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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눈을 뜨는 비결:마가복음 10장 46-52절

by 【고동엽】 2023. 11. 28.

영적인 눈을 뜨는 비결

2001-12-06 17:14:31 read : 347

 

마가복음 1046-52

 

오늘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실수와 아픔이 생기고,

자기뿐만 아니라 남도 피해를 주는 경우를 많이 발견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워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정말 항상 부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알려는 노력과 배우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겸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알지 못해서 얼마나 실수가 많은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서울 서대문 지역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쓴 이런 글을 봤습니다.

불광동에서 한분이 교회를 개척했는데, 이름을 불광 제일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교회는 이름뿐만 아니라 뜻도 중요한데 그렇게 하면 됩니까?

불광은 "부처님의 광채"라는 뜻인데, 그러면 불광 제일교회는 어떤 뜻이 됩니까?

"부처님의 광채가 제일 넘치는 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몰라서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특별히 무엇인가를 체험한 초신자들 중에 겸손하지 못한 분들은

그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모든 것을 다 판단해 버립니다.

 

저도 옛날에 몰라서 이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80년대 중반에 제가 서울 명성교회에서 대학부 교사를 했을 때입니다.

84년에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 2년 동안 저는 그때 성경을 엄청나게 봤습니다.

그때는 다른 책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만 봤습니다.

상당히 책을 빨리 읽는 저도 성경을 처음으로 한번 다 읽는데는 2달 반이 걸렸습니다.

 

제가 신구약 성경 1754페이지를 다른 책 읽듯이 읽으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면서도 일주일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줄을 쳐가면서 읽었기 때문에 두 달 반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읽을 때는 처음 줄을 친 부분 말고 또 줄을 치며 읽었는데

처음 줄을 친 부분이 익숙해져서 읽는 속도가 조금 빨라져 25일이 걸렸습니다.

세 번째 읽을 때는 조금 더 빨라져서 2달이 채 안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1년 반쯤 후에는 2주일 이내에 성경 독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부에서 성경퀴즈대회를 했습니다.

대학부 교사 세 명과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네 팀이 대결을 했는데,

저는 그때 정말 성경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사실 모르는 것이 거의 없어서 제가 거의 맞추었습니다.

그때 대학부 담당 전도사님에게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정말 대학부 선생의 자격을 증명해 보였다"고 좋아했습니다.

 

그 뒤 얼마 후, 대학부 2부 행사로 이단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저도 서점에 가서 각종 이단에 관한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 WCC(세계교회협의회)는 왜 이단인가라는 책을 봤습니다.

그 책을 보니까 WCC는 바벨론이고, 그 회의에 공산주의 대표도 참석했다고 하면서

한참 WCC가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내용을 써 놓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열심히 이단발표회에서 WCC는 이단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의 얼굴이 내내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왜 불편한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랬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알고 보니까 제가 다니는 명성교회가 속한 장로교 통합측 교단이

바로 WCC에 가입한 교단이었습니다.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일입니까? 물론 모르고 한 일이지만

자기 교회가 속한 교단을 이단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와 같이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한 사람의 말만 듣는 사람도 아주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한번 체험해서 뜨겁기만 한 초신자도 그처럼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WCC를 이단이라고 한 책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국가 소련에서 12명이 1950년대 중반 WCC 회의에 참석했으니까

결국 WCC 는 공산주의와 결탁한 단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인터넷을 통해서 1955년 당시 세계연감을 보니까

소련이 공산화되긴 했지만 당시 미국 신구교 총 교인수는 8630만명인데 반해

소련의 신구교 총 교인수는 11290만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공산주의의 억압을 받고 있지만 그들도 엄연히 교인이고,

그들의 대표 12명이 참석했다고 그 단체를 이단이라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협의회에 가입한 한국의 대표적 장로교단을 이단이라고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통합측 교회인 영락교회, 온누리교회, 명성교회가 다 이단인 셈입니다.

 

제가 그때 성경은 약간 알았지만 교회 돌아가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섣부르게 책 한 권을 통해서 알고 정확하게 모르면 이처럼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더 성숙해야 할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예는 너무나도 많이 있고, 저도 꽤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때 기억들을 생각하면 "좀 더 겸손했을 걸..."하는 후회가 항상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분들 중에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께서 감동 주셔서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받았지만 눈에 비늘이 갓 떨어진 갓난아기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만의 진리를 가지고 무섭게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얘기를 들으면 그 얘기만 듣고 다른 것을 무섭게 비판합니다.

 

요새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런 무서운 사람이 사이버 공간에서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성도는 착한 일 많이 해야 합니다"라고 글을 띄웠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만 아는 무서운 신자가 또 말합니다. "착한 일 하면 천국갑니까?"

 

여러분! 누가 착한 일 많이 해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믿는 사람답게 향기를 날리며 살자는 말을

꼭 그렇게 왜곡해 들어서 엉뚱한 비판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가끔 주님 처음 만났을 때 그 첫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그런 기도를 너무 하지도 마시고, 좋아하지도 마십시오.

