들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실 것이며,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될 미래를 보시며 품어주실 것입니다.
흔히 은혜는 물에 새겨 쉽게 잊고, 원한은 돌에 새겨 오래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 소외된 사람과 함께 해주십시오 >
그런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극복하는 것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슬픔 많은 세상이기에, 내 슬픔에만 매달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 보듬어주며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가끔 어려움에 빠진 다른 사람을 보듬어가며 사는 삶을 막는 논리가 있습니다.
"저 사람! 자기가 그 일을 자초한 것 아니냐? 제 코스대로 당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을 훨씬 적게 보고, 적게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생각할 때, 나 자신의 잘못도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정의에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과 우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그렇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실망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우리 주위의 다른 형제에 대해서도 참고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서로에 대해서 참아주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주님은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 주변의 슬퍼하는 사람, 작은 자, 연약한 사람, 비천한 사람을 품을 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을 만나는 태도요, 주님을 품고 사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주님을 품고 사는 삶이 바로 진짜 축복 아니겠습니까?
지난 목요일 우리 교회의 김정효 전도사님과 함께 횃불 회관에 가서
동두천에서 혼혈아 42명을 교육하고 있는 강영철 선교사님을 만나 교제를 나눴습니다.
선교사님에 의하면 혼혈아들은 얼굴은 분명히 혼혈아인데 말은 한국말을 쓰면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로부터 왕따 당해서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그렇게 그만둔 학생들 42명을 모아서 선교사님이 따로 그들을 교육하고 있었는데
강 선교사님 자신이 혼혈아 출신이기에 아이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님이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면서 3가지 기도제목을 주었습니다.
첫째,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쳐 줄 선생님이 여러 분 필요하다고 합니다.
영어를 조금 못해도 정성을 가지고 가르쳐줄 분이면 누구나 환영한다고 합니다.
(청년, 대학생 중에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봉사하실 수 있는 분 연락 바랍니다)
둘째, 비록 학생이 42명밖에 되지 않지만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교육기관으로
정식 인가 신청을 냈는데 하루 속히 인가가 나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셋째, 아이들의 가정이 대개 어려워 그들로부터 교육비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재정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그 문제에 대해 같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소외된 분들이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온 작은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이런 분들의 형편에 귀를 기울이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요삼일육선교회 선교후원 회원으로 가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사랑 받아야 할 소외된 사람'입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심지어 미운 사람도 밉게 보지 않고 소외된 사람으로 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에게도 '슬픔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서 힘차게 내일의 삶을 열어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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