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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

by 【고동엽】 2021. 12. 13.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

전도서 1장 1-7절

<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

2002년 성탄절에 미국의 잭이란 사람이 교회에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는 역사상 가장 당첨액수가 많은 로또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받은 금액이 모든 세금을 제외하고 1억 130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 돈으로 1130억 원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1130만 달러(113억 원)를 십일조로 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고 최고로 행복한 존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꺼번에 엄청난 돈을 쥐었지만 돈을 사용하는 지혜는 없었습니다. 그는 로또에 당첨된 후에 스트립쇼 하는 곳을 들락거렸습니다. 또한 도박 중독에 빠져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2004년에는 2번이나 음주운전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2005년 1월 2일에 재활 센터로 강조 입소되었습니다.




잭뿐만 아니라 잭의 가족에게도 불행이 닥쳤습니다. 그에게는 브랜디(Brandi Bragg)란 사랑하는 15세 손녀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녀에게 매주 5천 달러(5백만 원)의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15세 손녀는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디에 써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친구를 하자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녀의 돈을 보고 몰려온 것이지 그녀의 인격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많은 돈으로 그녀는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10대 소녀가 마약에 손을 대고 게다가 엄청난 현금까지 있으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녀 주위에는 수많은 마약 친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마약을 하면서 브랜디는 원래 있었던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브랜디의 18세 남자친구인 제시 트리블이 마약 과다 복용으로 잭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손녀인 브랜디는 17세 때, 마약 과다복용으로 죽었고, 그녀의 시체는 담요와 플라스틱 방수천으로 둘둘 말린 채 그녀의 남자 친구 집에 있는 낡은 밴 옆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잭은 로또에 당첨된 지 정확하게 2년이 지난 성탄절 전날에 자신의 손녀를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잭은 거액의 로또에 당첨되면서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그의 가정과 영혼이 완전히 파탄이 났습니다. 그런 비슷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일부 연예계와 스포츠 스타들은 엄청난 돈을 법니다. 연봉이 백억 원이 넘는 스타들도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면 많은 스타들이 마약 주사바늘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또한 옛날 대 스타로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 병들어 꼴이 형편없게 되고, 병원비가 없어서 보건소를 전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처럼 스타들의 미래가 꼭 밝은 것만은 아니고, 땀 흘린 것 이상으로 큰돈을 버는 것도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돈을 잘 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은 돈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돈과 성공을 앞세워 살지 말아야 합니다.




1970년대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에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얼마나 떠버렸는지 그의 별명이 떠버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요즘 가끔 매스컴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심한 파킨슨씨병으로 그 꼴이 아주 비참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알리는 더 이상 떠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떨리는 음성으로 겸손하게 말합니다. “인간은 약하고 하나님만이 강하심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제가 이 병에 걸렸습니다.”




인간의 영광은 한 때입니다. 흔히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산다고 하는데 인기를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인기가 아닌 기쁨과 보람을 먹고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에 최선의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영혼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교회와 선교사와 이웃을 섬기는 법을 모르면 아무리 성공해도 그 사람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 >




본문은 인간의 영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말은 사람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습니까? 솔로몬 왕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솔로몬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다 맛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쾌락 뒤에는 항상 쾌락보다 무서운 공허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영화와 쾌락이 다 쓸데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한 가지 전제를 답니다. 그것은 해 아래서 사는 삶이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하나님 아래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면 어떤 행복이 주어집니까?




1. 인생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가끔 아파트 앞을 지나가다 보면 버려진 가구들을 봅니다. 그처럼 버림받은 가구들을 보면 가끔 무엇인가 마음에 찡한 아픔이 밀려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제일 슬픈 일이 무엇입니까? 언제는 좋다고 하면서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그런 일을 많이 당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은 고독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그런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항상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이 다 떠날 때 오히려 찾아오는 사람이고, 항상 겸손하고 따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계산을 하면서 살지 않고, 작은 것에서도 만족하고, 항상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동반자가 한두 명이라도 있으면 인생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힘이 납니다.




요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다시 실직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땀을 흘릴 수 있는 일터가 내게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가끔 일하면서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겪을 때도 있지만 그처럼 힘들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터가 있다는 것도 사실은 축복입니다.