첫 사랑은 뜨겁긴 하지만 진짜 사랑은 푹 익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뜨거움은 덜해도 고난을 겪으면서, 그리고 여러 갈등도 겪으면서

이해와 용서와 절제의 맛을 풍기는 익은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부부간에 익어 가는 사랑관계를 통해 저의 말을 실감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초신자를 좋아하는 것 같이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초신자이든 오래된 신자이든 겸손한 신자를 좋아합니다.

초신자는 몰라서 비교적 겸손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많지만

초신자가 한번의 체험으로 높은 사람 같은 태도를 보이면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통합적 인간이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을 볼 때에서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최소한 그러한 자세가 준비되어야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아는 진리를 가지고 이리저리 언어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소경이었던 바디매오가 눈을 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디매오를 오늘날 영적으로 눈이 감긴 사람들로 생각해 보고,

바디매오가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

성도들이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비결로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디매오는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1. 첫째, 그는 예수님을 간절히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47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디매오와 같은 이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도 얻고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형상처럼 변하고, 우리 삶에 주님의 향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주님처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나는 천국만 가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죽어서는 천국에 가지만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서서

정말 향기를 날리는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최고의 영성은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설프게 만난 사람이나 한두 번 만난 사람은 실수를 많이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꾸준히 교제한 사람들에게는 겸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끊임없이 사모하고, 항상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숙한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둘째, 그는 환경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나 48절 말씀을 보니까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대상은 예수님이지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옆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어떤 환경 때문에 하면서

예수님께 향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싫은 경우에 포기한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리고 환경을 보고 포기하면 됩니까?

 

물론 그가 환경이 나쁘다고 말한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믿음이 약한 탓도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전염병이 돌아도 건강한 사람은 그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환경을 극복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환경이 있을 수 있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는

그러한 영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영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필요성도 바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코카콜라 중역들은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코카콜라가 나의 종교이다.

우리들의 혈관을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이다."

신앙고백은 아니지만 정말 무서운 신념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으로 갖가지 고난을 이기고 회사를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보다 훨씬 강한 확신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3. 셋째, 그는 겉옷을 내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내어 버렸다는 말에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자기의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니까 그는 자신의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왔습니다.

그 겉옷은 밤에는 이불 역할도 하는 것이기에 거지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기의 소중한 것을 포기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포기하면 주님은 그 포기한 것 이상을 항상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2) 자기의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할 때

그 소원을 이룬 여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그녀의 요청을 처음에는 얼마나 매몰차게 거절하십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중에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왜 주님께서는 처음에 여인의 요청을 무서운 언어로 거절하십니까?

그것은 그녀의 마음과 믿음의 진정성을 살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자존심이 무너지는 시험을 참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시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시험에 합격하여 그녀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면 믿음의 발전이 있겠습니까? 아니며 후퇴하겠습니까?

절대적으로 후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육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사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의사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부끄러움을 타면 치료가 되겠습니까?.

필요한 것이라면 아무리 부끄러운 부분이라도 다 내어 보여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 다 내어놓아야 온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몸된 전인 교회에서는 항상 겸허한 심정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큰 소리보다는 겸허한 소리, 배짱보다는 겸허한 태도,

그리고 트집보다는 이해를 먼저 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교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등록도 심각하고 신중하게 하시고, 등록한 후에는

이곳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라는 심정으로 교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등록해 놓고 갖가지 이유를 다 대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 사람을 무시한다, 무엇이 부족하다..."

그렇게 따지면 어찌 그것만 부족하겠습니까?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이유를 대고 떠나면 기분만 상하고 신앙성숙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교회든지 문제는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자신의 성숙을 위한 진통의 과정, 껍질을 깨는 과정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자기보다는 공동체, 하나보다는 모든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그러한 태도를 보여야 우리의 신앙은 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4. 넷째, 그는 자기의 필요를 욕심 없이 아뢰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바디매오는 주님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주님 앞에 나왔고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하고 물었다면 욕심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욕심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영적인 시각이 구비되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흔히 영적 건강을 진단할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진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체온 측정 진단입니다. 영적 온도가 알맞은지 진단해야 합니다.

온도가 낮아지면 심각한 위험입니다. 죽는 사람들은 체온이 낮아집니다.

반대로 온도가 너무 높아도 안됩니다. 보통 병들면 온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다가 온도가 더욱 더 높아지면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그처럼 영적 체온이 너무 올라가서 이단이 안된 교회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청진기 진단입니다.

그 청진기로 마음 속에 선을 추구하는지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틀림없이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세상적인 복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거의 다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그것은 결코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도 인정하는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망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켜 나중에 두 배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적인 복을 지향하기보다는 최종 승리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배부름보다는 최종승리를 향해 우리의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5. 다섯째, 그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가 믿음으로 눈으로 뜨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이고 이제야 멋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자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하고 주님의 뒤를 좇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주님을 만났고, 감사로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7장에서도 나옵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 사마리아인만이 주님에게 달려와 감사했습니다.

그도 자기의 치유소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 대자연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

여러 마음이 있었겠지만 가장 우선순위를 주님께 대한 감사로 두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우선순위의 삶이 엮어내는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우선순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한시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한 사람의 단점 중에 최대의 단점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모습은 최대의 인격자의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눈이 뜨인 정말 성숙한 성도님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우리 영혼을 아름답게 지켜 나갈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살고, 주님 만날 때에 어엿하게 만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더불어

거룩하고 향기 나는 삶이 주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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