어느 날, 구조 조정으로 실직한 한 가장이 아내 앞에서 푸념을 했습니다. “여보! 정말 살기가 힘든데, 이런 때 백지 수표라도 한 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부부가 힘든 현실 앞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데, 어린 딸아이가 방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아빠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습니다. “아빠! 이거 받으세요.” 딸아이를 보자 아빠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물었습니다. “그게 뭔데.” “제가 만든 백지 수표예요.”




그처럼 딸아이가 귀여운 고사리 손을 하고 흰 종이를 내밀 때 아빠는 자기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하는 어린 딸의 마음을 읽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혜야! 백지수표 줘서 고마워. 잘 쓸게. 그런데 진짜 백지수표는 바로 너야!” 그리고 어린 딸아이를 꼭 껴안아 주니까 딸아이가 아주 행복한 표정을 했습니다. 그 표정을 보니까 비록 실직한 상태였지만 그 때만큼은 정말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행복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가족과 교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해도 가정과 교회에서도 인간관계가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고통은 어느 고통보다 심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누가 필요합니까? 바로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외로울 때 더욱 가까이 해주시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은 죽을 때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장의사를 하는 한 장로님 말에 의하면 시체에 수의를 입힐 때 신자와 불신자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잘 믿다가 죽은 시체들은 나긋나긋해서 수의를 입히기 쉬운데,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뻣뻣해서 수의를 입히는데 아주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을 때 믿음이 있으면 편안히 죽지만 믿음이 없으면 불안으로 경직된 상태로 죽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시체에도 얼굴 표정이 있습니다. 어떤 시체는 편안한 모습으로 웃고 있고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체는 얼굴이 화난 표정이고 근육이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 모습에 벌써 천국의 삶과 지옥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천국이 예약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안심이 됩니다. 그처럼 주님이 함께 하면 인생길이 외롭지 않고 죽을 때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은 가장 큰 축복은 ‘갈 데’가 있는 축복입니다. 사람은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갈 데’를 아는 사람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갈 데’를 알고 있으니까 항상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나약해집니까? ‘갈 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갈 데’를 모르는 사람은 대개 ‘가지 말아야 할 데’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갈 데’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은 또 하나의 큰 축복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삶의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가 없으면 아무리 성공해도 얼마나 삶이 공허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목적이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리 힘들고 고난과 상처가 있어도 그 삶에 신비한 행복과 보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이라는 인생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 때문에 고생도 하지만 기쁘게 고생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명을 따라 살 때 가장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을 보면 바울은 주님의 일꾼이 된 행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은 돈을 벌고,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지 않고, 자신이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을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주님의 은혜의 선물을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나눔과 헌신이 없으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눠주고, 주고받아야 은혜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굶는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도 선물이지만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선물이고, 그 친구의 위로로 새 힘을 얻어서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보답하는 것도 도움을 준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삶입니다. 또한 인정에 굶주린 사람에게 따뜻한 눈빛, 다정한 언어를 주는 것도 선물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주려고 하는 작은 노력도 선물이며,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언제나 넉넉함으로 기다려 주는 것도 선물입니다.




또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틈에서 묵묵히 몸을 굽혀 사는 것도 선물이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복음을 소개하는 것은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선물을 주면서 살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은 그런 삶을 통해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에 행복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줄 알면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해해야 되는데 이해하기 싫고 용서해야 되는데 도저히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결코 복된 삶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극복합니까?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해주셔야 하고, 예배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함께 해주시면 우리는 미움과 분노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설교 중에 가장 듣기 좋은 설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하라! 할 수 있다! 희망이 있다!”는 설교입니다. 반면에 설교 중에 가장 듣기 힘든 설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하라!”는 설교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입니다. 그처럼 듣기 힘든 설교를 잘 듣고 소화하면 그때 용서의 능력이 생기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아물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그를 위해 하나님이 가장 멋지게 일하셔서 문제를 처리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언제 그런 능력이 생깁니까? 주님께 모든 일을 맡길 때 생깁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최대한 다해야 합니다. 땀은 정직합니다. 땀을 흘렸는데 기대하는 어떤 열매가 없다면 반드시 다른 열매라도 있습니다. 항상 최선의 땀을 흘리되 일의 최종 결과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러면 어떤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고, 리더십과 권위도 주어집니다.




어느 날, LA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처음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갑자기 슉 흔들리니까 소름이 오싹 끼쳤습니다. 그때 TV가 떨어지고 어항이 굴러 떨어졌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목사님은 어느새 침대 밑으로 머리를 밀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본능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반면에 사모님은 어느새 아이들을 몸으로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그 일 후에 집의 힘이 균형이 갑자기 사모님 쪽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위기 때의 자세가 중요한데, 지진의 위기 때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지진이 난 후에 가정의 리더십에 지각변동이 있게 되었고, 목사님이 사모님을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위기 때 넉넉한 마음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는 힘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려고 하면 그런 넉넉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겸손해져서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겸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도 강한 자기 프라이드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적절한 프라이드는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항상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언제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하게 됩니까?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 겸손하게 됩니다. 그처럼 겸손하게 되어야 진정한 행복도 찾아오게 됩니다.




제가 사랑칼럼에 쓴 내용입니다. 어느 날, 한 고등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장래 희망 난에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교사가 장난하는 줄 알고 그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서 뺨을 때리며 말했습니다. “너 나랑 농담하자는 거야! 장래 희망을 적으라고 했더니 사람이라고 적어!” 그런 식으로 그 학생이 한참 야단맞고 교무실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정말 사람이 되는 것이 희망인데.”




우리는 흔히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남을 배려하는 겸손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대개 찹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대개 따뜻합니다. 그처럼 항상 겸손해서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사랑의 빛이 나오고, 우리의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평화가 생기고 갈등과 싸움이 그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가끔 사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하는 분들이 있지만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말도 절제해야 합니다. 물론 힘들다는 이유를 나름대로 다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우리가 지금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 가지고도 우리는 주님의 크신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처럼 평범한 삶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욱 큰 감사거리를 주실 것입니다.




<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사십시오 >




사람에게 행복의 제일 조건은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은 포장도로가 아니라 비포장도로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악인의 길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높은 자리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쉴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듯이 높은 자리는 그만큼 힘든 자리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대통령직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무덤에 있는 것이 낫다.” 3대 대통령인 제퍼슨도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권력의 사슬을 벗어던질 때 느꼈던 해방감은 죄수가 감옥에서 나올 때의 해방감 이상이다.”




행복은 물질과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물질을 쓸 줄 모르면 물질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헌신할 줄 모르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됩니다. 우리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교회를 섬기며, 보다 많은 영혼을 구하고, 보다 많은 이웃을 돕겠다는 철저한 자세를 가지고 물질과 자리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체이고, 그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일본의 오사카에 한 거지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다리 밑에 움막을 치고 사는데, 자식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하루 종일 동냥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무능하다고 박대하지 않고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밥을 얻어 오면 절대로 찬밥을 주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서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두 부부는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일마다 정성스럽게 교회에 나왔습니다. 부인이 이빨도 다 빠지고 머리도 수세미를 하고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이 그 부인을 끔찍이 위해주며 손을 잡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누군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성도님! 다리 밑에 살면서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왜 불행해요? 예수님도 있고, 남편도 있는데요.”




그 거지 부부는 교인 중에서 제일 가난한데 사는 모습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으면서 두 부부가 열심히 오사카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 부부는 가끔 강가에서 고기를 잡았다고 목사님 드시라고 들고 왔습니다. 그들은 받기만 하지 않고 드릴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부부의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목사님이 설교한 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전도하라고 하니까 그 부부는 다리 밑에 살던 거지 한 소대를 끌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들을 중심으로 구역이 만들어졌고, 점차 그 거지 구역에서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이 생겼습니다. 또한 목사님이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청산하는 것도 성도의 중요한 삶이라고 설교하니까 그 말씀대로 열심히 일해서 다리 밑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그리고 우동 집을 차려 행복하게 교회를 섬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성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살면서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할 수도 있고, 어렵게 될 수도 있고, 까닭 없이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은 결코 그를 비켜가지 않고, 시간이 그의 편이 되면서 곧 복된 일이 다가오고, 자녀들까지도 대대로 축복받는 가문이 될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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